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소설이란 손쓸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이고 무분별한 현실보다 은유의 논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논리란 대개는 은유의 논리이므로.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5

우리는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며 평생을 보낸다. 그것은 기억의 본질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주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한 습관에 ‘이야기 짓기의 오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의 일면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속에 있는 은유를 좀 더 선명하게 구현할 뿐이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6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번역이라는 기적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내 신경 세포 속의 변화하는 활동 전위들은 특정한 배열과 유형과 사유로 분출한다. 그들은 내 척수를 타고 흘러내려 내 팔과 손가락으로 갈라져 들어가고, 결국에는 근육들이 움찔거리면서 사유가 동작으로 번역된다. 키보드의 조그마한 지렛대들이 눌리고, 전자들의 배열이 바뀌고, 종이 위에 기호들이 찍힌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6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올렸던 생각과 똑같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당신과 나, 우리는 서로 다르고, 우리가 지닌 의식의 특질도 우주 양 끝의 두 별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내 사유가 문명의 미로를 지나 당신의 정신에 닿는 기나긴 여정에서 번역을 거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리라 믿고, 당신은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7

우리는 단지 인드라의 그물을 이루는 그물코에 지나지 않는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제로 아가시가 쓴 글을 보면 그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라고 믿었다.26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5

꼭 집어 말하자면 아가시는 자연 속에 신의 계획이 숨겨져 있다고, 신의 피조물들을 모아 위계에 따라 잘 배열하면 거기서 도덕적 가르침이 나오리라고 믿었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5

아가시가 보기에 어떤 위계들은 아주 명백했다. 예를 들면 자세가 그렇다.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며" 직립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지만, 물고기는 "물속에서 엎드려"28 있다. 그런가 하면 모호한 위계들도 있다. 앵무새, 타조, 명금류가 그렇다.29 이 가운데 어떤 새가 사다리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아가시는 그 답을 알아낼 수 있다면 신이 더 중요시한 것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언어인지, 크기인지, 노래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6

아가시는 신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부용 메스를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껍질을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내부야말로 동물들의 "진짜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며, 그들의 뼛속과 연골, 내장 속이야말로 신의 생각이 가장 잘 담겨 있는 곳이라고 했다.32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7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어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인간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33 아가시가 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8

그는 그날 갑판 위에서 파닥거리던 물고기들의 이름은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에게 물고기들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남은 평생 맞춰야 할 퍼즐로 그를 손짓해 부르는,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년만의 신간 단편집. 시간을 소재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그의 필력이 가볍지 않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고 박선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먹은 소주가 죄 눈물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고, 생전 처음 취했던 아버지가 비틀비틀, 내 몸에 기대 걸으며 해준 말이다. 고2 겨울이었다.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이에게 하염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열일곱 여린 감수성에 새겨진 무늬는 세월 속에 더욱 또렷해져 나는 간혹 하염없다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아직도 나는 박선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하염없이 남은 인생을 견디고 있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친구의 하염없는 인생이 불쑥불쑥 내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38

아버지가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새농민』이 시키는 대로 문자 농사를 짓던 시절부터였다. 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51

나를 가만 보던 오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 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우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 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차마 더는 울어지지 않았다. 내 울음이 사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본디 눈물과는 친하지 않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64

오빠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왔을 때처럼 오빠는 휘적휘적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허리춤에서 엉덩이까지 어른 주먹 몇개는 들락거릴 정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삶이란 것이 오빠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오빠가 밝은 햇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는 정면을 바라보는 것인지45도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답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약간 신이 난 듯도 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20

1982년5월15일,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던 나는 주말이라 집에 들렀다. 저녁을 먹을 즈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방영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금세 밥을 먹었고, 위가 안 좋았던 어머니는 한숟갈 먹을 때마다 백번을 헤아리며 씹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흑백화면 속의 젊고 아리따운 여인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어 흐린 형광등 아래 신문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백번을 세며 밥을 먹던 어머니는 화면 속 여인들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22

할머니는 내 첫 기억에서부터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니 잔꾀를 써서 망태에 새끼줄을 연결하고는 그걸 허리에 질끈 묶은 채 질질 끌며 우리 집으로 왔다. 이가 하나도 없어 합죽이였던 할머니는 허리끈을 풀지도 못한 채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합죽합죽 웃었다. 할머니의 망태에는 수수나 조가, 고구마나 감자가, 때로는 다슬기나 올벼가 담겨 있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27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