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자도 나와 똑같이 했구나, 의사의 아내는 생각했다, 저 여자도 아이한테 가장 안전한 곳을 주었어, 하지만 우리가 쌓는 담이란 얼마나 허약한 걸까, 도로 한가운데 돌멩이 하나만 갖다놓고, 적이 거기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를 바랄 뿐 다른 희망은 아무것도 없지, 적, 무슨 적, 아무도 이곳으로 우리를 공격하러 오지 않는데, 설사 우리가 밖에서 도둑질과 살인을 한 사람들이라 해도, 아무도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체포하지는 못할 텐데, 차를 훔친 저 남자도 평생 이렇게 자신의 자유를 확신해 본 적이 없을 거야,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제 곧 우리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거야, 우리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사실 이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개는 이름을 가지고 다른 개를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개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개는 냄새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또 상대방이 누군지도 확인하지, 여기 있는 우리도 색다른 종자의 개들과 같아, 우리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나 말로 서로를 알 뿐, 나머지, 얼굴 생김새나 눈이나 머리 색깔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래도 지금은 내 눈이 보이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 빛의 색깔이 약간 바뀌었다. 밤이 다시 오는 것일 리는 없었다. 하늘에 구름이 끼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침이 지연되는 것일 뿐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자신 역시 눈이 멀기를 바랐다. 사물의 눈에 보이는 거죽을 뚫고 들어가 내적인 면에까지 다가갈 수 있기를, 그 눈부신 불치의 실명 상태에까지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의 손목시계는 모두 멈춰 있었다. 태엽을 감아주는 것을 잊었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의사 아내의 시계만 움직이고 있었다.
보초는 정문을 응시하며, 바짝 긴장하고 기다렸다. 아주 천천히, 두 개의 수직 쇠막대 사이로, 유령처럼,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맹인의 얼굴이었다. 공포 때문에 보초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역시 공포 때문에 보초는 무기를 들어올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목표물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나온 선과 악이 미래에도 계속해서 살아남는다고 가정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일관되고 균형잡힌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에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이후의 무한한 기간이 포함된다. 물론 그 기간에는 우리가 직접 그 선악을 확인할 수도 없고, 그것을 가지고 자축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불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백색 실명이 영혼의 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영혼의 병이라면, 눈먼 주검들의 영혼은 지금 몸에서 빠져나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무슨 일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악한 일을 하지 않겠는가.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그것이 가장 하기 쉬운 일이므로.
그녀가 눈이 멀지 않은 것이 발각당할 경우 일어날 결과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적어도 모두가 그녀를 부려먹는 사태가 벌어질 터였고, 최악의 경우 그녀는 그들 가운데 일부의 노예가 될 수도 있었다.
이 눈먼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을 빛의 착각이라고 불러도 좋다. 사실 이들에게는, 낮이나 밤이나, 새벽의 첫빛이나 저녁의 어스름이나, 이른 아침의 고요한 시간이나 정오의 북적거리는 소란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늘 찬란한 백색에 싸여 있어, 안개 사이로 해가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들에게 실명 상태란 평범한 어둠으로 빠져드는 게 아니라, 찬란한 후광 안에서 사는 것이었다.
모든 규율의 최고의 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혹독한 경험 덕분에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눈먼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 잠이 그들의 비참한 상태에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의 아내는 남들이 이 꼴사나운 광경을 볼 위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은밀히, 그러나 꼼꼼하게 남편의 몸을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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