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

_키르케고르Kierkegaard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7

크로스컨트리를 잘 끝낸 뒤 여객선을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아쿠아비트Aquavit(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생산되는 전통 증류주: 옮긴이) 2리터를 사서 노르웨이 세관을 통과했다. 노르웨이 세관원들은 술은 얼마든지 들고 타도 되지만(그들이 알려주기를) 잉글랜드로는 한 병만 갖고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영국 세관이 한 병은 압수할 거라고. 나는 두 병을 옆구리에 끼고서 배에 타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18

읽을 책(당시 나는 《율리시스Ulysses》를 아주 더디 읽고 있었다)에 목 축일 아쿠아비트까지, 더이상 바랄 것 없었다. 게다가 속 덥히는 데 알코올만 한 게 또 있으랴. 최면이라도 걸 듯 잔잔하게 흔들리는 배에 몸을 맡긴 채 아쿠아비트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며 상갑판에 앉아 책에 열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렇게 홀짝거린 것이 반 병 가까이 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계속 책을 읽으며 이제 절반이 빈 병을 거꾸로 세워가며 남은 술을 마저 홀짝였다. 배가 부두로 들어서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마나 《율리시스》에 빠져들었던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술병은 깨끗이 비었고 여전히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병에 "100프루프proof"(약 57도: 옮긴이)라고 표시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약한가 보다 생각했다. 아무 문제도 못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대로 고꾸라질 때까지는. 배가 갑자기 기우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벌떡 일어났다가 바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내가 취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술이 나머지 머리는 말짱히 놔두고 소뇌로 직행한 듯했다. 승객이 다 내렸는지 확인하던 승무원이 스키 지팡이에 의지해 걷느라 안간힘 쓰는 나를 보고는 조수를 불러 한쪽씩 부축해 하선을 도와주었다. 심하게 비틀대면서 사람들의(우스워 죽겠다는) 시선을 끌긴 했으나, 두 병을 들고 나와 한 병만 들고 입국함으로써 체제를 골탕 먹였다는 승리감에 도취했다. 나한테서 나머지 한 병을 찾아내지 못해 영국 세관이 아주 안달 났겠지, 상상하면서.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20

우리 모두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자신이 사는 시대의 산물이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25

열네다섯 살 때는 학교 생물 선생님과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 골목Cannery Row》(1945; 문학동네, 2008)에 감화받아 해양생물학자가 되고 싶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27

브라운의 과장된 고전어가 지나치다 싶을 때면 예리하고 저돌적인 스위프트로 갈아타면 되었다. 물론 그의 작품들 역시 초판본이 모두 소장돼 있었다. 부모님이 좋아한 19세기 저작들이 나의 성장 배경이었다면 새뮤얼 존슨에서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기번, 알렉산더 포프에 이르는 17·18세기 거장들의 세계로 입문시켜준 것은 퀸스칼리지 도서관의 지하 서고였다. 그곳에서는 이들의 모든 저작을 언제든 읽을 수 있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35

거나하게 취해 화이트호스에서 나오는데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정신 나간 생각이 떠올랐다. 해부학 최종 시험의 참담한 성적을 학교에서 주는 아주 명성 높은 상(인체해부학 시어도어 윌리엄스 장학금Theodore Williams Scholarship in Human Anatomy)으로 벌충해보겠노라고. 시험은 이미 시작된 뒤였지만 술김에 과감해진 나는 비틀걸음으로 강의실로 들어가 빈 책상을 골라 앉아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풀어야 하는 문제는 7개 문항이었다. 나는 한 문제("구조적 차이가 기능적 차이를 수반하는가?")에 달려들어 이 주제로 논지에 살이 될 성싶은 것이라면 동물학 지식, 식물학 지식 가리지 않고 총동원하여 두 시간을 쉬지 않고 적어 내려갔다. 시험 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여섯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시험 결과는 그 주말 <타임스The Times>에 실렸다. 수상자는 나, 올리버 울프 색스였다.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부학 최종 시험에서 꼴찌를 한 사람이 대체 무슨 수로 시어도어 윌리엄스 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거야?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건 옥스퍼드대학교 예비시험에서 일어났던 일의 재판 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거꾸로였을 뿐. 나는 ‘예-아니요’를 묻는 지식 시험에는 형편없었지만 에세이라면 물 만난 고기였다.

시어도어 윌리엄스 상에는 부상으로 상금 50파운드가 따라왔다. 50파운드라니! 그렇게 큰돈이 한목에 생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이번에는 화이트호스로 가지 않고(그 술집 옆에 있는) 블랙웰서점으로 가서 44파운드를 주고 12권짜리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을 구입했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무엇보다 갖고 싶었던 책이었다. 나는 의학부 시절 내내 이 사전을 통독했고,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책꽂이에서 한 권을 뽑아들고 잠자리로 가곤 한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38

우리는 서로 그렇게 다를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도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칼먼은 엉뚱하게 뻗어나가기 일쑤인 나의 연상 능력에 매료되었고, 나는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그의 정신에 매료되었다. 나는 칼먼을 통해 수리논리학의 거장인 힐베르트(1862~1943, 독일의 수학자: 옮긴이)와 브라우어르(1881~1966, 네덜란드의 수학자·철학자: 옮긴이)를 만났고, 칼먼은 내게서 다윈을 비롯한 19세기의 위대한 자연주의자들을 소개받았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39

칼먼은 브라우어르의 플라톤적 직관주의와 힐베르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식주의라는, 판이하나 수학적 실재를 상호 보완하는 두 학설을 어떻게든 조화시키고 싶어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40

의대생이 되자 강의나 정규수업에 지나치게 치일 일이 없었다. 실질적인 가르침은 환자의 머리맡에서 이루어졌고, 실질적인 공부는 환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로부터 ‘현재 질환의 역사’를 알아내고 세부 사항을 채울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눈과 귀를 크게 뜨고 열고, 손으로 만져 느끼고, 냄새도 맡아야 한다고 배웠다. 심장박동을 듣고 가슴을 타진하고 복부를 만져보거나 또다른 식으로 신체 접촉을 하는 것 역시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로써 일종의 접촉을 통한 깊은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사의 손 자체가 하나의 치료 기구가 되는 셈이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65

옥스퍼드대학교 의예과에서 한 해부학과 생리학 공부는 실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환자들을 만나고, 환자들 이야기를 경청하고, 환자의 경험과 곤경 속으로 들어가려고(또는 최소한 상상하려고) 애쓰고, 환자들을 염려하고, 환자들을 책임지는, 이 모든 것을 다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환자들은 진짜 문제를 아주 고통스럽게 겪는(그리고 종종 중대한 기로에 선) 저마다 절절한 사정을 지닌 진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의료 행위는 단순히 진단과 치료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며, 훨씬 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삶의 질 문제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있고, 심지어는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상황도 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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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12

고난 앞에서 네거티브로 가면 인간은 짐승보다 더 나빠져. 포지티브로 가면 초인이 되는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16

보통 때 사람은 육체와 지성, body와 mind로 살아가는데 극한에 처했을 때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 spirit 영적인 면이 되살아나는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18

"병에 걸렸을 때 그 핸디캡으로 더 놀라운 발견과 업적을 이룬 예술가들이 많아. 버지니아 울프도 병에 대해 유명한 글을 썼어. 곡괭이가 자기 머리를 파내는 것 같다고. 자기 몸이 폐광 혹은 금광이라면, 통증은 곡괭이로 그 안의 금을 파내는 것 같다고. 그렇게 순전한 고통이 주는 통찰의 세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네. 특히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철학자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고통과 대면해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거라고 나는 보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20

"신과 생물의 중간자로 인간이 있기에,
인간은 슬픈 존재고 교만한 존재지.
양극을 갖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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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나. 모든 아이들이 다 타고나. 천재로 태어나서 둔재로 성장할 뿐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 천재라네. 그 재능을 어머니가 줬겠어? 아버지가 줬겠어? 학교 선생님이 줬겠어? 하늘이 준 거지. 태아는 하늘이 준 재능으로 엄마 배 속에서 10개월을 살아. 그리고 태어날 시간을 스스로 정해서 나온다네.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는 한 그래. 아이는 스스로 태어나는 거야. 엄마의 의지로 낳은 게 아니야. 아이가 아이의 의지로 나온 거지. 생일날이 그 의지와 힘이 가장 만개한 날이야. 출생일만은 하나님이 주신 날짜 중에 내가 골라서 나온 것이거든. 그 이후로는 전부 남의 간섭과 보호를 받고 산다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36

"(혀를 차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지금 내가 자네와 이 정도 대화를 하는 것도 내가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답이 정해져 있으면 대화해서 뭘 하겠나? 자네가 만약 내일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달라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중요한 거야. 우리가 내일 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오늘 같지 않았을 걸세.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 지금 여기. 나는 오늘도 내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신념 가진 사람을 주의하게나. 큰일 나. 목숨 내건 사람들이거든."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38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38

"프로세스!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나는 멈추지 않았네. 집에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녔어.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상식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어. 하하."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40

인생도 그렇다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44

"그렇지. 그게 아이덴티티거든. 자기 무늬의 교본은 자기 머리에 있어.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46

"인간이 함께 사는 게 그렇게 힘든 거라네.
개인이 혼자 있는 것도 그렇게 힘든 거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50

왜 어떤 이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혼돈의 쓰레기 더미에서 탈출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를 ‘폐기물’로 정리하며 더 큰 죽음의 카오스로 뛰어들었을까. 죽은 자의 정돈된 절망과 산 자의 어지러운 희망 사이에서, 나는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세상은 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가득 차 있고,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극심한 무기력에 시달린다. 어쩌면 정리의 문제는 내 삶의 ‘컨트롤 키’에 관한 문제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53

"창조는 카오스에서 생겨. 질서에서는 안 생기지. 질서는 이미 죽은 거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55

"그렇다네. 목마름을 다 채우지 않는 거지. 나는 그동안 올림픽도 해보고 희곡도 써보고 소설도 써보고 시도 쓰고 기호학도 연구했어. 각 분야에서 웬만큼 이뤄내니, 남들은 ‘저분이 하나만 하면 대단할 텐데 이것저것을 다 한다’고 안타까워해. 아니야. 나는 이것저것을 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었어. 그러지 않았다면 재미없어서 못 했을 걸세. 그리고 정상에 오를 만하면 갈증을 남겨두고 길을 떠나지. 왜? 올라가면 끝나는 거니까."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57

"갈증이 사라질까 두려워서야. 내겐 갈증이 필요하다네. 나는 그것을 두레박 같은 갈증이라고 불러. 두레박은 물을 푸면 비워야 해. 그래서 영원히 물을 풀 수 있어. 독은 차면 그만이잖나. 채우는 게 목적이니까. 반면 두레박은 물의 갈증을 만들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58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실패한 글이라네. 지금까지 완성된 성인들 중에 글을 쓴 사람은 없어. 예수님이 글을 썼나? 공자가 글을 썼나? 다 그 제자들이 쓴 거지.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여진 글은 완성되지 못한 글이야.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이 쓴 글이고. 세상의 모든 경전, 문자로 쓰여진 것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그림자의 흔적일 뿐이네. 나 또한 완성할 수 없으니 행복에 닿을 수 없어.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야. 어찌 보면 고통이 목적이 돼버린 셈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61

소포클레스의 비극 속에서만 현실의 취약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올림픽 경기장에서만 그 스포츠가 있듯이 말일세. 올림픽을 통해서만 우리가 노동과는 전혀 다른 육체의 찬란한 움직임을 보듯이, 비극 속에서만 영혼의 진짜 움직임을 보는 거야. 그래서 그리스가 올림픽과 비극 이 두 개로 버틴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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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04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05

‘내 고향은 달동네. 너무 비루해서 반짝이는 거라곤 별빛밖에는 없지.’

가난과 결핍을 들키지 않으려고 어린 시절부터 시늉이 체질화된 삶을 살던 나는, 그 시늉이 삶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직전에, 버블 낀 청담동을 떠나 잉크 냄새 진동하는 광화문에 정착했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07

"(놀라며) 아니야.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08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게. 위대한 철학이 왜 대화에서 나왔겠나. 대화는 변증법으로 함께 생각을 낳는 거야. 부부가 함께 어린아이를 낳듯이. 혼자서는 못 낳아. 지식을 함께 낳는 것, 그게 대화라네. 내가 혼자 써도 그 과정은 모두 대화야. 내 안에 주체와 객체를 만들어서 끝없이 묻고 대답하는 거지. 자문자답이야. 그래서 모든 생각의 과정은 다이얼로그일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10

"아닐세.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14

"도스토옙스키가 사형 5분 전에 쓴 글 봐. 사형수한테는 쓰레기도 아름답게 보인다네. 다시는 못 보니까. 날아다니는 새, 늘 보는 새가 뭐가 신기해? 다시는 못 본다, 저 새를 다시는 못 본다…… 내 집 앞마당에 부는 바람이 모공 하나하나까지 스쳐간다네.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 코끝의 바람 한 줄기도 허투루 마실 수 없는 거라네. 그래서 사형수는 다 착하게 죽는 거야. 마지막이니까.

아까 내가 깨달음이라는 얘기했었지? 평소에 알던 것과 몸으로 깨달아지는 것은 다르다고. ‘너와 나 사이엔 엷은 벽이 있다’고 내가 했던 얘기를 기억하고 있나? 그런데 그 벽이 딱 바늘구멍만큼 뚫리는 순간이 있어. 타자와 내가 하나가 되는 흔치 않은 순간이 있다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22

"그래. 알바트로스는 하늘을 날 때는 눈부시지만, 날개가 커서 땅에 내려오면 중심을 못 잡고 기우뚱거려. 사람이 와도 도망 못 가고 쉽게 잡혀서 바보새라고 한다네.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알바트로스가 땅에 내려오면 바보가 되는 거야. 그게 예술가야. 날아다니는 사람은 걷지 못해. 예술가들은 나는 사람들이야. 시인 보들레르처럼, 이상처럼. 그들은 알바트로스에서 자기를 본 사람들이지. 지상에서 호랑이처럼 늑대처럼 이빨 있고 발톱 있고 잘 뛰는 놈이라면 예술가가 되겠나. 알바트로스니까 예술 하는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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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지나가는 사람 관찰해봐. 혼자 지나가는 사람은 웃지 않아. 다 심각하게 가지. 혼자 지나가면서 웃는 놈은 ‘미쳤다’고 다 쳐다보잖아. 그런데 두 사람 이상이면 다 웃고 지나가. 짝 지어 가는 사람들 얼굴엔 다 미소가 있어. 관찰해보라고. 웃음은 사회적인 제스처야. 그런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머는 미학이야. 아이러니, 패러독스로서의 웃음.

어기여차, 할 때 ‘어기’에는 힘을 주고 ‘여차’에는 힘을 빼거든. ‘여’에서 쉬는 거지. 웃음의 역할이 그렇다네. 셰익스피어 비극에 나오는 어릿광대 같은 거야. 그래서 사는 게 다 희비극이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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