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의 목소리가 무디게 들려왔다. "5월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느 우아한 여인이 훌륭한 밤색 암말을 타고 불로뉴 숲의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다."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자 고민하는 도시의 분명치 않은 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랑은 종잇장을 내려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치떴다.
황혼은 마치 회색 물결처럼 방 안으로 침노하고 있었고, 황혼의 장밋빛은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었으며, 식탁의 대리석은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무기력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랑베르는 쓸쓸한 실내 한가운데서 짝을 잃은 유령처럼 보였다. 그래서 리외는 지금이 바로 그의 체념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도시에 감금된 모든 포로가 허탈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으므로 그 해방을 재촉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가 해야만 했다. 리외는 돌아섰다.
그렇다, 그 시간에는 모두 잠을 잔다. 그리고 또 그 시간은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지없이 소유하고 싶다거나 또는 완전히 독점하기 위해서는 다시 만나는 날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깨어나지 않을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빠뜨려두고 싶은 것이 애처로운 애정의 거창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 첫더위가 매주 7백에 가까운 숫자를 보여준 희생자 수의 쏜살같은 상승과 일치했기 때문에 일종의 절망감이 우리 시를 휘어잡았다.
봄은 이미 시들어버렸고 가는 곳마다 잇달아 피어난 몇천 가지 꽃들 속에 기민맥진하여, 이제는 페스트와 더위라는 이중의 압력 밑에 차차로 짓눌려 오그라들는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타루는 페스트에 휩쓸린 우리 도시의 한 날에 대해 꽤 세세한 묘사를 꾀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이번 여름 우리 시민들의 관심사와 생활에 대한 하나의 정확한 생각을 알 수가 있었다. ‘주정꾼들 이외에는 아무도 웃는 사람이라고는 없다’고 타루는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웃는다.’ 그러고는 그날의 묘사가 시작되어 있었다.
그 시간이 바로 아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한길에 나가보는 때이다. 대부분은 자기네들의 사치를 늘어놓음으로써 페스트를 털어버리는 것을 일삼고 있었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허물어질 것이다. 우리는 무덤 근처에서 벌어진 그 밀라노의 사투르누스 축제를 다시 보게 될 판이다.
2시경이면 이 도시는 차츰 한산해진다. 그 시각이야말로 침묵과 먼지와 햇볕과 페스트가 거리에서 서로 만나는 순간이다. 잿빛의 커다란 집들을 타고 끊임없이 더위는 달음질친다. 기나긴 감금의 시간은 인구의 출입이 많아 이 도시에 벌겋게 불이 붙는 시끄러운 저녁때가 되어야 끝난다.
그리고 거리는 7월의 붉은 하늘 아래 쌍쌍의 남녀들과 소음으로 가득 채워져 숨 가쁜 밤을 향해서 표류한다.
모든 사람은 그와 반대로 잘 알 수 없는 그 무엇, 아마도 신보다 더 긴요하게 여겨지는 그 무엇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낮동안 사람들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그 모든 고뇌가 스르르 풀어져서 뜨겁고 먼지투성이인 황혼 속에서 일종의 흉포한 흥분, 모든 민중을 열로 들뜨게 하는 서투른 자유에 싸이고 만다. ―그리고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다. 그래, 어쨌단 말이냐! 나 같은 인간에게 죽음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근면한 일생이 그녀의 얼굴에 새겨놓은 침묵의 그 모든 것이 그때면 생기를 띠는 듯싶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이 그렇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불행 중에서 진실인 것은 페스트에 있어서도 역시 진실입니다. 하기야 몇몇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구실도 될 수 있을 테죠. 그러나 병이 가져오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페스트에 대해서 체념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거나 눈먼 사람이거나 비겁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특이하게 보이지 않게 된 지 벌써 오래입니다."
의사는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이미 대답을 했으며, 만약 자기가 전능의 신을 믿는다면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을 단념하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파늘루까지도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외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는 죽음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이상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우러러볼 것 없이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런 계산은 무의미합니다. 다 아시는 것 아닙니까. 백 년 전에 페르시아의 어느 도시에 페스트가 유행해서 모든 시민이 죽었지만, 시체를 씻기는 사람만은 살아남았답니다. 매일같이 자기 일을 멈추지 않고 해왔는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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