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이나 불편이 실리지 않은, 무게가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때 그는 아주 환상적인 세계에, 이를테면 환대의 빛으로 가득해서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역에 자신의 삶이 막 정차했음을 느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51

〈사람, 사람들〉은 천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2008년 12월부터 약 한 달 동안 이어진 가자전쟁이 그 배경이었다. 물론 그 전쟁은 닫힌 결말이 되지 못했다. 가자전쟁 이후에도,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두 나라 사이엔 크고 작은 유혈 충돌이 이어져왔으니까.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57

안녕.
네가 이 편지를 읽게 될 날이 오리라는 확신 없이,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 대한 기대도 품지 않은 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0

허공에 흡수되는 가습기의 저 연기처럼, 왕성히 면적을 확대해갔지만 지금은 형태조차 기억나지 않는 오전의 구름처럼, 눈을 뜬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곳……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1

일곱 살의 내게 스노볼을 안겨줄 때는 그녀도 몰랐겠지. 작고 추운 겨울 하나가 유리구 안에 밀봉되어 있는 그 세계가, 태엽을 끝까지 돌려도 겨우 일 분 삼십 초 동안만 빛이 들어오는 그곳이 유일한 위안이 될 어린 딸의 미래를……
버려졌구나, 쓰레기처럼.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2

열두 살의 어느 날, 한 아이가 그 방을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댄 채 그 방을 작동하게 하는 태엽을 이제 그만 멈추어달라고 기도하곤 했어.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2

내 숨도 멎을 수 있도록……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3

왜냐하면……
버려진 나를, 고작 숨을 멎게 해달라는 기도밖에 할 줄 몰랐던 열두 살의 나를, 그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게 한 사람이었으니까.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3

내가 가고 싶고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그 시절 나는 그런 것에 늘 확신이 있었어. 어쩌면 그런 확신으로 가난하고 기댈 곳 없던 젊음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5

죽음만을 생각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 뭐든 쉽게 잊는 무정하도록 나태한 세상에 타전하고 싶다는 마음, 그들을 살릴 수 있도록, 바로 나를 살게 한 카메라로……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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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달걀을 본다. 나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부엌 탁자의 달걀을 응시한다. 그리고 즉시, 인간은 달걀을 볼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달걀을 본다는 행위는 결코 현재 상태로 유지될 수 없다. 내가 달걀을 보자마자, 달걀은 즉시 3천 년 전에 목격된 달걀이 되어버린다. — 달걀을 시선에 담는 바로 그 순간, 달걀은 이미 달걀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다. — 이미 달걀을 보았던 자만이 달걀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 지금 달걀을 본다면, 너무 늦었다. 목격된 달걀은 상실된 달걀이다. — 달걀을 본다는 것은, 언젠가 궁극적으로 달걀을 보게 되리라는 언약이다. — 더 이상 잘게 쪼갤 수 없는 초미립 응시. 만약 진실로 생각이 존재한다면. 그런데 생각이란 없다. 있는 것은 달걀이다. — 응시란 불가결한 도구이며, 나는 그것을 한 번 사용한 다음 던져버린다. 대신 달걀은 계속 간직한다. — 달걀은 자아가 없다. 달걀은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달걀과 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9e87155ba91460f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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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지 않아야, 그러니까 피사체와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거리낌없이 촬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거리는 결국 냉정함의 거리라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런 생각은 셔터를 누른 이후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는 무심했다는 자각,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위해 한 사람의 고통을 이용해온 건지도 모른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47

무의식의 내벽을 훑는 무의미하고 난폭한 빛에 며칠 동안 시달리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왼쪽 다리의 통증은 여전히 강렬했지만 그녀는 거의 직감적으로 그것이 환상통이란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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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을 때는 빛이 모여들었으니까.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22

나는 가엾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 위험하게 살았고 결국 그 위험을 피하지 못해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그녀는 하고 싶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25

창밖으로 여전히 눈송이가 흩날리는 게 보였다. 창문 크기만한 바깥의 풍경 어딘가에 장착돼 있을 태엽을 상상하며 그녀는 최대한 작게 몸을 움츠리고는 눈을 감았다. 오래전,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스노볼의 태엽을 감고 난 뒤면 늘 그랬듯이.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26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35

그때 그 악기 상점의 쇼윈도를 건너다보며 그가 상상한 것은 알마 마이어가 되살아나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알마 마이어를 눈으로 그려보는 상상 속 권은의 웃는 얼굴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르겠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36

어쩌면 역사의 한가운데서 증언의 사진을 찍는 스스로에게 숭고함을 부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들여다보게 했던, 그 숭고함을 계속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서 헌신하고 사랑하는 포즈만 취했던 지난 시간을 반추하게 했던, 나아가 그 욕망을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했기에 괴로움을 안기기도 했던 최초의 피사체라고 표현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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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와인잔을 잠시 내려놓고 지유의 발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그 어느 곳에도 발자국을 남긴 적 없는 발, 동시에 어디에까지 다다를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발…… 지유의 발바닥에서 얼굴을 뗀 뒤엔 작고 둥근 배에 살짝 손을 올려보기도 했다. 부드러웠고, 부서질 듯 연약했다. 이토록 부드럽고 연약한 살결 아래로 피가 흐르고 있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포들이 부지런히 증식중이라는 사실이 승준은 매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속에 번지던 그 작고 뜨거운 경이는 지유에게 예정된 좌절과 패배, 상실과 이별 같은 것을 상기한 순간 갑자기 식어버렸고, 대신 납 한 덩어리를 삼킨 듯 온몸이 무거워졌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2

오늘밤 권은이 칠 년 전처럼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모습으로 머릿속에서 재생된 건 이 아이 때문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지유가 세상에 온 순간부터 자신은 지유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친구가 자신에게 있었다고, 카메라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빛을 좇던 친구가 있었다고 말이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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