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대조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세계 정치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활용했다. 이 운동은 테오도어 헤르츨이나 하임 바이츠만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동화된 유대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또한 미국에 깊은 뿌리를 두고 폭넓은 연계에 의지했다. 내 아버지가 압둘라 국왕과 만나기 몇십 년 전부터 확립된 뿌리와 연계였다.
다비드 벤구리온과 훗날의 이스라엘 2대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미국에서 몇 년간 생활하면서 시온주의 대의를 위해 활동했다. 골다 메이어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았다.
한편 팔레스타인 지도부 가운데는 어느 누구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내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처음 미국을 방문한 사람이다.) 시온주의 지도부가 대부분 유럽을 비롯한 서구 사회 태생이거나 그 나라 시민으로서 그 사회들을 정교하게 파악한 것과 비교하면,
아랍 지도자들은 이제 막 부상하는 두 초강대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 각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에 대해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 P109

1947년 클레먼트 애틀리Clement Attlee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ssion on Palestine, UNSCOP를 만들었다. 유엔을 지배하는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는데, 시온주의 운동은 양국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재빠르게 이런 변화에 대비한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인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 다수 의견 보고서의 결과물인 유엔 총회 결의안 제181호를 작성하는 데 압박이 가해진 사실에서도 이런 힘의 재조정이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 P111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corpus separatum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미국과 소련은 이제 팔레스타인인을 희생시키면서 유대국가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분명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의안은 또 다른 선전포고로서, 여전히 아랍인이 다수인 땅 대부분에서 유대 국가에 국제적인 출생증명서를 안겨 주었다. 유엔헌장에 소중히 새겨진 자결권의 원리를 노골적으로 위반한 행동이었다. - P112

유엔이 분할을 결정하면서 시온주의 운동의 군사·민간 구조는 전후 시대에 등장한 두 초강대국의 지지를 받았고, 최대한 넓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그들 자신과 아랍이 약하고 시온주의가 강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런던, 워싱턴 D.C., 모스크바, 뉴욕, 암만 등 여러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 P112

나크바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번째 단계에서… - P1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이후에 이렇게 바뀐 여론은 미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계산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개인적 친분과 측근 보좌관들의 영향 때문에 시온주의로 기울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시온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 국내 정치에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루스벨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만나서 지지를 약속한 지 불과 9개월 뒤인 1945년 11월, 트루먼은 이런 대대적인 변화의 배후에 놓인 동기를 퉁명스럽게 드러냈다. 한 무리의 미국 외교관들이 공공연하게 친시온주의 정책을 추구하면 아랍세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가 해를 입을 것이라고 선견지명 있게 경고하자, 대통령은 이렇게 대꾸했다. 「신사 여러분, 죄송하지만 저는시온주의의 성공을 열망하는 수십만 명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제 유권자들 가운데는 수십만 아랍인이 없어요. - P122

그리하여 이사 알이사는 나크바 이후 베이루트의 망명지에서 쓴 글에서 아랍 통치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아랍의 꼬맹이 왕들이여
너무도 허약하고 내분까지 벌이니
옛날 옛적에 우리는 당신들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우리의 모든 희망은 꺾이고 말았다. - P124

나크바는 갑작스럽게 닥친 집단적 혼란이자, 팔레스타인인이라면 누구나 직접 경험하거나 부모나 조부모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공유하는 트라우마다.
나크바는 그들의 집단적 정체성에 새로운 초점을 제공한 동시에 가족과 공동체를 깨트리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여러 나라에 흩뜨려 놓았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안에 남은 이들도 난민이든 아니든 간에 이스라엘, 이집트(가자 지구에 사는 사람들), 요르단(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등 세가지 각기 다른 정치 체제에 종속되었다. 그 후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이런 분산(아랍어로 쉬타트shitat) 상태로 고통받고 있다. - P126

시간이 흐르면서 페르시아만 나라들과 리비아, 알제리 등에서 석유산업이 발전하여 석유와 가스 수출로 인한 소득 비중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현지 주민이 되어 그 나라의 경제와 정부 서비스, 교육 체계를 구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가 쓴 단편 소설 『불볕속의 사람들 Men in the Sun』의 등장인물들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이 항상 이런 경로를 쉽게 찾은 것은 아니었다. 종종 소외와 고립,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 서류를 들고 국경을 넘으려 할 때면 심지어 비극까지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 나라들에서 산다고 해도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받지는 못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나라들에서 거의 평생 동안 살았다고 하더라도 계속 거주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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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mizrahi (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Sephardi(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개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나 이츠하크 벤츠비Yitzhak Ben-Zvi(한명은 이스라엘 총리가 되고 다른 한 명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 벤구리온과 벤츠비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 국적을 취득하고 이스탄불에서 공부했으며, 아랍어와 터키어를 배웠다. - P40

불과 한 세기 전인 1917년 11월 2일, 영국 내각을 대표해서 외무 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가 작성한 이 중대한 선언-후에 밸푸어 선언이라고 불린다-은 딱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 P46

의미심장하게도 밸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밸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극소수-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 - P47

당시 영국 정부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는 지난 100여 년간 충분히 분석되었다." 여러 동기 가운데는 히브리인에게 성서의 땅을 <돌려준다>는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친유대주의 philo-Semitism적 열망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이런 기대는 <전 세계 유대인>이 새롭게 등장한 혁명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벌이게 만들고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일 힘이 있다는 확신과 연결되었다. 이런 여러 충동 외에도 영국은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염두에 두었으며 전시의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지정학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다른 동기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이 핵심 동기였다. 영제국을 움직인 것은 절대 이타주의가 <아니었다>. 영국이 전시에 이 지역에 대해 내놓은 여러 약속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 기획을 후원한 것도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완벽하게 기여했다. 그 가운데는 1915년과 1916년에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이끄는 아랍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한 것(후세인-맥마흔 서한에 기술됨)과 1916년 프랑스와 비밀리에 체결한 약속-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협정에서 두 강대국은 아랍 동부 지방을 각자 식민지로 분할하는 데 합의했다. - P48

밸푸어 선언으로 결국 운명이 결정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밸푸어가 신중하게 다듬은 문구가 사실상 그들의 머리를 겨누는 총구였다. 영제국이 원주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수 주민들은 이제 인구나 문화가 거의 아랍 일색인 땅에 유대인이 무제한으로 이민을 와서 숫자로 압도당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식으로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밸푸어 선언은 전면적인 식민지 충돌의 신호탄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켜 배타적인 <민족적 본거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지는 공격의 시작이었다. - P49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반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시온주의 운동에 이례적인 선물이라도 주듯이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밸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위임통치령 전문의 세 번째 문단에는 유대인,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초안 작성자들이 보기에 오스만, 맘루크, 아이유브, 십자군, 아바스, 우마이야, 비잔티움, 그리고 이전 시기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마을, 성지, 성, 사원, 교회, 기념물 등 2,000년에 걸쳐 축조된 이 땅의 환경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여러 무정형의 종교 집단의 소유물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역사나 집단적 존재가 전혀없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회학자 바루크 키멀링Baruch Kimmerling이 말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정치적 살해 politicide>의 뿌리가 위임통치령 전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 P60

그는 T. E. 로런스(영화 「아라비아의 로런스)를 영국의 배신을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사례로 보았다(다만 로런스가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에서 자신이 아랍인을 기만하고 배신한 행위를 솔직하게 서술한 것을 전쟁 전 예루살렘에서 알았던 영국인 교사와 선교사들의 정직하고 꼿꼿한 자세와 조심스럽게 대조하기는 했다). - P82

밸푸어는 <시온주의가 아랍인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보지 않았고>, 처음에는 시온주의자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같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릇된 믿음은 머잖아 단단한 현실에 부딪힌다. 보통 전장에서>. 대반란의 전장에서 바로이런 일이 벌어졌고, 영원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해를 끼쳤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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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 사람이 자기 자신 때문에 몹시 괴로워할 테니까. 그 사람이 그러는 걸 아무도 보지 못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도. 정말 나쁜 짓을 했는데 벌을 받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보다 마음이 더 괴롭거든. 훨씬 괴로워."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97

그런 성질을 가진 거짓말은 인간의 머릿속 한 귀퉁이에, 구석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뭐든 검은 마음이 보이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 걸 꾸며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꿈이 얼마나 정교한지 보라. 층층이 구성된 꿈에서 우리가 기억해 말로 옮길 수 있는 부분은 그 표면을 긁어낸 부스러기뿐이다.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07

그게 사실이기만 하다면 이 방과 이 집과 그녀의 삶은 그녀가 지난 며칠 동안 끌어안고(혹은 탐닉하며—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전전긍긍하던 가능성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 다른 가능성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녀가 할 일은 그것이 다가오도록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침묵함으로써, 침묵을 통해 협조함으로써 이득이 되는 일이 생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09

하지만 만약 그녀가 배의 움직임에만, 아주 살짝 비밀스럽게 흔들리는 그 움직임에만 정신을 집중했다면, 먼길을 오는 동안 지나온 모든 것이 고요해진 듯 느껴졌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13

그가 자신이 유리한 입장임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그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걸 물어봤다는 것 때문에 그녀를 미워할 것이다. 사실이라면—그녀는 줄곧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던가?—그는 다른 방식으로, 더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를 미워할 것이다. 그 즉시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그건 진심이고, 정말 진심일 것이다—말하더라도.

-알라딘 eBook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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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like the same game every time, and she wasn’t supposed to suspect what was going on, and when he had the thing out looking in her eye he wanted her to keep her panties on, him the dirty old cuss puffing away getting his fingers slicked in and puffing away. - P61

They had caught on at once to the day’s air of privilege, its holiday possibilities, Enid’s unusual mix of languor and excitement.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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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 P7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을 멈췄다 깊이 들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 P10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 - P14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P14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P15

오히려 더 밝고 진해진 정적이 어둑한 항아리 같은 몸을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붐비는 거리에서, 그녀는 마치 거대한 비눗방울 속에서 움직이듯 무게 없이 걸었다. 물 밑에서 수면 밖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어른어른한 고요 속에, 차들은 굉음을 내며 달렸고 행인들의 팔꿈치는 그녀의 어깨와 팔을 날카롭게 찌르고는 사라졌다. - P17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 P17

기억만으로 선득한 그 감각을 잇사이로 누르며 그녀는 쓴다.
διεφθάρθαι .
얼음 기둥처럼 차갑고 단단한 언어.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수 있는 언어. - P21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 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 P37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 P41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 P43

그곳은 이곳보다 일곱 시간 늦게 해가 뜨지요.
이제 멀지 않은 날에, 내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필름조각들을 꺼내들 때 당신은 새벽 다섯시의 어둠 속에 있겠지요. 당신 손등의 정맥을 닮은 검푸른 빛은 아직 하늘에서 다 새어나오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타오르며 글썽이던 두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따금 흔들리겠지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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