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요?

아버지는 아내를 보고 싶어 했다. 우리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이따 우리가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올게요.

네 어머니가 어지간하면.

아버지는 용케 미소를 짓는다. 거의 웃는 얼굴이 될 정도로.

어머니는 파킨슨병에 이어 수년 전부터 심한 우울증까지 앓고 있다.

우리가 산책을 나가자, 밖에서 점심을 먹자, 어디 구경하러 가자, 하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어지간하면.

어머니가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웃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28

아버지가 산소를 공급받고 있다.

아버지는 잠들어 있다.

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혈색이 없다.

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뜬다. 초점이 없는 두 눈.

나를 알아봤는지 확신이 없다.

아버지가 콧구멍에 연결된 가는 호스들을 빼려고 머리를 흔든다.

나는 호스들을 다시 끼워 넣는다.

아버지가 호스들을 뽑아버리려고 왼손을 든다.

내가 아버지의 팔을 잡는다. 아버지는 저항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힘이 없다.

아버지의 살이 차갑다. 이스키아에서 태운 구릿빛 피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43

나는 냉장고를 연다.

내 눈높이인 칸에 아버지가 먹다 남긴 샌드위치가 있다.

계속 냉장고에 놔둘 수 없다. 고약한 냄새를 풍길 것이고, 곰팡이가 슬 것이다. 상한 연어에서 지독한 냄새가 날 것이다.

이제는 버려야 한다.

휴지통의 페달을 밟는다. 뚜껑이 올라온다.

나는 얇은 비닐을 통해 아버지가 깨물어 먹은 자국을 본다. 갈색 빵에 반달 자국이 뚜렷이 나 있다.

팔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쓰레기가 들어 있는 휴지통.

버릴 수가 없다.

내 발이 페달을 떠나고 뚜껑이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탕, 둔탁한 소리가 텅 빈 아파트 안에 울린다.

나는 샌드위치를 손에 든 채로 한동안 꼼짝하지 못한다.

냉동실에 넣어둘까? 이 상태는 유지될 것이다.

샌드위치를 납작하게 눌러서 바닐라 아이스크림 통 위에 올려놓는다.

이제 됐다.



새벽 3시, 고요한 밤.

전자레인지와 오븐에 있는 시간 표시등의 희미한 오렌지 불빛이 주방을 밝혀준다.

냉동실을 열고, 샌드위치를 꺼낸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덩어리를 휴지통에 넣는다.

나는 휴지통 뚜껑에서 손을 뗀다. 뚜껑이 소리 없이 천천히 닫힌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46

우리는 아버지의 산소마스크를 벗겼다.

나는 아버지 뺨에 입을 맞춘다. 따갑다.

아버지는 대개 얼굴이 매끄러웠지만 휴가 중에는 이따금 면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때면 무성한 금빛 털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았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49

7월 14일. 매해 아버지의 생일과 함께 여름 바캉스가 시작되었다. 파스칼은 늘 그 날짜에 생일 선물을 했다. 오래전 동생은 하얀 도자기 밀크 포트를 선물했고, 나는 발자크의 라 플레이아드(✽✽ 1931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펴내기 시작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전 컬렉션으로 ,전 세계 유명 작가의 소설・철학서를 다루고 있다. 라 플레이아드 총서는 선정 기준부터 편집, 제작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신뢰를 받는 컬렉션으로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모든 프랑스 문인의 꿈이다. 특히 생전에 이 꿈을 이루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판 『인간희극』 총서를 선물했다. 그 열두 권은 사라졌지만, 밀크 포트는 부모님의 냉장고 안쪽 칸에 아직 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54

탁. 밤송이가 벌어지면서 튀어나온 밤 한 개가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밤을 주웠다. 매끈거리고 반들거린다. 발톱 모양의 하얀 반점이 있다.

나는 밤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엘뵈프에서 살던 집의 정원에는 나무가 많았다. 밤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소꿉동무 마리옹과 나는 초록색 밤송이가 잔뜩 달린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서 손가락을 찔려가며 밤송이를 까고 생으로 먹었다. 떫은맛이 나는 생밤을 으드득으드득 씹어 먹다 목구멍에 걸려서 우리는 서로 등을 쳐주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56

아버지가 왼손으로 내 팔을 잡았는데 힘을 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나는 얼어붙었다. 아버지는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좀 더 크게 반복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59

나는 밖으로 나간다. 해, 공기, 햇빛. 내 뺨에 축축한 것이 묻어 있는 걸 느낀다. 입맞춤할 때의 자국처럼 약간 묻은 아버지의 침.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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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 형태는 들락날락이 비정형이고 랜덤해. 일종의 카오스지. 소용돌이야. 사람의 인체는 모든 게 정돈되어 있는데, 귀와 배꼽만 정돈이 안 돼 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54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56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조지만 학술 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59

인터뷰는 그래선 안 되네. 인터뷰는 대담對談이 아니라 상담相談이야.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지. 정확한 맥을 잡아 우물이 샘솟게 하는 거지. 그게 나 혼자 할 수 없는 inter의 신비라네. 자네가 나의 마지막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왔으니, 이어령과 김지수의 틈새에서 자네의 눈으로 보며 독창적으로 쓰게나.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60

"그렇지. 그게 수학의 신비고 유언의 신비라네. 그냥 가르쳐주면 안 풀어. 못 풀어. 나눌 수 없는 열일곱 마리를 준 후, 나머지 한 마리의 퍼즐은 남은 자들이 더해서 풀게 한 거지. 쉽게는 못 풀어. 생각을 해야 풀 수 있다네. 스승은 수학이란 무엇인가를 유언을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했어. 수학은 체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개념의 세계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1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5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6

"존재의 정상이잖아.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야.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 분수는 하늘로 올라가 꿈틀거리다,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짓점. 그 절정이 정오였어. 정오가 그런 거야. 시인 이상의 『날개』에도 정오의 사이렌이 울려. 그 순간 주인공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꾸나’라고 속삭이지.

정오가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긴다네.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지. 나는 알았던 거야.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7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암이라는 질병 그 자체보다 암에 대한 인간들의 의식이 문제라고 썼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81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 거지.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82

병원에 들락날락하는 시간에, 글 한 자라도 더 쓰고 죽자. 그것이 평생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고 외쳐왔던 내 삶의 최후진술 아니겠는가. 종교인들이 죽음 앞에서 의연하듯 말일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85

"자네는 나에게 ‘진리’를 원하고 ‘정수’를 원하지. 그러나 역사는 많이 알려진 것만 기억한다네. 진실보다 거짓이 생존할 때가 많아. 진실은 묻히고 덮이기 쉬워. 하이데거가 그랬지. 일상적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고.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눈물은 아닐 테고요."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94

먹는 것에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구약과 신약의 하이라이트야. 우리 삶도 그래. 사는 게 먹는 거지. ‘함께 먹는 공동체’는 끈끈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00

"차이는 있어.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의 신호가 있다네. 파이브 어 클락 섀도five o’clock shadow라고 들어봤나? 샐러리맨들이 오후 다섯시가 되면, 깨끗했던 턱 밑이 파래져. 퇴근 무렵, 면도 자국에서 수염이 자라 그림자가 생기네. 그게 오후 다섯시의 그림자야. 매일 쳇바퀴 돌듯 회사에 나와 하루를 보내다, 문득 정신 차리면 오후 다섯시. 수염 자국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지면 우수가 차오른다네. 오늘 뭘 했지? 내일도 또 이렇겠지. 다시 전철을 타고, 술집에 가고, 이윽고 집에 돌아가 아내를 만나고…… 그게 샐러리맨의 고독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02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야.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였어. 그가 지혜를 따라간 건 운명을 믿었기 때문이라네. 신탁이 아테네에서 가장 똑똑한 자가 소크라테스라고 하니, 궁금해서 길을 나섰지. 그가 살펴보니 아테네 사람들이 다 똑똑한 척을 하는 거야. 자기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물어보면 다 안다고 하거든. 그때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지.

‘아!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게 이 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이야기구나.’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고 봤네.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아는 자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한 사람이었던 거야.

‘너 자신을 알라.’

이것도 신탁에 나오는 말이야. 신의 예언을 대언하는 무녀들의 말이지. 지금 자네는 내게 굉장히 중요한 걸 물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11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12

이게 곧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이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18

인지 범위 바깥의 것, 가령 적외선이나 미립자는 볼 수도 없어. 존재해도 감각적으로 파악을 못 하는 거지. 그게 존재론이야. 있는 줄 알아도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20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24

물질 그 자체가 언어가 아니라 차이의 의미가 언어란 말일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37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네.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세계야. 이걸 이해해야 우리는 혼돈 없이 세계를 보고 분쟁 없이 대화할 수 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38

"생명체 전체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는 거지. 그럴수록 경계를 알아야 해.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가 인간중심주의로 말하고 있는지, 탈인간중심주의로 말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가늠해야 한다네. 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아까 말한 자연계(피지스), 법계(노모스), 기호계(세미오시스)처럼 범주를 구분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기호 안에서도 정확한 개념을 토대로 사고해야 하고.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자연계, 법계에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여도 기호계까지는 못 넘어와. 기호계야말로 놀라운 세계라네. 기호계에서 문학이 나오고 예술이 나오고 본격적인 철학이 나오거든."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43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46

"생각이 날개를 달아주거든. 그래비티, 중력에 반대되는 힘, 경력이 생기지. 가벼워지는 힘이야. 그런 세계에서는 사실 ‘사회성’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46

"그렇지. 살아 있는 것은 물결을 타고 흘러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네. 관찰해보면 알아. 하늘을 나는 새를 보게나. 바람 방향으로 가는지 역풍을 타고 가는지. 죽은 물고기는 배 내밀고 떠밀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작은 송사리도 위로 올라간다네. 잉어가 용문 협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게 등용문이야. 폭포수로 올라가지 않아도 모든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원하는 데로 가지. 떠내려간다면 사는 게 아니야.

우리가 이 문명사회에서 그냥 떠밀려갈 것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역류하면서 가고자 하는 물줄기를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네. 다만, 잊지 말게나. 우리가 죽은 물고기가 아니란 걸 말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51

"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삶과 죽음을 설명했네. 소크라테스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육체와 마음과 영혼, 삼원론으로 삶과 죽음을 설명할 참이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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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8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슬픈 꿈을 꾸었느냐?"

"왜 그리 슬피 우느냐?"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3

한밤에 눈 뜨고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

근육이 풀린 야윈 팔로

어둠의 손을 쥐고 힘을 준다.

식은땀이 밤이슬처럼

온몸에서 반짝인다.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겨우 아침 햇살이 이마에 꽂힌다.

심호흡을 하고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기 위해

오늘 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8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0

"(눈을 빛내며)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겠네. 태초에 빅뱅이 있었어. 물질과 반물질이 있었지. 이것들이 합치면 빛이야. 엄청난 에너지지. 그런데 반물질보다 물질이 더 많으면? 빛이 되다 만 물질의 찌꺼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게 바로 우리야. 자네와 나지. 이 책상이고 안경이지. 이건 과학이네. 상상력이 아니야.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라네. 그런 우리가 반물질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빛이 되는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4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때 인간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가르쳤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 그토록 오래 죽음에 훈련된 사람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부정과 분노로 출발해서 똑같은 절차를 거쳐갔다니. 철창 속의 호랑이와 철창 밖의 호랑이라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얼마나 몸서리치게 작은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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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는 1951년에 발표한 저서 《맹신자들》에서 이렇게 썼다.
 
선전·선동은 이미 열린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통할 뿐이다. 생각을 주입한다기보다는 이미 받아들인 사람들의 원래 있던 생각을 한번 더 표명하고 옹호할 뿐이다. 재능 있는 선동가는 청중의 마음속에서 부글거리던 생각과 열정을 폭발 직전으로 추어올린다. 그는 사람들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눌려 있던 감정이 메아리치게 만든다. 생각을 강요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믿게 만들 수 있다.7
 
호퍼는 선전·선동이 통하는 대상이 주로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59

초두효과(primacy effect)란 처음 접한 정보가 나중에 습득한 정보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뜻한다. 마스크에 대해 부정적인 첫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마스크에 대한 스스로의 잘못된 초기 판단을 인정하지 않고 ‘가짜 뉴스’만 비난한 정부의 책임은 작지 않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64

유럽은 다르다. 마스크는 결핵이나 폐암 같은 병에 걸린 환자가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스페인 친구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인이 마스크를 예방 목적으로 쓰기까지는 넘어야 할 ‘정신적 장벽(mental barrier)’이 존재한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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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시아를 뭉뚱그려 하나의 집단으로 보는 유럽인들은 이 같은 일반화에 익숙하다. 김정은 얘기만 꺼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것은, 적어도 동아시아 어딘가에 중국, 일본, 북한 말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조금 늘었다는 점이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33

철저한 분석과 디테일을 무시한 채 ‘바이러스=중국=아시아’라는 간단한 도식을 만들어내고 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건 ‘악의적 게으름’일 뿐이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33

비슷한 일이라도 미국에서 일어나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유럽에서 일어나면 조용히 묻힌다. 미국의 흑인과 유럽의 흑인은 가진 목소리의 크기가 다르다. 미국의 노예제도로 상징되는 흑인 차별의 ‘정통성’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이 가진 정치적, 경제적 파워 때문이기도 하다. "‘블랙 아메리카’는 ‘블랙 디아스포라diaspora’에 헤게모니적 권위를 갖는다. 비록 소외된 존재라 할지라도 미국에 있다는 건, 다른 지역의 어떤 흑인 그룹과도 비교가 안 되는 범위에 있는 것이다."4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유럽이 미국보다는 낫다’고 하는 건 인종 문제의 ‘내로남불’이 아닌가.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39

이런 사건은 인종차별의 열매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자라는 토양은 일상에 스며든 차별이다. 무지, 무관심, 체념은 이 토양에 주는 비료다. 사소하다고, 더 중요한 문제가 많다고 옆으로 밀쳐둔 사이 일상 곳곳에 편견의 뿌리가 뻗어 내려간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39

무어인을 뜻하는 스페인어 모로moro는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짙은 색, 악마, 이교도, 순수하지 않은 것 등이 다 ‘모로’와 엮였다. 세례받지 않은 아이도 모로, 물을 타지 않은 진한 와인 원액도 모로라고 불린다(물을 뿌리는 신성한 세례 행위를 받지 않았다는 뜻에서). 스페인 속어로 ‘모로에 내려간다(bajarse al moro)’는 건 ‘마약을 거래하러 북아프리카에 간다’는 뜻이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42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Othello〉는 당시 무어인이 유럽에서 어떤 존재로 인식됐는지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오셀로는 무어인으로,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혀 아내를 죽인 뒤 자살한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43

슈무츨리라는 캐릭터가 스위스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백인 산타와 흑인 시종’이라는 유럽의 오랜 전통과 관련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흑인 시종은 유럽에 침입한 북아프리카 무어인에 대한 공포와 증오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맥락을 도외시하면 편하긴 하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스위스의 ‘전통’이라는 이 행사는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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