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 사물의 분해는 다른 사물의 생성이요, 또 어떤 사물의 생성은다르 사물의 훼멸毀滅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사실상 생성과 훼멸의 구별이 없으며, 결국은 다시 서로 통하여 모두 한가지가 되는 것이다. 한데 유독 대도에 통달한 사람만이 서로 통하여 모두 한가지가 되는 그 이치를 알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만물이 서로 다른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대도의 관점에서 만물을 바라본다. 영원불변의 대도는 진실로 유용하나니, 그 유용함은 사리事理에의 통달을 이끌며, 사리에의 통달은 곧 스스로 득의함으로 이어진다. 스스로 득의함의 경지에 이르면 그야말로 거의 대도를 체득한 것이니, 곧 제물의 원칙에 따라 처사處事하게 된다. 다만 ‘제물‘의 원칙에 따라 처사하면서도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지 못하는데, 그것이 바로 대도의 경지이다. (81p)
모든 사물은 상대적 개별성과 특수성을 가진다. 하지만 대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물은 또 공통성 내지 공통점을 갖게 된다. 장자는 바로 이 같은 이론적 근거하에, ‘제물’, 즉 만물은 다 한가지임을 역설하는가 하면, ‘시비‘나 ‘피차‘를 명확히 변별하려는 사람들을 ‘조삼모사朝三暮四‘와 ‘조사모삼朝四暮三’이 매한가지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원숭이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사람은 "시비를 조화시켜 자연 균형의 상태에 머물게 해야 함"을 강조했다. (85p)
우주 만물의 본원을 탐구해 그 극점으로 달려가면, ‘아무런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 무물無物의 상태에 이르는데, 그것은 곧 도의 모습을 시사하는 것으로, ‘허虛’, ‘무無’를 특징으로 한다. 장자가 볼 때, 옛날에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직은 피차니 시비니 하는 관념 자체가 없이, 그야말로 대도 본연의 ‘허’·‘무‘를 닮아 있었다. (89p)
유有가 있다는 것은, 곧 무無가 있다는 것이고, 또 일찍이 무가 있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이며, 다시 또 일찍이 그 일찍이 무가 있지 않은 때가 있었던 때조차도 있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 이다. 아무튼 그러다 갑자기 유와 무가 있게 되었는데, 다만 아직 유와 무가 과연 어느 것이 진정한 유이고, 어느 것이 진정한 무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처럼 지금 나는 이미 이 같은 의론을 말하기는 했으나, 내가 말한 것이 과연 제대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 지 알지 못한다. (90p)
또한 노자 사상의 계승자인 장자의 우주론에서 볼 때, 우주의 시원 그 궁극은 지극히 ‘허’·‘무’한 상태이며, 따라서 그 어떤 시비나 피차가 있을 리 만무하다. 바로 그러한 우주 만물의 근원적 관점에서 보건대, 만물은 결국 다 한가지요, "천지는 나와 함께 존재하고, 만물은 나와 하나이다." 하여 장자는 말한다. 사람은 그처럼 물아를 모두 망각한 경지를 지향해 일로매진하여, 부질없고 끝없는 의론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가 하면, 진정 ‘제물‘의 이치를 깊이 깨닫고, 그 정신과 원칙에 따라 처신 처사해야 할 것이다. (93p)
무릇 지극한 도는 이름 붙여 일컫지 않고, 지극한 변론은 말로 하지않으며, 지극한 인애仁愛는 사사로이 인애하지 않음이요, 지극한 청렴은 겸양하지 않으며, 지극한 용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도는 이름붙여 밝혀낼 수 있으면 진정한 도라 할 수 없고, 변론은 말로 해서는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인애는 특정한 데에 고정되어서는 두루 미치지 못하고, 청렴은 지나치게 청백淸白하여서는 진실하지 않으며, 용기는 사람을 해쳐서는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한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비유하자면 둥글기를 추구했으나 오히려 거의 모나게 된 꼴이다. (95p)
결국 사람은, 일신을 대도에 맡기고 "생사도 잊고, 시비도 잊은 채, 무궁한 대도의 경지를 소요하는" 성인처럼 유유히 만물 변화에 순응함으로써 천수를 다해야 한다는 게 장자의 생각이다. (113p)
예전에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데, 경쾌히 날며 기껍고자득한 한 마리 나비였다. 또한 스스로 얼마나 기껍고 득의함에 취했던가! 자신이 장주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잠을 깼는데, 놀랍게도 자신은 본디 장주였던 것이다. 한데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구별이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아무튼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 즉 만물이 상호 동화되는 변화라고 한다. (115p)
이는 후세에 널리 알려진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로, ‘제물론’의 지극한 경지를 논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알 수가 없었다"는 대목이다. 꿈속의 장자 자신이 모든 아我‘, 즉 자아를 대표한다면, 나비는 또 모든 물物, 즉 외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아가 물인지, 아니면 ‘물‘이 ‘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것이니, 그야말로 물아일체 물아양망物我兩忘(외물과 자아를 모두 망각함)이 따로 없다. 또한 이는 곧 무아요, 망아의 경지이니, 편 첫머리의 ‘상아‘와도 통한다. 아무튼 진실로 망아와 상아의 경지에 이른다면, 세속의 시비나 이해.생사·귀천 따위의 잡념은 말끔히 사라지고 말 터이니, ‘제물 ‘제론‘에 대한 신념은 절로 확고해질 것이다. (1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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