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전체에 분포한 고밀도 암흑물질들은 국지적인 시공간 왜곡 현상을 유도하며, 플린스는 이를 우리 우주는 수많은 주머니 우주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캐빈 방정식, 김초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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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은 언니의 논문을 기억한다. 〈고정된 국지적 시간 거품의 발생 조건과 존재 증명〉. 제목이 금박으로 입혀진 검정 하드커버 학위논문이었다. 박사 과정을 하면서 저널에 발표했던 두 편의 논문을 묶은 것이라고 했다. 언니는 한 권을 나에게 주었다. 맨 뒤편 감사의 글에 내 이름도 썼으니 보라고 했다. 언니가 논문을 쓰는 데에 내가 뭘 거들었다고 감사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가끔 학교 근처에서 군것질거리들을 사다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는 언니의 책상에 올려놓곤 했으니까, 논문의 한두 줄 정도에는 내가 기여했나 보다 생각했다. (캐빈 방정식, 김초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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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소문이 사실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실은 전혀 믿지 않았다. 나는 20년도 넘게 언니에게 철저히 훈련받은 유물론자로, 세상의 온갖 귀신과 유령,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단지 인간의 편집증적 인지 왜곡과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지론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까지 직접 나서게 된 모든 문제의 발단은, 나를 유물론자로 훈련시킨 바로 그 언니에게서 온 편지였다. (캐빈 방정식, 김초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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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헤아려 보죠.
존재와 거룩한 은총의 끝을 찾아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헤매는 기분일 때도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너비와 높이만큼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영국의 여류시인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1806~1861)이 시인인 남편 로버트 브라우닝에게 바친 연시 「소네트 43」 중 첫 4행.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119-120/718p)

그들은 들판과 숲, 과수원에 가까운 맹학교 소유의 아름다운 종탑이 보이는 도시 변두리에서 서로 이웃하며 자랐다.
이제 그들은 스무 살이었고 서로 못 본 지도 거의 1년이 되었다. 그들은 늘 잘 어울려 노는 편안하고 정다운 사이였지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뉴트, 그녀의 이름은 캐서린이었다. 어느 이른 오후, 뉴트가 캐서린네 현관문을 두드렸다.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영원으로의 긴 산책> (121/718p)

캐서린은 저 멀리 보이는 기다란 그림자와 나무들의 경치 속에서 점점 작아져만 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만약 지금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자기를 소리쳐 부른다면 자신이 바로 그에게로 달려갈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때 뉴트가 정말로 걸음을 멈췄다. 그가 정말로 돌아섰다. 그리고 정말로 소리쳤다. "캐서린" 하고 그가 소리쳤다.
그녀는 그에게로 달려가 그를 두 팔로 안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960년)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영원으로의 긴 산책> (135/718p)

누구도 허버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허버트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개입하기 훨씬 이전에, 아니 어쩌면 상속받기 훨씬 이전에 그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주입시킨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무척 귀중한 것은 살림을 꾸려 나가기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소득이었다. 그래야 그는 별도리 없이 –아내와 자식과 가정이라는 신성한 핑계를 대며- 일곱 밤 가운데 사흘 밤을 싸구려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고 담배를 피우고 진을 마시며 자기 아버지를 쏙 빼닮은 파이어하우스 해리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포스터의 포트폴리오> (168-169/718p)

수재너의 깃털 같은 머리카락과 쟁반같이 둥근 눈은 한밤중만큼이나 까만 칠흑빛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크림색이었다. 그녀의 엉덩이는 리라* 같았고, 그녀의 가슴은 남자들에게 늘 평화와 풍요로움을 꿈꾸게 했다. 진주색을 띤 분홍빛 귀에는 조잡한 금색 귀걸이를 하고 있었고 발목에는 작은 종들이 달린 발찌를 차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유혹하는 아가씨> (171/718p)

끼익 소리는 노먼 풀러 하사가 앉은 의자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한국에서 암울한 18개월을 보낸 뒤 바로 전날 밤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쟁 없는 18개월이었지만 생기 없는 18개월이기도 했다. 분노한 풀러는 수재너를 보기 위해 의자에 앉은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끼익하는 소리가 멎자 약국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유혹하는 아가씨> (173/718p)

풀러의 윙윙거리는 머릿속에서 수재너들의 랩소디가 빙빙 맴돌았다. 한국에서 그를 괴롭혔던, 유혹하는 일이 직업인 모든 여자들이 그의 눈앞에 다시 어른거렸다. 그 여자들은 침대 시트로 만든 임시 영화 스크린에서, 눅눅한 천막 막사 안에 울퉁불퉁하게 붙어 있는 미인 사진에서, 그리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린 참호 속에서 봤던 너덜너덜한 잡지에서 유혹의 손짓을 했었다. 그 수재너들은 도처에서 외로운 풀러 하사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해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풀러들에게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오라고 유혹의 손짓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유혹하는 아가씨> (182/718p)

"가망이란 여자가 있으면 꿈꿀 수 있는 것이죠. 당신이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고 다정하게 대하고 고맙게 여기면 그녀는 당신의 여자가 될 가망이 있는 거라고요."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유혹하는 아가씨> (197/7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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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자’란 하루 세 번 윤리적 피임약을 복용하기를 거부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만 달러의 벌금형과 십 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77/718p)

그 시의 제목은 「어떤 저항자가 자살 도우미에게 하는 말」로, 시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씨를 뿌리지도, 실을 자아내지도 않았다네.
그리고 알약 덕분에 죄도 짓지 않았다네.
나는 군중들을, 악취를, 소음을 사랑했다네.
그리고 소변을 보면 터키옥처럼 푸른 소변이 나왔다네.

나는 오렌지색 지붕 아래에서 식사를 했다네.
그러는 중에 나는 문의 경첩처럼 흔들렸다네.
오늘은 나의 하늘빛 삶을 날려 버리려고
자주색 지붕 아래로 왔다네.

처녀인 도우미여, 죽음의 모집인이여,
삶도 매력적이지만 그대는 더 매력적이라네.
나의 성기를 애도하라, 자주색 여인이여,
그곳을 지나가는 것은 하늘빛 물뿐이었으니.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94/718p)

그는 그녀에게 그럼 그녀의 의견으로는 어떤 식으로 보는 것이 맞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마음속 생각을 다 털어놓았다. "아가씨에게 말해 줄 진실이 있네. 내가 시인 빌리라는 것과 당신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는 거야."
한 손으로 그는 허리띠에서 총신이 짧은 연발 권총을 뽑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머리에 쓰고 있던 주름진 이마 부분까지 달려 있는 대머리 고무 가발을 벗었다. 이제 그는 스물두 살로 보였다.

-알라딘 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중에서 (97/7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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