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공간, 혹은 의미와 지시의 공간이 시적 공간이 되는 순간은 일상의 공간, 의미의 공간이 옷을 입기 시작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시가 일어서게 될 때 거기 이미지와 일상의 공간 사이에는 묘한 변화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이미지에 날개가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살이 부풀기 시작한다고나 할는지. 날개가 달린 부푼 이미지는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와 내가 서 있는 공간 사이에서 ‘틈’은 커지고 나의 언어도 날개를 달기 시작합니다. 날개가 달린 이미지는 공간 밖으로, 또는 나의 아주 깊은 곳, 심연을 향하여 날기 시작합니다. 이미지의 공간과 ‘틈’의 공간이 동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33

나는 ‘비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언제나처럼 부질없이 사라지기 위하여, 또는 스밀 수 있는 한 무엇엔가 스미기 위하여 이곳에 도착하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소리 없는 어느 곳의 죽음처럼, 지금도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구 위의 사랑의 무저항의 종말처럼, 뜻 없이 뜻 없이 창에 맺히는 비알들, 얌전한 살갗들마다 소름이 돋아 오르게 하고 그 축축한 냄새로 기억을 흐리게 하는 비알들.

한 방울의 ‘비알’은 우주이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46

이상한 모자 가게였다. 마땅한 계단도 없는, 마땅한 길도 없는, 물론 문도 없는, 겨우 찾아낸, 한구석에 박혀 있는 엘리베이터는 너무 낡아서 덜컹덜컹거리던, 그러나 어느 순간, 프랑스풍의 귀족적인 비로드 장식의 모자들이 불쑥 나서서 나를 막아서던, 리얼–모더니즘의 가게, 시도 그렇지, 리얼–모더니즘이지.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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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편지─ 눈을 맞으며


눈을 맞으며 비로소
눈을 생각하듯이
눈을 밟으며 비로소
길을 생각하듯이

그대를 지나서 비로소
그대를 생각하듯이.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57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기역 자로 꿇고, 가장자리에 검붉은 피 칠을 한, 널브러져 있는 자장면 그릇들(검붉은 자장면이 남아 있기도 하고 먹다가 만 듯 휘저어져 있어 자장면이 부은 것 같기도 한)을 은빛 통에 담는 남자의 구부정한 모습, 그는 이 시대의 성자가 분명하다, 무릎을 어떤 수도사들보다 진지하게 꿇고 있다, 게다가 곤색 잠바를 수도복처럼 수그리고 있고, 그 위로 수도의 눈물처럼 방울방울 빗방울이 굴러 내리고 있다. 그는 기도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71

시를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비밀에 나의 비밀을 기대게 하는 일입니다.
그 비밀은 읽는 이와 쓰는 이를 연결시켜 주며, 그 순간 한 편의 시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비밀이 나의 비밀에 어깨를 기대기 전에는 나의 시는 보석이 되기 전의 원석, 즉 빛날 줄 모르는 돌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이 읽음으로써 나의 언어는 비로소 빛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83

등갓이 없는 불구不具의 등불은, 알몸으로 비추려 드는 알전구는 슬프다. 빛은 알몸이 아니어야 한다. 빛은 많은 덮개를 거느려야 한다. 덮개를 많이 거느릴수록, 깊이깊이 숨어 있을수록, 그래서 그 어둠의 덮개를 뚫고 빛의 살肉이 삐져나올수록 그곳에 지어진 집은 너의 눈을 간절함으로 가득 차게 할 것이다. 우윳빛 등불이 켜지는 순간, 네 가슴뼈에는 행복의 눈물이 가득 드리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덧문을 닫는 순간, 무지개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드리워졌다가 사라지듯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질수록, 사라졌으나 모든 마음에 희뿌연 빛의 베일을 던지며 남아 있을수록, 그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눈부시리라.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4

나는 그립고 그리운 동네의 한 귀퉁이입니다, 희망에 찬, 어머니의 갈색 장롱이고, 희망에 찬, 아버지의 그림자빛 시계이고, 또는 희망에 찬, 할머니의 무지갯빛 망사 커튼입니다, 십일월 바람에 떨며 서 있습니다, 가슴에 솟은 단풍나무 한 그루 숨 여닫는, 영원토록 변방인 또는 영원토록 구원인, 희망인 그 또는 나를 맞는,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8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절단이다. 사유의 절단, 시간의 절단, 또는 사유의 절단과 그 변주, 시간의 절단과 그 변주.

쓰는 시간, 그것은 끊임없는 절단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한 다음 통합하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의 시간은 아름답다. 절단의 시간은 눈부시다. 통합을 꿈꾸는 절단의 시간은 찬란하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9

저녁이 스러지고 밤이 온다. 어둠은 모든 비어 있는 곳에서 흘러나와 다른 비어 있는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는 공기를 휘젓고, 머리카락을 더욱 검게 물들이고, 곳곳에 침묵의 병정을 풀어 놓으면서, 어둠은 스미지 않는 곳이 없다. ……모든 것을 자기의 무량한 날개로 덮고, 눈뜨고 있는 것들의 눈초리를 쓰다듬는다. 소리 나는 것들을 잠시 소리 나지 않게 하면서.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14

묶는 자와 묶이는 자, 무명無名·無明 시인이여, 너는 늘 묶는 자가 되려고만 하는가. 묶는 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시를 쓰려는 자는 묶이는 자여야 한다, 속박하는 자가 아니라, 속박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필연의 시선을 유예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벗어나는 자가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무명 시인인 것을. 그리하여 시인 중의 시인이 무명 시인인 것을.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19

현재적 상상력은 끝없는 미래이다. 끝없는 현재의 미래이다. 또는 미래의 지연遲延…….

그렇다. 모든 미래는 늘 현재 속에 숨어 있다.

눈물 한 방울은 눈물 두 방울이다.
일 그램의 눈물은 천 그램, 만 그램 눈물의 총량.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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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역사인가,
존재는 역사의 연결인가,

그보다

개인은 무의미인가,
역사는 무의미의 부질없는 연결인가,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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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는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집의 출발점이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느 곳에선가 보호받고 있음을 느낀다. 그 안온함은 마치 생명이 품어지는 자궁 같다고나 할는지…… 그때 거기선 그랬었다. 돌투성이 언덕 높은 곳에 있었던, 좁고, 남루한, 값싼 비닐 커튼이 펄럭이던 곳.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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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그건 참 기적이야
산에게 기슭이 있다는 건
기슭에 오솔길이 있다는 건
전쟁통에도 나의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중병에도 나의 피는 결코 마르지 않았으며,
햇빛은 나의 창을 끝내 떠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사랑하니
당신의 입술이 봄날처럼 열린다는 건

오늘 아침에도 나는 일어났다, 기적처럼.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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