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덮은 천의 클로로포름을 빨아들이듯 나는 그 여자들을 빨아들였다. 무려 30년이 흐른 후에야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했었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8

둘이서 하는 일 중에 가장 좋은 건 옛날이야기 하기다.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콘필드 아줌마 기억나? 그 이야기 해주셔."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를 또 시작한다.(엄마가 싫어하는 건 현재다. 엄마는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 즉시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엄마가 하는 그때 그 시절 이야기들은 오려 붙인 듯 똑같기도 하고 사뭇 다르기도 한데, 그건 내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난번에는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4

그들 또한 우리 사이에선 그림자와 같았다. 관리인과 그의 아내도 말수가 적었다.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이건 다수 안에서 소수가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다. 소수자는 저절로 침묵하게 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9

사회적 자아라는 외피와 남들이 모르는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 사이에 넉넉한 공간이 있었던 엄마는, 그 안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상냥하면서도 냉소적이었고 예민하면서도 대범했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서도 꼬장꼬장했고, 가끔씩 스스로 정이 넘쳐서라고 생각하는 거칠고 심술맞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사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약해지는 마음, 그것을 다잡았을 때 짐짓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0

엄마는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같은 사건이라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엄마는 주변 이웃들과 비교하면 당신이 한층 ‘개화된’―생각과 감정이 더 성숙한―사람이라고 확신했으니 깊이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개화됐다’는 엄마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0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말에 담긴 느낌을 받아들였다. 그 말에 딸려오는 그 모든 표정과 몸짓, 그 안에 담긴 모든 미묘한 욕망과 의도까지도 내 것으로 깊이 흡수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1

엄마의 말과 생각은 얇고 흰 원단을 선명하게 물들이는 염료처럼 내게 스며들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2

앞쪽 집에 산다는 건 보통 가장인 남편이 깊디깊은 구렁텅이 같은 뒤쪽 집 남편보다 돈을 더 번다는 걸 의미했지만, 언제나 더 높은 삶의 질을 고집했던 엄마로선 나랏돈 받아먹고 살 형편이 아닌 이상 해 안 드는 뒤쪽 아파트는 일고할 가치도 없었기 때문에 거기 산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그러니까 엄마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 엄마와 내가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공간은 ‘뒤쪽’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3

빨랫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옆집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버사아아, 버사아아, 지금 집에 있어, 버사?" 이 안뜰을 공유하는 건물 전체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은 하루 종일 갖가지 일로 서로를 불러댔다.("하비 언제 병원 데리고 갈 거야?" "집에 설탕 있어? 내가 매릴린 보낼게." "10분 후에 집 앞에서 만나.") 어찌나 인정과 활기가 넘쳤던지! 신선한 공기와 그림자 한 점 없는 쨍한 햇살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는 햇볕에서 바짝 마르는 빨래 냄새와 섞이며 이 열린 공간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만들어냈다. 나는 부엌 창문에 기대 서서 지금까지도 입에서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안뜰을 바라보곤 했다. 그건 연하고 밝은 초록의 맛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

엄마는 살림을 쉽게 척척 해내는 기술이 있고 기운도 넘쳤지만 그걸 지긋지긋해하며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집안일일랑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요리, 청소, 다림질을 배운 적이 없다. 엄마는 지루할 정도로 능숙한 요리사였고, 맹렬한 청소부였으며, 악령 들린 세탁부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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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시도, 참신한 문장력, 거침없는 솔직함. 이 박서련 작가처럼 한국 작가들은 장르, 소재, 나이 또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쓴다. 그리고 잘 쓴다.

-알라딘 eBook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안톤 허 지음) 중에서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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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연필을 힘껏 눌러써서 종이에 자국을 남기듯 인선의 음성이 분명해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3

바람소리가 거세어질수록 촛불의 움직임이 격렬해진다. 보이지 않는 물체가 불꽃과 천장 사이에 있기라도 한 듯, 기어이 그것에 닿아 사르려는 듯 수직으로 뻗어오른다. 저렇게 긴 불꽃이라면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손 전부로 중심을 통과할 수도 있을 거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23

열려 있는 자신의 캄캄한 방으로 나아가는 인선의 뒷모습을 나는 지켜본다. 마당에서 다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방수포가 펄럭이는 소리, 새된 휘파람 같은 바람소리 사이로 그녀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다. 눈 대신 몸 어딘가의 촉수를 사용하는 듯 느리고 조용한 동작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30

눈을 든 순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둠이다. 책에 얼굴을 파묻고 읽어가는 동안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거다. 그사이 바람이 멎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곧 부서질 것처럼 덜컹댄 게 언제였느냐는 듯 침묵에 싸인 검은 유리창을 나는 멍하게 올려다본다. 꿈속에서 문득 다른 꿈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 같은 정적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42

눈을 뜨자 여전한 정적과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것 같다. 결속한 가지들 사이로 우리가 삼킨 말들이 밀봉되고 있는 것 같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52

인선의 눈동자에서 불꽃과 그을음이 함께 타고 있다. 그걸 눌러 끄듯 그녀가 눈을 감는다. 다시 그녀의 눈꺼풀이 열렸을 때는 더이상 그 불이 타고 있지 않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1

소리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 물살이 잦아들듯 소리가 희미해진다. 차츰 음량이 낮아져 휘발하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속삭이다 말고 문득 잠든 사람의 얼굴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3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78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다.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2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7

나는 몸을 일으킨다.
내가 든 촛불을 통과한 인선의 엷은 그림자가 책장 옆의 흰 벽 위로 드리워져 있다. 벽으로 다가서자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초를 들지 않은 손으로 바랜 벽지를 쓸어나가 인선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얹어본다. 그 서늘한 벽의 단단함이 이 이상한 밤의 비밀을 알게 해줄 것처럼. 내가 등지고 있는 고요한 인선이 아니라, 사라진 그림자에게만 물을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8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海淵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12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1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의 어둠 속에서, 그 으스러지는 포옹이 계속될수록 점점 엄마와 나의 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어. 얇은 피부, 그 아래 한줌 근육, 미지근한 체온과 혼란이 나의 것들과 뒤섞여서 한덩어리가 되었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2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7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9

아버지가 십오 년 동안 형무소에도 있고 저 건너에도 있었던 것이.

책상 밑에서 내가 무릎을 구부리는 동시에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도 있었던 게.

네가 꾼 꿈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캄캄한 어항 속 지느러미처럼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3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5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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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에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건 내벽의 사면에 기대서 있는 서른 그루 남짓한 통나무들이다. 등신대가 아니다. 대체로 이 미터의 키를 훌쩍 넘겨, 내 몸집과 비슷한 몇몇 나무들은 비례상 열두 살 전후의 아이들처럼 보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9

내가 없는 그곳에 인선이 있고, 그녀가 없는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1

인선의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나는 지금 서울 근교 아파트의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거다. 인선은 싱글 매트리스에서 잠들어 있거나 안채의 부엌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거다. 암막 천에 덮인 새장 속 횃대에 아마가 발을 걸고 있을 거다. 잠든 몸이 어둠 속에서 따스할 거다. 가슴털 아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을 거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1

이제 더 할일이 없다.

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 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2

나중에 그 동굴을 찾아갔는데, 찾을 수 없었어요.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서 가봤는데 실패했어요.

아니요. 꿈은 아니었습니다.

아홉 살 되던 겨울에 간 게 마지막이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4

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니까 돌로 가려놓으면 감쪽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놀랄 만큼 커집니다. 1948년 겨울엔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4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6

밤낫이 어신 거라이. 군사작전이라는 건.
어멍이 기다릴 건디.
내가 어멍이라는 말을 뱉은 순간 아버지의 몸 전체가 움찔 떨리는 걸, 전류가 옮겨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릴 따라와서야 해신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7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疏開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8

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0

언젠가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어요.
느네 아방이 소나이다워시민 아마 내가 싫어실 거라. 처음 봐신디 소나이 얼굴이 얼마나 곱닥하던지. 십오 년을 햇빛을 못 봐난 그래나신가, 살갗이 버섯같이 히영했주게. 그런 사름을 다들 피하는 게 잘도 이상해서. 죽었던 사름이 돌아온 것추룩. 눈초리 한 번만 섞어도 귀신을 옮길 사름인 것추룩.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1

아버지가 그것들을 먹다가 문득 환상에서 빠져나오길 어머니는 바랐던 것 같아요. 그 방법이 정말 통하는 날도 있었어요. 내 손에서 귤을 건네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는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같이, 어두운 방인데도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2

그러나 마루를 짚고 몸을 일으킨다. 싱크대로 달려가 개수구에 토한다. 먹은 게 없으니 위액만 게워져 나온다. 약이 필요하다. 지금 나에게 없는, 넉넉히 조제받아 서울 집 책상 서랍에 넣어둔 약봉지 속 한 포가. 장기 복용시 심장을 해친다는 경고를 의사로부터 받은, 그러나 유일하게 듣는 약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3

열이 오른다. 점점 더 몸이 떨린다. 살에 닿는 모든 게 차가워진다. 패딩 코트 소매의 겉감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얼음 날에 베이는 것 같다. 패딩을 벗는다. 시계도 풀어 벽으로 밀어놓는다. 욕실 세면대로 가서 위액을 더 토한다. 입속을 헹구고 비누로 손을 씻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4

차가웠지.
아니, 부드러웠지.
나는 고쳐 중얼거린다.
돌같이 단단했지.
입술을 뗄 때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아니, 솜같이 가벼웠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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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낀 손등에 방금 내려앉았다가 녹은 눈송이가 거의 완전한 정육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그 곁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삼분의 일쯤 떨어져나갔지만, 남은 부분은 네 개의 섬세한 가지들을 본래 모습대로 지니고 있었다. 부슬부슬한 그 가지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소금 알갱이같이 작고 흰 중심이 잠시 남아 있다가 물방울이 되어 맺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그러던 어느 밤 우연히 찾아낸, 간명한 선으로 그린 새의 단면도는 특별히 아름다워 이미지를 저장해두었다. 몸 가운데 정말 풍선 같은 기낭이 있었고, 뼈들에는 타원형의 구멍들이 피리처럼 뚫려 있었다.그래서 그렇게 가벼웠던 거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6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8

엔진음과 함께 버스가 다가온다. 둔한 잔향을 눈송이들이 빨아들인다. 백묵 끝으로 흑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버스가 멈춰 선다. 그 잔향도 눈의 정적 속으로 삼켜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2

숲이 소리치며 흔들리고 있다. 나무들이 이고 있던 눈이 흩날린다. 깨어질 것 같은 이마를 차창에 댄 채 나는 해안도로에서 봤던 눈보라를 생각한다. 먼 수평선 위로 흩어지던 구름을, 수만 마리 새떼처럼 낮게 날던 눈송이들을 생각한다. 섬을 삼킬 듯 흰 포말을 몰고 달려들던 잿빛 바다를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울창한 삼나무 숲 사이로 일차선 도로가 휘어든다. 박명 속에 수천 그루의 높은 나무들이 눈발 속에 흔들려, 마치 내 오랜 꿈속 검은 나무들이 아직 살아 있던 풍경 같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뿐이다.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에 덮이고 있나.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9

턱이 떨린다. 이가 부딪히며 딱, 딱 소리가 난다. 잇새에 혀를 넣으면 베일 것 같다. 젖은 눈꺼풀을 밀어올려 나는 어둠을 본다. 눈을 감았을 때와 똑같은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눈동자로 떨어져 나는 눈을 깜박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0

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든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특히 침엽수들과 아열대 활엽수들이 섞여 자라는 구간에서는, 수종에 따라 다른 속도와 리듬으로 가지와 잎사귀들 사이를 통과하며 형용 못할 화음을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4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5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0

몸을 펼친 채 단박에 얼어붙은 순간들이 결정結晶처럼 빛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모르겠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일인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가느다란 맥박 같은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 차츰 또렷해진다.
잊고 있던, 손바닥에 남았던 감각도 새로 피가 통하듯 생생해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6

저 너머에 뭔가 있다. 빛을 발하는 무엇인가가.
덤불숲을 가로질러 나가자 길게 휘어진 검푸른 눈길이 이어진다. 숲을 끼고 도는 그 길은 점점 밝아져, 모퉁이의 끝에 이르러서는 선명한 은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속력을 낸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가르며 숨차게 나아간다.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다시 눈언저리를 닦는다. 눈을 바로 뜨고 멀리 있는 불빛을 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7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공방에 불이 켜져 있는데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해서 들어와보니 내가 기절해 있었대.
피 흘리는 환자를 급히 트럭 짐칸에 실으며 아무도 불을 끄지 않은 거다. 문을 닫을 겨를조차 없었던 거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몰아쳐 들어가고 있다. 눈부신 빛을 내쏘는 눈가루들이 함께 공방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8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2

제목이 뭐야?
밀폐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8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2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공방 난로의 격렬하던 불꽃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고요한 것이었다. 너울대는 불꽃 안쪽에서 파르스름한 심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맥이 뛰는 씨앗 같았다. 가물거리는 주황빛 가장자리까지 고동이 번지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9

음미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찰나의 감각이어서, 기억하기 위해선 여러 차례 더 빠르게 반복해야 했다. 각질과 표피를 건너 예리한 화기가 진피로 스며들기 직전까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새 그림자가 흰 벽 위로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예닐곱 살 아이의 몸피만큼 커진 그림자였다. 꿈틀거리는 날개 근육과 반투명한 깃털들의 세부가 확대경을 통과한 것처럼 선명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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