상사병이라는 의미로든 흥분이라는 의미로든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기회를 잡고, 쾌감을 느끼고, 연애운이 터지고, 세상의 선의를 만끽할 권리가 50세 이하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야망이 너무 크다 싶을 때조차 문을 닫기 전까지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무의식적으로 하던 일들을 기적처럼 다시 발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젊을 때는 힘이 남아돌아서 생각 없이도 척척 해냈던 일이 나이가 들면 예전 같지 않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2

사랑은 어느 나이에나 우리를 각성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나는 상대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그의 창조자가 되고 상대는 상대대로 나의 창조자가 된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5

"사랑한다는 말은 ‘너는 죽지 않아’라는 뜻이죠."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참 잘 말해주었다.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기뻐하고 나 또한 살아 있음으로써 상대에게 매일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삶의 낙을 맛보고, 하루하루를 허무에서 건져내고, 일상의 지지부진한 모습을 바꿔놓으려면 둘이 딱 좋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했는가? 딱히 한 일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하루 일을 세세히 늘어놓느냐 혼자 곱씹느냐는 완전히 다르다. 어느 때라도 우리가 읊조리는 불행과 비참을 따뜻하게 들어주는 이는 필요하다. 어느 때라도 우리는 타자를 경청하고 위로와 조언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6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고 소소하게 마음을 써주는 자세가 벼락같은 고백보다 더 단단히 커플을 묶어준다. 인간사의 덧없음이 이때만큼 와 닿고 감정을 건드리는 때가 없다. 사이 좋은 커플은 대화가 끊이지 않고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친교를 함께한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성역’은 있다.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가장 애틋한 것, 가족, 아이들, 친구, 사랑. 그 성역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핵심은 간간이 의심과 우울을 피할 수 없을지언정 항상 열정을 지키는 것이다. 눈이 욕망으로 빛나고 손이 애무하며 입술이 키스하는 한, 비록 나이가 여든이 됐어도 심장은 새것처럼 가슴 속에서 박동하면서 생의 활력을 우리에게 불어넣는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6

시간 속에서 사랑이나 우정을 통해 영원을 경험한 사람은 존재에 바짝 다가간 기분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진짜 비극은 언젠가 사랑하고 욕망하지 못하게 되는 것, 우리를 세상과 타자에게 다시 연결해주는 두 개의 수원水原이 말라버리는 것이다. 성의 반대는 금욕이 아니라 생의 피곤함이다. 위대한 성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다. "제게 순결을 주시되 당장 주시지는 마옵소서." 생은 자신에게 예스라고 외친다. 존재는 무존재보다 귀하고, 욕망은 무욕보다 낫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침묵하면 타나토스가 벌써 이긴 거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7

우리는 그런 미지의 상대와 가장 험난한 시련을 겪지 않았으니 뜨겁게 끌리는 게 아닐까. 그 시련의 이름은 불확정성의 힘을 지닌 일상이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4

스러져버린 욕망들의 수의壽衣가 이미 실현한 야심보다 머릿속을 더 많이 차지한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5

편집증은 꼼꼼하게 대비함으로써, 나르시시즘은 그냥 무시하는 방식으로, 각자 나름대로 물리적 시간의 절대성에 저항한다. 단 일반적인 신경증은 시각에 맞춰 도착하기를 좋아한다. 시계를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정확하게 도착해서는, 자신을 보고 놀라워하는 상대에게 놀란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6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처럼,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대신 회중시계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영원히 "늦었어! 또 늦었어!"를 외친다.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초침을 따라잡으려면 숨이 찰 수밖에 없다. 정확한 시각은 사실 정확하지도 않다. 시간은 어차피 매 순간 우리 손아귀에서 달아나고 있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7

시간의 지속은 불확실성을 줄여준다. 그렇지만 때때로, 어느 특별한 순간에는 우리 안에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은 풍요가 있다. 꿈은 끝까지 부담스러운 이 자아, 쇠공처럼 무거운 이 과거에서 벗어나 구원의 일화를 꾀하라고 우리를 닦달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의 의미가 드러나기를 기다릴 권리가 있으니"(앙드레 브르통) 말이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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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 구석, 보보렐 거리 4번지의 높고도 좁다란 집 맨 위 층인 6층에, 앞을 못 보는 열여섯 살 소녀, 마리로르 르블랑이 모형 하나로 꽉 찬 낮은 테이블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녀가 다가가 앉은 모형은 그 도시의 축소판으로, 성벽 안에는 작은 집과 가게, 호텔 수백 채가 들어 있다. 구멍이 숭숭 난 첨탑이 솟은 성당, 육중하고 오래된 생말로 성, 해안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굴뚝 달린 저택들.
몰이라는 해변에 가느다란 나무 방파제 하나가 활처럼 비어져 나와있다. 촘촘한 그물 같은 아트리움이 어시장 위로 둥근 지붕을 드리웠다. 극미한, 사과 씨앗 크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벤치들이 앙증맞은 광장에 점점이 놓였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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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림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어딘지 모를 곳에 아득하게 빠져들어 간 듯한 느낌이다.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자의식에서 해방되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어도 좋다. 풀꽃을 그릴 때 나는 한 송이의 풀꽃, 한 낱의 풀이파리가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무아경에 이르는, 나 자신을 초월하는 신비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는 사물의 본질에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닿았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거기서 느낌이 생기고 모습과 소리가 따르고 또 몇 줄기 말씀이 눈을 뜨기도 한다. 그때의 그 황홀감이라니! - <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57144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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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하며, 둘도 없이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무엇인가를 원했다. 두려움에 찬 노력이 의미 있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던 그 무엇이기를, 자기 자신을 알게 해주며, 변화를 가져다주고 살게끔 해주는 무엇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온갖 위험, 알아채기 어려운 덫, 주문(呪文)에 싸인 계략과 같이 훨씬 미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7

전쟁이 끝났지만, 무엇이 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은 유일한 인상은 무엇인가 완료, 종말,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해피엔딩이나 극적인 결말 대신 따분하고 우울한 결말이었다. 뒤이어 공허하고 씁쓸한 느낌만 남아 추억들을 암울하게 몰아갔다. 시간이 더디게 갔다. 세월이 흘러갔다. 나이를 먹었다.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그들이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평화였다. 학창 시절,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시절, 삶의 절정이던 7년여의 시간이 한순간에 과거로 묻혔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8

아마 아무것도 바뀐 게 없을지 몰랐다. 여전히 창가에 서서 안마당, 아담한 정원, 마로니에를 바라보고 새들의 지저귐을 들었다. 흔들거리는 선반에 다른 책들, 다른 음반들이 쌓여 갔다. 오디오 턴테이블의 다이아몬드바늘이 닳아가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8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9

가끔은 모든 것이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될 일이었다. 삶이 그들을 달래줄 것이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변화도 없고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없이,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거의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 같은 주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행복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동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도 흔들어놓지 못할 영원한 감미로움을 맛볼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9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0

그러나 우정 역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저녁나절, 비좁은 답답한 방에 모인 커플들이 사나운 눈길로 언성을 높이며 충돌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결국 자신들이 공들여 만들어낸 이토록 아름다운 우정,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의례적 어휘들, 친밀한 우스갯소리, 공통의 세계, 공통의 언어, 공통의 몸짓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쪼그라든 세계, 맥 빠진 세계는 아무 비전이 없었다. 그들의 삶은 정복과 거리가 멀었다. 삶은 부서지고 흩어져 갔다. 자신들이 얼마나 매너리즘에 빠져 무력하게 되었는지 깨달은 것도 이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공허함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다 같이 권태로움에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말장난과 술을 즐기고 숲 속에서의 산책이나 성대한 식사, 영화와 계획들에 관한 긴 토론, 그리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모험과 삶, 진실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가볍고, 시작도 미래도 없이 무의미하고 공허한 제스처일 뿐이었다.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말과 손이 닳도록 하는 악수, 이 같은 의례적인 행동들이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1

옛날 친구들이 견고한 서열 사회 속으로 거의 힘 안 들이고 잘 합류해 들어가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세계에 동조하는 것을 보았다. 옛 친구들이 굽실거리며 비집고 들어가 권력과 영향력, 책임감에 탐닉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친구들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가 그들과 완전한 대척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았다. 그 세계는 통틀어 돈, 일, 선전, 능력을 합리화하고, 경력을 높이 사는 세계, 자신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 세계, 간부 직원들의 진지한 세계, 권력의 세계였다. 자신들의 예전 친구들이 머지않아 이 모두를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3

그곳에는 그들의 욕망과 희망이 스며 있었다. 그곳에야말로 진정한 삶, 그들이 맛보고 싶고 영위하고 싶어 하는 삶이 있었다. 25년 전, 미용사와 회사원 부모 아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여기 진열된 연어, 양탄자, 크리스털을 즐기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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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진동관리법에 따른 도로 소음 관리 기준은 주거지의 경우 낮에는68데시벨, 밤에는58데시벨이다. 서울시3차원 소음지도에 따르면 용산구 이촌동 강변북로의 밤의 소음도는80.3데시벨이다. 주요 도로 주변의 고층 아파트, 오르막길이 많은 동네일수록 시끄러운 동네로 꼽혔다. 반면 정동 덕수궁길 주변 거주지는46.5데시벨을 기록해 서울 시내에서 밤에 가장 조용한 동네로 꼽혔다. 그런데 우리 집은 겨우20데시벨 수준이다. 골목길은 사람 길인 탓에 집을 짓는 데 여러 가지 불편함을 주었지만, 고요함이라는 선물도 안겨줬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45

하지만 나무가 주는 불편함은 제법 많다. 나무집은 살아 숨 쉰다. 일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역동적으로 걸어 다니는 수준은 아니지만, 집이 분명 살아 있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50

우리에게 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쉼은 실로 다양하다. 텃밭 생태계를 관리하고 관찰하며, 갓 수확해 수분 가득한 오이고추를 베어 먹고, 색색으로 익은 방울토마토도 따 먹고, 호박잎 아래 숨은 사마귀가 커가는 것을 살피며 앞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하늘을 구경하며 술도 커피도 한잔하는 그런 것. 집에서만큼은 시계를 보지 않고 해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도 쉼이다. 땀을 쏟으며 쓸모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쉼이다. 우리에게는 타의에 휘둘려 방전된 에너지를 집이라는 공간에서 오롯이 충전하는 것이 바로 휴식이다. 비록 관리할 게 많은 한옥이지만 집만큼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곳은 없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54

"철은 계절이자 시간의 흐름이죠. 정원에는 식물이 있고, 온갖 기후가 머물고, 동물도 찾아와요. 정원 안에서 이 모든 걸 느끼고 보면서 저도 철이 드는 것 같아요."
철이 든다는 것은 제철을 안다는 의미가 아닐까. 나도 철을 알고, 철이 들고 싶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58

"나를 알게 하는 힘과 에너지를 주는 것이 음식입니다. 미식도, 탐식도, 과식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람은 음식으로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음식을 만들죠. 정해진 조리법이 아니라 마음 에너지에 따라, 음식 재료의 본질을 생각하면 누구든지 요리할 수 있어요. 음식 재료를 아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분에 고추든 상추든 한 포기의 식재료를 꼭 키우라고 권합니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 에너지를 얻는 것, 즉 음식 재료를 아는 것은 나의 에너지의 기원을 아는 일이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63

계절의 변화를 보고 철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땅이 네모반듯하지 않은 덕에 생기를 뿜어내는 생명체와 함께 살게 됐다. 꽉꽉 채우지 않아도 좋다. 틈이 주는 활력이 크다. 집 짓는 동안 내 마음을 괴롭혔던 삐뚤빼뚤한 땅과 그렇게 작별했다. 살아보니 네모반듯하지 않아도 괜찮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64

처음에는 분갈이조차 못하던 우리가 흙과 식물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무엇보다 작은 생명체들의 힘을 알게 됐다. 자라나는 것의 힘은 세다. 약간의 보살핌에도 쑥쑥 자라난다. 계절을 느끼게 하고, 시간의 힘을 알게 해준다. 물과 햇빛과 바람만 있으면 작물들은 천천히 스스로 여물어 간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72

사람을 알고 믿고, 그가 추천하는 것을 사는 장보기를 계속 하고 싶다. 간편한 삶도 좋지만, 그 삶이 꼭 정답인 것은 아니다. 삶은 다채롭고 그 속도도 다양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서촌 시골살이의 느린 속도가 꽤 마음에 든다. 이 오래된 공간과 사람을 통해 삶을 더 배워나가고 싶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0

집을 지으면서 우리는 대화로 해장하는 법을 배웠다. 숙취처럼 남은 불편한 마음을 슬쩍 꺼내놓고 마구 이야기한다. 속에 담아두면 술병으로 이어지겠지만, 밖으로 꺼내놓으면 어느새 휘발된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2

사는 곳에 대한 셈법을 재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셈법을 위해선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집이 얼마짜리냐고 묻지 말고, 이 집에서의 삶은 얼마짜리냐고 물어보자.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5

구마 겐고는 이를 고민하고 실행에 옮긴다. 작은 건축이 가능한 자재부터 탐구한다. 그중 하나가 ‘물 벽돌water block’이다.
쉽게 말해 레고 쌓기를 생각하면 된다. 손쉽게 쌓을 수 있도록 흙이 아닌 플라스틱으로, 페트병을 만들 때 쓰는 폴리에틸렌으로 벽돌을 만든다. 올록볼록 결합 부위를 레고처럼 만들어 조립하듯 쌓을 수 있다. 그리고 속에 물을 주입한다. 따뜻한 물을 넣으면 난방이 되는 구조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현장에 직접 나가 물 벽돌을 이용해 낡은 민가를 바꿔나가도록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6

"공간은 사회나 부모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과 발을 사용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과 싸워야 자신의 공간을 얻을 수 있다."(『작은 건축』,62쪽)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6

우리 집은 이른바 ‘3비非’의 요건을 갖췄다.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고, 비주류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8

주변을 돌아보면 좋아하는 것을 잃어버린 채로 사는 어른이 참 많다. 좋아하는 것을 그저 좋아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효율을 따지다 보니 그렇게 된다. 좋아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 돼야 하고, 남과 비교해 더 잘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돈이 되어야 한다. 결국 더는 할 수 없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할 시간에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것을 하는 게 유용하다. 좋아하는 것을 어제보다 조금 더 잘하게 됐다는 만족감은 성과가 될 수 없다. 이렇게 효율성만 따지다 보면 어느새 아무것도 안 하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9

그러니 효율적이고 경제적이고 주류에 속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틀을 벗어나면 타인의 시선에 내 삶을 정박시키지 않고 좀 더 넓게,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에서까지 효율성을 따지지 말자.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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