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신중한 태도로 물었다. "일반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 그것은 나의 직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갖가지 감정만이 존재했다.
물결이 높아져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해초와 소금 냄새가 올라왔다. 먼지로 인해 뿌옇게 되고 바다 냄새가 넘쳐흐르는 그 쓸쓸한 도시는 바람의 외침이 윙윙거리는 가운데 마치 불행한 하나의 섬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페스트라는 우월한 위치에서 보면 형무소장부터 말단 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유죄였으며, 아마 처음으로 절대적인 정의가 감옥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처럼 외관상으로는 시민들에게 포위된 상태로서의 연대책임을 강요하고 있던 질병은, 동시에 전통적인 결합을 파괴하고 개개인을 고독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는 모든 경제생활을 파괴했고, 그 결과 상당수의 실업자를 내게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간부층의 충원 대상은 안 되었지만, 막일에 관한 한 그들 때문에 일이 쉬워졌다. 그 시기부터는 사실 곤궁이 공포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늘 볼 수 있었고, 일은 위험성의 정도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하게 마련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요컨대 그 시기에 그들에게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은 부족했다. 페스트의 2단계에서는 기억력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그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이야기지만, 그 얼굴에서 살이 없어져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 몇 주 동안은 자기들의 사랑에 있어서 이제는 망령밖에는 상대할 수 없다는 데 슬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후 그들은 추억을 통해서 간직되어온 최소의 얼굴빛마저 잊어버림으로써 그 망령의 살이 더욱 깎이고 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길고 긴 이별을 치르던 끝에 그들은 마침내 둘이서 누리던 그 무르녹은 정분도 상상할 수 없게 되었으며, 또 언제든지 손을 얹을 수 있던 상대가 어떻게 자기 곁에 살고 있었는지도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현재가 되어 있었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에게서 연애의 능력과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순간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가는 눈을 뜨고 잠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이 실제로 그 운명에서 벗어나는 건 이따금 밤중에 겉으론 아물어 보이던 상처가 갑작스레 되살아나는 때였다.
우리 모두는 시의 문에서 울리는 총소리나 우리의 삶 또는 죽음을 구별하는 고무 도장 소리 한가운데서, 화재와 카드, 공포와 절차 속에서, 굴욕적이지만 등록된 죽음을 예약당한 채 무시무시한 연기와 구급차의 침착한 사이렌 소리 속에서, 우리는 똑같은 유배의 빵으로 요기를 하며, 무의식중에 어처구니없는 똑같은 재회와 평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건만 무용지물이 되어 지니고 다니기에만 무거웠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기를 잃어 마치 죄악이나 유죄판결과도 같이 불모의 존재였다.
그 사랑은 이미 장래가 없는 인내와 좌절된 기대에 불과했다.
그것은 끝이 없는 동시에 착각도 없는 똑같은 체념과 똑같은 인내심이었다.
그래서 리외도 거기에 동의하면서, 다만 별거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자기가 곁에 있으면 아내가 병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아내는 정말 외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고, 그랑의 물음에 대해서도 피하려는 듯 마지못해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심약해진 자신을 보고 리외는 자기가 얼마나 피곤한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감수성은 걷잡을 수 없었다. 대개의 경우는 엉겨서 굳어지고 메말라 있던 감수성이 때때로 풀어져서 억제할 수 없는 감정 속에 리외를 몰아넣곤 했다. 그의 유일한 방어는 그 경화(硬化) 상태 속으로 피신하여 자신의 내부에 형성되고 있는 그 매듭을 도로 단단히 졸라맸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견디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환상을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또 피로 때문에 가지고 있던 환상마저도 빼앗겨버렸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기간에 자기가 맡은 역할은 이미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진단하는 일이었다. 발견하고, 조사하고, 기록하고, 등록하고, 그리고 선고를 내리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내라는 여자들은 그의 손목을 쥐고 울고불고했다. "선생님, 저 사람 좀 살려주세요!" 그러나 그는 살려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그 증오심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결국 페스트는 그에게서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페스트는 고독하면서도 고독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공범자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하나의 공범자이며, 그것도 기꺼이 그러기를 원하는 공범자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