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을 거야, 그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문제였다. 오필리아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미 그의 정신은 아주 오래전, 이주하기 전에 봤던 여행가방에 관한 기억을 훑고 있었다. 남들의 여행가방—오필리아와 움베르토는 한 번도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은 상자나 원통 모양으로 만든 천가방도 있었고 본을 떠서 만든 플라스틱 가방도 있었다. 30일 안에 만들려면 재봉질로 만드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는 재봉틀을 쓰는 사람들을, 손이 제일 빠른 사람들을, 패턴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30

오필리아가 대답했다. "나는 그런 걸 못하지만……." 의례적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특기를 과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특히나 자기만 아는 지식이라면.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33

오필리아는 우는 데가 없도록 천을 살살 재봉틀에 밀어 넣었다. 한때는 재봉에 아주 능했지만 요즘은 천을 준비해놓고도 재봉질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바르토는 그가 최근에 만들어준 셔츠의 톱스티치가 고르지 않다고 불평했다. 수십 년간 셀 수 없이 많은 셔츠를 만든 그는 직선 솔기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이 상자는 새로운 것, 만들어본 적 없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이렇게 뾰족한 모서리를 어떻게 돌려야 할지 생각해내야 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37

오필리아는 그대로 앉아서 눈을 감았다. 속마음이 나뉘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목소리 하나는 계속 떠나지 않는다, 떠나지 않는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익히 들어온 다른 목소리는 계속 천 상자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다. 오필리아는 남들과 함께 계획할 줄 알았다. 그럴 때 자신을 대변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았다. 전자의 다른 목소리는 낯설게 느껴졌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37

오필리아는 언제나 문제 해결 방법을 알아내기를 즐겼다. 대개는 남의 지시만 받는 일상이었지만. 지시를 따르면서 살아온 인생이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38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속옷을 입지 않았다고 아연실색할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속옷을 입을 필요가 없을 터였다. 오필리아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이어 뭔가 기분 좋게 사악한 감각이 발가락 사이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치며 몸이 뜨거워졌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39

사적인 새 목소리는 계속 잠자코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안 된다, 그를 비난할 타인들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하지만 나중에…… 나중에는 몸이 편안해하는 것만 입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40

말도 안 돼. 오필리아는 언제나 일해왔고, 죽을 때까지 일할 터였다. 여느 사람들처럼. 바르토가 말했다. "칠순인 엄마는 이제 계약자가 아니라서 이주 비용을 자기들이 떠안아봤자 콜로니에 쓸모가 없을 거래요."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41

그 말을 들은 오필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분노가 치밀었다. 쓸모없어? 지금 나를 쓸모없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공식적인 직업 없이 정원과 집을 가꾸고 요리를 거의 도맡아 한다는 이유로?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41

다음 날 아침 그가 처음 한 생각은 이랬다. 28일. 그리고 두 번째로 한 생각은 이랬다. 떠나지 않을 거야. 28일 후 나는 자유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45

모든 여자들이 그를 세라 오필리아라고 불렀고 조언을 청했다. 오필리아는 그들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거라고, 그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오는 아이들을 언제까지나 곁에 둘 거라고, 남편과의 문제나 이웃과의 다툼에 대해 털어놓는 연하의 여자들과 언제까지고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46

그러나 사적인 목소리, 새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난 떠나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떠나도 나는 여기 남겠어. 혼자서. 자유롭게.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47

흐릿한 첫 새벽빛 속에서, 새벽안개 속에서, 오필리아는 베갯잇으로 싼 며칠 분의 식량과 작은 자루에 담긴 다양한 씨앗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들이 정원을 파괴하더라도 다시 씨를 뿌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의 예측은 하지 않았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50

웃다 보니 몸에 온기가 돌았다. 몸의 대부분이 공기와 닿아 있음을 더 의식하게 되자 기분이 이상했지만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양 어깨 사이에 물이 한 방울 더 떨어져 척추를 타고 내려가자 그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기분이 좋았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55

그것은 벽이었다. 부재가 아니라 존재였다……. 그렇게 하면 사라질 것처럼 초조하게 침을 삼키게 만드는, 귀를 누르는 압력이었다. 고요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쥐어 답답하고 갑갑하게 만들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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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의 가치는 나를 초월한 게 아니라 내 안에서 확인하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제 무엇이 ‘되는’ 게 아니요, 매 순간 존재해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기탄없이 내 성격, 내 감정, 내 기분대로 해도 된다. 자유는 결정론을 거부하는 능력이지만 이제 우리는 바로 그 결정론들을 지지할 권리를 요구한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2

자신을 다른 누구로 착각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신의 눈부신 유일무이성에 갇혀 늘 똑같은 인물을 무한히 재생산하는 것도 위험하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3

우리는 자기에게 푹 빠져 자잘한 근심거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안다(이게 바로 결코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이다).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없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든 구습에 빠지고 만다. 그들은 정신 현상의 무한성을 믿기에 사소한 말실수나 과실에 시시콜콜 의미를 부여한다. 설명이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일지니, 그들은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 듯 자기 해석에 매달린다.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이 자아라는 심연이 그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 심연은 그들이 결코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못 박혀 살게 하는 지옥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5

너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너의 독자성은 네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것이니 바로 그것을 갈고 닦아라. 너의 욕망은 지고하니 절대 굽히고 들어가지 말라. 너를 제외한 모두에게 의무가 있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1

자기 욕구에 선을 그을 필요도 없고, 자기 자신을 구축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자기와 자기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성향대로, 자기 자신과 융합하기만 하면 된다. 이 희한한 자기만족은 민주적인 개인에게도 해당하지만 세상이 전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공동체에도 해당한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2

인간사의 의미 부재는 자유의 조건이자 인간에게 부여된 저주이기도 하다. 의미가 없으니 우리 안에서, 명암 속에서, 불확실성 속에서 계속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시행착오와 막다른 미궁 안에서 길을 찾아가다 보면 이따금 광명이 비친다. 살았다 생각하는 바로 그때 또 다른 위험이 닥친다. 모든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한인 자유는 반항, 구속, 고독이라는 세 단계를 거친다. 이 세 단계가 늘 쭉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6

순수는 보드라운 볼살과 함께 사라진다. 내가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고 진정으로 내 행위의 주체가 되는 날은 오고야 만다. 그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 즉 성장의 불행이자 경이로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도움과 불복종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한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7

연대의 실천을 통하여 시민 개인의 고독을 덜어주는 것이 민주 사회의 장점이다. 연대는 우리의 권리를 보호해주고 지독한 고통을 완화해준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7

"우리가 자신에게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은 우주다."(말콤 드 샤잘) 운명의 다채로움은 늘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련이 있다. 만남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깊이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87

가령, 자기를 벗어던지는 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은 그러한 꿈의 가장 완벽한 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를 통제하지 않고, 기꺼이 자기를 내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ㅐ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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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우리가 쓰는 것이 이른바 ‘도식’이다. 도식이란 말하자면 물건을 정리해두는 서랍과 같다. 어떤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며 축적해둔 지식 가운데 어떤 것이 맞는지 서랍에서 끄집어내본다. 그러니까 도식은 우리가 매번 새로 배울 필요 없이 상황에 재빨리 대처하도록 도움을 준다. - <마음의 법칙>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2 - P29

그러나 도식은 익히 알고 있는 상황을 다시 분석하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부족한 정보를 보충하는 데도 활용된다. 예를 들어 기억에 숭숭 구멍이 난 부분을 도식에 어울리는 정보로 채워 세세하게 복원할 수 있다. - <마음의 법칙>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2 - P29

이처럼 도식을 활성화하는 것을 두고 ‘점화 효과’라 부른다. 점화는 어떤 도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프로세스이다. - <마음의 법칙>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2 - P31

점화는 이처럼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기본태도를 갖게 만드는 탁월한 방법이다. - <마음의 법칙>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2 - P32

연구 결과는 실험 참가자들이 미리 ‘배려’나 ‘공정함’ 같은 단어들로 점화되었을 때 실제로 함께 게임을 하며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만약 중요한 면담을 앞두고 있다면, 상대를 될 수 있는 한 많은 긍정적 단어로 점화시켜라. 그러면 당신을 보다 긍정적으로 상대해줄 게 틀림없다. - <마음의 법칙>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2 - P32

이런 것을 두고 심리학은 ‘사회적 상승 비교’라 부른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더 위’를 바라보고 비교하는 순간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불행에 빠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 <마음의 법칙>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2 - P35

될 수 있는 한 자주 사회적 비교의 두 가지 형식을 염두에 두자. 상승 비교가 불행을 낳는다면, 의도적인 하향 비교는 우리의 기분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어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하향 비교를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게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깨닫는다. 게다가 감사의 마음까지 느낀다. 만약 가까운 주변에서 하향 비교의 상대를 찾지 못한다면, 그냥 간단하게 텔레비전을 꺼라! - <마음의 법칙>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2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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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절대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듯이 젖꼭지를 물어 당기던 탐욕스러운 젖먹이. 그 탐욕스러운 아기는 까다로운 아이로, 무엇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툭하면 다른 애들과 다투고 공정함을 요구했는데, 그 공정함이란 늘 자기한테 유리한 것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았다. 바르토는 오필리아가 질색했던 움베르토의 면면을 열 배 더 강하게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었고, 오필리아는 아들을 이해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2

오필리아는 정강이로 바닥을 딛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뒤 토마토 줄기를 잡고 일어섰다. 눈앞이 살짝 흐릿해져서, 시야가 맑아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나이. 다들 나이 때문이라고, 갈수록 나빠질 거라고 말했다. 오필리아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 그가 어떤 일을 빨리 해낼 수 없을 때를 제외하면.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3

"컴퍼니가 사업권을 잃었어요." 거기에 어떤 의미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바르토가 말했다.
"컴퍼니가 사업권을 잃었다고." 오필리아는 듣고 있다는 증거로 들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들은 그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자주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바르토는 조바심치며 말하고는 곧바로 덧붙였다. "우리가 떠나야 한다는 뜻이죠. 그들은 콜로니를 버릴 거예요." 로사라가 집에서 나와 남편 뒤에 섰다. 오필리아는 며느리의 뺨이 군데군데 붉어진 것을 봤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4

한 번도 임금을 받지 못한 고용인, 오필리아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은퇴도 의료 혜택도 없는 고용인. 얻는 거라곤 생산한 것 중에 스스로 소비하는 만큼뿐. 자력으로 먹고살며 잉여생산물까지 내야 하는 고용인. 열대목재를 할당량만큼 정기적으로 선적하고 있지도 못하지만…… 벌목량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인의 수가 줄어든 지 오래였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5

오필리아는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남아 있는 옷들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입었다. 그 드레스는 이제 헐렁했다. 살짝 들어간 허리 부분의 위쪽을 채울 것이 이제 그의 몸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구부정한 등 때문에 목 뒷부분이 떴다. 몇 달 만에 신은 신발에 발가락이 짓눌리고 뒤꿈치가 쓸렸다. 회의에 참석하고 나면 물집이 생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오필리아는 부엌문에 귀를 대고 서서, 바르토가 다른 세계에서는 반드시 어머니가 다시 품위 있는 옷차림을 하게 만들겠다고 로사라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언제나 신발을 신고 지금 입은 것처럼 칙칙한 색의 드레스를 입게 한다는 뜻이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6

칼과 제르베즈가 불평의 말들을 끊고 이주 후보지를 발표했다. 하지만 어떻게 정해진 후보지인지는 전혀 말해주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컴퍼니가 주민들에게 선택권을 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무의미한 투표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바르토가 로사라의 앞으로 팔을 뻗어 오필리아의 옆구리를 찌르며 쉬이 하는 소리를 내자 아들을 따라 일어서서 올카르노가 아닌 노이브라이트에 표를 던졌다. 참석자의 3분의 2에 달하는 다른 사람들도 노이브라이트를 선택했다. 월터와 사라를 비롯해 아주 완고한 사람들만 그곳으로 갈 수 없다고 버텼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7

오필리아가 새벽을 좋아하는 건 고요함과 고요함이 낳는 텅 빈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새벽의 고독을 망칠 권리가 있다는 듯 남자는 거기 서 있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8

오필리아는 챙길 짐이 거의 없었다. 지난 10년간은 커뮤니티스토어에서 옷도 별로 가져오지 않았다. 오래 간직한 물건들은 세월이 흐르며 하나둘씩 사라졌다—대부분은 콜로니에 가져오지 않았고, 가져온 것들은 아이들이 망가뜨리거나 벌레가 갉아 먹었거나 두 차례의 대홍수 때 물에 녹았거나 나중에 곰팡이가 슬고 썩어버렸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23

30일보다 훨씬 짧은 기간 안에 준비를 마칠 자신이 있었다. 다만—그는 공구창고 벽에 걸린 괭이 손잡이에 얼굴을 기댔다. 그 남자가 그가 떠날 거라 말한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오필리아는 어두운 창고에서 코바늘이 든 뜨개 주머니를 더듬어 찾듯이 마음속에서 그 변화를 감지해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24

떠나지 않을 거야. 오필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그가 기억하기로는 실로 오랜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작고 동그란 아침 이슬에 비친 세상처럼 어떤 기억이 맑게 솟아올랐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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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배워서

밝아졌다.
글자를 써 내려갔다. - P15

새 책상

읽고 쓰는 것이 좋아
새 책상을 샀어
나는 시를 썼어 - P16

처음 말놀이

장난치다가 다쳤다
문이 저절로 닫혔다

진도가 너무 느리다
바지 길이를 늘이다

내가 돋보기를 잘 맞췄다
내가 받아쓰기를 잘 맞혔다
오늘은 수업을 일찍 마쳤다

기도하느라 밤을 새웠다 - P17

학교 가는 길

내 이름을 쓰면서
너무 기뻐서 울었어

학교 갈 때는
너무 좋아서 웃었어

우리 자식들 손주들 이름을 다
쓸 수 있게 되었어

소원이었어

시험 볼 때는
너무 두근두근해

그래도 학교는 좋아 - P18

평생 알고 썼지만

? 물음표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어

!느낌표
외치고 싶을 때가 있었어

, 쉼표
잠깐 쉬어 가야 할 때가 있었어
그리고, 강경장에 가서,
떡, 오이, 파, 시금치를 샀어

글자로 쓰고 싶었어 - P19

가르쳐 주는 대로 다 배우고 싶은데

머릿속에 안 들어가니까 참
속상해요 자꾸 배운 걸 까먹어요
젊은 사람들이 열 글자 배우면
저는 한 글자 배워요
그래도 한 글자씩 들어가긴 해요 - P20

나는 시험 볼 때 왜 두근두근하나

시험이 두렵고 떨려서 두근두근한 게 아니라
시험이 좋아서 두근두근한 거예요
시험을 볼 수 있다니 잠을 못 잤어요 - P21

캄캄했어요

버스를 타려고 해도
글자를 모르니까 캄캄했어요

손주들이 그림책 가지고 와서
물어볼까 조마조마했어요

면사무소에 가려고 해도 서류 같은 거
작성하라고 할까 봐
주눅이 들었어요

글자를 아니까 사는 게 재미있어요
이젠 간판도 술술 읽고
노선표를 확인하고 버스를 타요
학교 다니는 재미로 살아요 - P22

생각나서 쓴다

74년을 살았는데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74년을 살았는데
소원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꾼다
계획표를 짜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받아쓰기 공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병원에 들렀다가 생각나서 쓴다 - P23

결혼식 날

12월 14일 결혼식 날
눈이 퍼부어 댔다
머리하러 시내 가다가
강경 나루 못 건너
동네 미장원에서
머리 올리고
얼마나 추웠으면
겨우 마련한 장롱이
쩍 하고 갈라졌다
이십 리 길 트럭 타고
시집가는데
세 살 때 돌아가셨다는
아버지 생각
어머니가 개가하시며
데리고 간 동생 생각 - P33

고달픈 나의 삶

농사짓는 게 힘들어
남의 땅에서 시작했어
너무 힘들어 기계가 없었어
다 손으로 손으로 심고 손으로 심고
도시로 떠나고 싶었어
일을 해야 하는데
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잠이 오고 잠이 오고
못줄 옮겨 가면서 다 손으로 심고 나면
돼지도 먹이고 소도 먹이고

강경에 살 때가 생각나 어렸을 때
이모 집에서 얹혀살 때
물을 길러 다녀야 했어
내일 중에 하나였어
몸이 작았는데 어렸었는데
물동이를 지고 십 리를 걸어갔다가
십 리를 걸어왔어
힘들어도 내 일이니까
해야 했어 살아야 하니까
엄마가 내 곁에 없었으니까 - P37

대추 한 간 같은 인생

작은아버지 이사 간대서
쌀 열 가마니에 대추밭을 샀네

예쁜 대추들을 팔아
살고 싶었네

오갈병이 왔네
다 오그라졌네

가을날 붉은 대추
보고 싶었네

열 배 가득 베어도
대추 보였네

보름달 초승달
수없이 지켜봤네 - P39

엄마 반찬이 생각 안 나

강경장 젓갈
200년 전통이 있는 젓갈 반찬

밴댕이젓 아가미젓 가리비젓
갈치속젓 토하젓 어리굴젓
오징어젓 황새기젓 낙지젓
명란젓 꼴뚜기젓 창난젓
이렇게나 많은데

엄마 반찬은 생각이 안 나엄
마 생각도 잘 안 나
엄마가 날 이모 집에 놓고 갔어
동생만 데리고

그건 잊히지가 않는가 봐
할머니가 됐는데도 - P40

시가 될 수 있나요

제가 여기 나온 이유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예요
글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게
시 쓰기였어요

글자가 글이 되고 시가 될 수 있나요
아직은 몇 개의 단어밖에 못 쓰는데
시가 될 수 있나요

인생과 생각들
자식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
시로 표현하고 싶어요 - P45

한국어로 가득한

받아쓰기 너머
따라 쓰기 너머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 - P46

내가 처음 그린 그림

출렁대는 바다를 보면
내 마음도 화해진다 - P49

나의 황금기는 지금이에요

시인 선생님과 함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잖아요

맨날 밖에 있던 남편은
이제 집에 있어요. - P50

무슨 시가 쓰고 싶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시

한결같은 시

우리 손주가 좋아하는
쪽파김치 같은 시

보고 싶을 때
걸려 오는 전화 같은 시

우리 만났으니
사랑하는 시

그렇게 한결같은
- P51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항상 열심히 살아 줘서 고맙다
우리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사랑해 엄마가 - P56

그래도 나를 막지는 못하지

옛날에는 진짜 태어난 것을 원망했지
학교는 문턱도 못 가
집안일에 돈 버는 일에 정신 나가 살았고

어느 날 눈을 펴 보니
글을 몰라 까막눈이요.
잘 안 들려 까막 귀요
코로나로 입을 막는 마스크 입만 있으니

그래도 나를 막지는 못하지
공부를 해 보네
사는 맛이 다르거든

밝은 세상도 봐야지 갈 때까지
천사님이 부르시면 콩게 가야지 - P59

자꾸자꾸 사람이 예뻐져

나 학교만 좀 가르쳐 줘 했어
창피해 교실 문 두드렸을 때, 가나다라
평생 교육원 7년 전 이름 석 자
기쁜지 슬픈지도 모르고 울었어
처음 글을 썼을 때도 울었어 나
시 쓰자고 전화 왔을 때 너무 좋았어
병원에서 목소리가 들떠 있었어
글자를 쓰면 자꾸자꾸 사람이 예뻐져

스물다섯
첫아이 가졌을 때도 부끄러웠어
임천에서 남편을 만나서 시부모님도 없이
부끄러웠어 딸 낳았을 때
그때는 그랬어

그래도 두 번째는 당당했어
막내아들 낳고 밥 먹기 얼마나 당당했는지 몰라
우리 막내 안 낳았음 계속 낳았을지도 몰라
지금 돌아가도 그대로일 것 같아
사람을 낳으면 자꾸자꾸 사람이 예뻐져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해
사랑 있는 사람과 사랑 없는 사람이 차이 많이 나 - P61

나는 사랑하는 것이 쉬워졌어요

무지개 그림을 그릴 때랑 쪽파김치를 만들 때
나는 자꾸 출렁이는 마음이 돼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밥을 차려 줄 때도 그래요
바다처럼 출렁출렁 춤을 추잖아요
내가 아는 사랑의 리듬이에요 - P64

그래도 보고 싶은 엄마

천국에 계신 엄마
엄마에게 섭섭하고 서운한 게 많았어요

뒷동산에서 동생이 보고 싶어서 울었어요
보고 싶은 마음, 알아주는 사람 없었고
나무를 흔들고 나무를 쳐 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엄마는 동생만 데리고 갔었지요
이모 집에 있는 동안
나는 귀퉁이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것 같았다고
이제야 말해요.

나는 작아지는 일만 하고 있었어요
친구들은 다 배우고 있었는데
나만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어요
나만 빼고
모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있었어요

밥을 하기 위해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쏟아져 얼굴을 덮쳤어요
엄마가 나에게로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그래도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없어서 슬펐지만 나 고맙소
잘살고 있으니
나 걱정하지 말아요
엄마는 어떻게 두고 가셨나요 많고 많은 세상
엄마 돌아가시는 날에 비가 많이 왔었지요
6월에

엄마
나는 뜨거운 눈물 속에서 잘 있어요
고생만 하고 가신 엄마
불러 보고 싶은데 못 부르는 내 엄마 - P69

미운 생각은 다 버리겠어요

미운 생각 옆에 있으면 미워져요
예쁜 생각 옆에 있으면 예뻐져요

아이들도 밉다고 하면 미워져요
예쁘다고 말해 주면 예쁘게 자라나요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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