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섞어도 통 ‘그 맛’이 안 나던 떡볶이의 간을 단박에 맞췄던 라면수프처럼, 욕 한 방이 지금 오고가는 대화의 간을 딱 맞출 게 분명한 순간이. 말하자면 씨발의 스팟.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49

힘겨울 것 같았던 밤이 조금 든든해졌다. 자양강장에 좋다는 칡주(feat. Y)가 있으니까. 칡 냄새에 마시면 좋을 청하(feat. P)까지 있으니까. 너희들이 있으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0

취기가 작은 눈금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게 아니라 육상선수처럼 성큼성큼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취기를 앞서기 위해 거의 뛰듯이 걸었지만 몸집이 커진 취기란 늘 인간보다 빨라서 광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쯤에는 결국 나를 앞질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8

저 멀리 집이 보였다. 누군가 몇백 미터 떨어진 집까지 걸어가는 나의 모습을 봤다면, 인류의 진화 과정을 역으로 구현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8

하지만 우주적 모멘트는 나의 형질을 유인원에서 마침내 네발짐승으로 바꾸어놓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70

이문재 시인이 「바닥」이라는 시에서 그랬지.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지구의 정수리와 나의 정수리가 맞부딪치는 우주적 모멘트였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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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건 바로 내가 술집에 들어갈 때마다 겪는 딜레마다.
특히 음주를 시작하기 애매하디애매한 함정 같은 시간에.
환희의 극치일까, 고통의 극치일까.
가는 기차는 천국행이고 돌아오는 기차는 지옥행일 이상한 왕복 기차권을 끊을지 말지, 그냥 얌전히(?) 걸을지 오늘도 목하 고민 중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4

가을이 와버렸다. 1년 중 가장 술맛이 도는 계절. 퇴근길마다 부는 선선한 바람과 걷기 좋은 날씨가 발걸음을 번번이 술집으로 이끄는 계절. 그래서 요즘 매일 퇴근길마다 싸운다. 아쉬탕가 요가를 하러 갈까 vs 술을 마시러 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6

지난주는 요가의 완패이자 나의 완패였다. 전어회가 제철이라, 막장과 마늘을 살짝 올린 기름진 전어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아버지가 담가준 김치가 막판이라, T가 신김치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스팸과 집에 있는 모든 야채를 다 넣고 볶은 뒤 흰자는 튀기듯이 바삭하게 노른자는 톡 치면 흘러내리게 익힌 달걀프라이를 얹어 내온 김치볶음밥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으슬으슬한 게 오뎅 바가 제격이라, 무가 적당히 우려진 국물에 담겨 푹 익기 직전의 오뎅 꼬치를 쏙쏙 빼어 먹으며 온사케를 마시느라고, 외근이 끝나니 광장시장 근처라, 빈대떡과 고기완자에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두 번째 시킬 때 넉넉히 담아 주셔서 아직도 많이 남은 큼직큼직 썬 양파를 툭툭 넣은 간장만으로 막걸리 한 병을 더 비우느라고, 금요일이라, 매주 듣는 강의가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자카야에 들어가 내가 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인 바삭한 굴튀김과 어떻게 해 먹어도 기본은 가는 가라아게에 하이볼을 마시느라고.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7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8

적절한 순간에 찰진 욕을 구사하는 여자들을 향한 동경이 있다. 살다 보면 가끔 욕이 아닌 다른 언어로는 설명할 수도, 그 느낌을 살릴 수도 없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 누군가 던지는 찰기 도는 다부진 욕 한 방이 가져오는 카타르시스는 화려하고 청량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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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했고,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사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건, 이미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을 유머의 소재로 고르는지 혹은 고르지 않는지(후자가 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걸 그려내는 방식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무엇인지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9

그 사람이 집 안에 숨겨두거나 남겨둔 모습 말고 그가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선별한 모습, 딱 그만큼까지만 알고 대면하고 싶은데, 집 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개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 나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04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 치기 어린 상태가 아니면 모험할 엄두를 못 내는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18

그래서 우리는 재작년부터 ①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④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이라는 규칙을 정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2

영화 속에서 외계인의 언어, 시제에 얽매이지 않는 원형적인 ‘헵타포드어’를 이해하고 나자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게 된 루이스 뱅크스 박사처럼, 갑자기 내 눈앞으로도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져 나타났다. 이 비슷한 시각에 딱 한 시간만 먹자고 술집에 들어갔다가 새벽 서너 시까지 신나서 술을 마시고는 울다시피 출근했다가 기다시피 퇴근해서 기절하는 우리의 많은 과거들과 미래가 생생하게 보였다. 술이란 건 참 시도 때도 없이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마시고 싶다는 점에서나,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6

그러자 정신이 맑아지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걷는 것이다. 집까지. 여기서부터 집까지는 지하철역 두 정거장 거리. 조금 아쉽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걷기는 많은 것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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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고, 술 좋아하고, 웃기고. 술친구 삼합이 다 갖춰졌네.
주변에 그런 삼합형 술친구들이 몇 있어서 바로 느낌이 왔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8

술꾼들끼리의 밥 먹자는 약속은 결국 술 먹자는 약속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술은 원래 밥과 곁들여 먹는 기본 반찬이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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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을 꺼리는 투쟁적인 분파들을 만난다. 북아일랜드에서 구교도와 신교도는 ‘민족주의자’와 ‘왕당파’라고 완곡하게 표현된다. ‘종교’라는 단어 자체는 검열을 거쳐 집단이라는 말로 바뀌어 ‘집단 간 전쟁’으로 표현된다. 이라크는 2003년 영국과 미국에게 침략당한 후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간 내전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은 명백히 종교 갈등이다. 하지만 2006년 5월 20일자 〈인디펜던트(Independent)〉 지는 일면에서 그것을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라고 불렀다. 여기서 ‘인종’이라는 말도 완곡어법에 해당한다. 우리가 이라크에서 보는 것은 ‘종교 청소’다. 인종 청소라는 말은 원래 구유고슬라비아의 상황을 언급할 때 쓰인 것인데, 당시에도 동방정교회 소속의 세르비아인, 가톨릭계인 크로아티아인, 이슬람계인 보스니아인이 관여된 종교 청소를 가리키는 완곡어법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67

늘 그렇듯이 종교는 으뜸패다. 어느 미술 동호회가 인상주의나 초현실주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각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법원에서 변론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한 교파가 똑같은 필요성을 주장하자 한 나라의 최고 법원은 그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것이 종교가 부적으로서 지닌 힘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69

나는 신 가설을 더 방어할 수 있는 형태로 정의할 것이다. 즉 그것은 "우주와 우리를 포함하여 그 안의 모든 것을, 의도를 갖고 설계하고 창조한 초인적, 초자연적인 지성이 있다"라는 가설이다. 이 책은 그 가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견해를 옹호할 것이다. 즉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이다"라는 견해 말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망상이다. 그리고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그것은 유해한 망상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89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변화가 왜 진보라고 가정되어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가정은 널리 받아들여져 있다. 그 가정에 자극을 받은, 《내가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유》의 저자 이븐 와라크(Ibn Warraq)는 재치 있게도 다음에는 일신교에서 신이 하나 더 삭제되어 무신론이 될 것이라고 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91

물론 포교를 자선 단체의 존립 근거로 삼는 행위는 완전히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에 더 큰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교회가 비과세의 헌금을 긁어 들이고 이미 먹고살 만해진 텔레비전 복음 전도사들이 지겨울 정도로 번지르르해지는 미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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