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우데리크와 클로도미르, 킬데베르트, 클로타르가 통치하며 영토를 분할했을 때, 노예로 신분이 추락한 갈리아 주민들의 지위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영토 분할로 인해 이들을 구속하는 속박이 더 단단해졌을 뿐이다. 주인이 사망하자 엄청난 규모의 주민이 상속자들을 따라 나뉘었다. 상속자에게는 이들을 내다 팔거나 무상 양도하거나 죽일 권리가 있었다. - P230

한마디로 수도원은 이교도 문학의 진수를 보존하고 전해주는 요새화된 도서관이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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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제국의 황제 레오 3세Leo III(재위 717~741)가 성상 숭배를 금지하고 성상도 우상이니 교회에서 모두 철거해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교황 성 그레고리오 3세는 무모하게 행동한 레오 3세를 파문하며 영적 권위로 세속적 권위에 맞서는 첫발을 내디뎠다. - P203

치열한 삶의 무게와 피로에 지친 샤를 마르텔은 콩피에뉴 시 인근 베르브리 쉬르 우아즈Verberie sur Oise에서 병에 걸렸다. 그는 두 아들 카를로만Carloman(710?~754.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재임 741~747, 747년부터는 수도사로 지냄_옮긴이)과 피핀Pippin(714~768, 궁재 재임 741~751, 카롤링거 왕조의 초대 왕. 재위 751~768. 피핀 3세・단신왕 피핀_옮긴이)을 병상으로 불러 자신이 칼로 획득한 왕국을 물려주었다. - P204

우리가 첫 번째 왕조를 프랑크-로만 왕조라 부른 이유는, 프랑크족 정복자들이 (자신들이 세심하게 지켜온) 자신들의 언어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처음에는 피정복민의 관습을 나중에는 피정복민의 종교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72 물론 자유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원칙은 예외였다. 로마는 자유선거 원칙을 가끔 위배하긴 했지만 결코 폐지하지는 않았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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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민이라는 말에 이미 능동적인 사람이라는 뜻이있었지만, 혁명 초기부터 단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을 나누고, 능동시민에게만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인구 2,800만 명 가운데 능동시민은 겨우 430만 명이었어요. 1789년의 정치무대에 ‘자유는 등장했지만 아직 ‘평등’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죠. - P111

가난한 사람들, 스물다섯 살이 넘은 남자 가운데 3일 치 임금을 세금으로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수동시민이었습니다. - P111

정치생활에서 투표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먼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죠.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라는 말과 ‘프랑스 혁명은 시민 혁명이다‘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둘은 차이가 있습니다.
부르주아라고 하면 도시민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의평민을 뜻했어요. 예를 들어, 뭔가를 만드는 장인계층에서 조합에 가입한 사람을 그가 부리는 직공과 구별해서 부르주아라 불렀는데, 이것은 사회적인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시민은정치적인 의미로 쓰인 말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법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두 말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 P111

유명한 여성 혁명가로 테루아뉴 드 메리쿠르 Théroigne deMéricourt, 1762~1817가 있었습니다. 그는 1792년 8월 10일에 두드러지게 활약했어요. 하지만 그는 지롱드 Girondins파와 함께 고발당한 뒤 정신이상이 되었죠.
그리고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deCorday, 1768~1793는 급진파 마라Marat, 1743~1793를 살해하고, 당당하게 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여성공화주의자 협회‘ 회원들은국민공회에 나가 청원서를 제출하고, 정치클럽에 모여 국회의소식을 담은 신문인 《모니퇴르 Moniteur》를 읽었어요.
그러나 남성은 자신들만의 정치세계를 구축하면서, 여성을 집에 붙잡아두려고 노력합니다. - P112

프랑스 혁명의 좌우명은 ‘자유·평등·우애라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자유·평등·박애’로 알고 계셨다면, 박애는 잘못 번역된 말로, 우애라고 이해해야 올바르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박애는 인류를 두루 사랑하는 마음이지만, 우애는 형제자매나 친구 사이에 아껴 주는 마음이죠. 또한 인권선언에 자유와 평등과 재산권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우애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우애를 두루 쓰고 있었답니다. 우애는 단결을 뜻했어요. - P128

1791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에서 가장 눈여겨볼 내용은 행정권과 입법권을 완전히 나누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왕의 권한은 대신들을 임명하고, 법률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법률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법권은모두 745명 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에 속했어요. 의원을 뽑는방법은 몇 단계를 거쳤습니다. - P154

1791년 9월 13일, 루이 16세는 헌법을 승인하고 이튿날 국회에 나가 헌법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자발적으로입헌군주가 되겠다고 한 것이죠. 이렇게, 다시 루이 16세와 제헌의회는 타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18일 샹드마르스에서 헌법제정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어요. 제헌의원들은 이제입법의회 의원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나면서, 혁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P155

파리 코뮌Commune이란 각 구역 시민대표들의 총회를 말합니다. 그동안 파리 코뮌의 지도부는 시민들을 실망시켰기 때문에, 당통Danton, 1759~1794이 앞장서서 코뮌의 지도부를 바꾸었어요. 8월 10일 새벽에 일어난 일입니다. 곧 그들은 밤새 준비한 군사작전을 실천에 옮겨 튀일르리 궁으로 시민군을 모이게했어요. 여기에는 파리 시민군뿐만 아니라 브르타뉴와 마르세유의 연맹군도 참여했습니다. - P164

여기서 상퀼로트.sansculotte의 활약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퀼로트란 귀족의 바지인 퀼로트를 입지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귀족은 무릎까지 오는 퀼로트를 입고 긴 양말을 신었어요. 상퀼로트는 줄을 친 긴 바지를입고, 카르마뇰carmagnole이라는 조끼를 입었으며, 머리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붉은 모자에 삼색 표시를 달아서 썼습니다. 천으로 만든 모자는 원뿔 모양이라서 머리에 쓰면 끝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죠. 그들은 칼을 차고 창을 들었어요. 그리고 상퀼로트 여성은 줄 친 치마를 입었답니다. - P164

당시까지 혁명을 이끌던 국회, 즉 제헌의회에서 입법의회까지의 국회는 루이 16세와 함께 권위를 잃어버리고, 파리 시민군과 연맹군 그리고 시위대가 승리합니다.
루이16세의 칭호도 더 이상 왕이 아니라 루이 카페 또는 시민 카페로 바뀌고, 탕플Temple 감옥에 갇혔어요. 루이 16세의 먼 조상이 위그 카페였기 때문이죠.
입법의회는 앞으로 보통선거로뽑을 국민공회에 자리를 내줍니다.
왕이 도망가다 잡혔을 때한 신문에서 ‘제2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 대로, 1792년 8월 10일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 P165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는 말이 이때 처음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1791년 12월, 에베르Hebert, 1757~1794는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 《뒤셴 영감Le Pere Duchesne)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다. 제길, 이 말에 속지 마라. 모든 프랑스인은 구체제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목숨을 버릴 것이다." - P167

1790년 1월 중순 브르타뉴 지방과 앙주 지방은 연맹제를 거행했는데, 이때 ‘자유가 아니면죽음이다‘라는 구호가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브르타뉴 지방은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하여 전국 연맹제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1790년 7월 14일 파리에서 전국 연맹제를 전 국민의 화합의 잔치로치렀다.
원래 7월 14일은 처음부터 거론된 날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점점 바스티유 정복을 기념하는 날을 전국 연맹제의 날로 정하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고, 그 전통이 살아남아 오늘날 프랑스의국경일이 되었다. - P169

9월 20일은 여러모로 뜻깊은 날입니다. 입법의회가 마지막으로 모이고 국민공회가 처음 모인 날이면서, 동시에 국경을넘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을 발미에서 격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입법의회는 호적법과 이혼법을 통과시켰어요. 가톨릭이 국교일 때는 이혼을 할 수 없었는데, 이 법이나오면서 결혼과 이혼 문제는 종교와 아무 상관없게 되었습니다. - P181

파리 북쪽의 작은 도시 캉Caen에서 샤를로트 코르데는 마라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파리로 향했습니다. 칼을 사서 품고, 마라에게는 반역자 명단을 넘겨주겠다고 핑계를 대며 접근했죠. 그날도 마라는 약물에 몸을 담근 채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샤를로트는 명단을 넘겨주는 척하면서 칼로 마라를찔러 죽이고는,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잡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이 마라를 죽인 날은 1793년 7월 13일입니다. 혁명 기념일 전날 지도자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그 나름의 뜻이 있겠죠? - P222

1793년 가을부터 이듬해 7월 말까지 혁명, 공포정, 로베스피에르는 거의 같은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인물을 몇 명만 말하라고 한다면, 거의 모든 이가 그의 이름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 P234

국민공회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주축으로 지배세력이던 몽타뉴파산악파 가운데 용케 살아남은소수를 ‘크레투아산꼭대기’ 파라 부릅니다.
산악파라는 커다란 산이었다가 산꼭대기로 밀려 올라갔다니, 그들이 얼마나 세력을잃고 외로워졌는지 짐작이 가시죠?
그 대신 온건파인 평원파가 세력을 늘렸습니다.
이제 이들이 혁명을 떠맡아 ‘테르미도르 국민공회‘를 이끌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국민공회의역사를 ‘지롱드파 국민공회’, ‘몽타뉴파 국민공회‘, 그리고 ‘테르미도르 국민공회‘로 정리할 수 있으실 겁니다.
국민공회 밖에서는 자코뱅 클럽이 문을 닫습니다. - P249

국민공회에서 극좌파인 크레투아파산꼭대기파를 체포하면서,
의견을 쉽게 하나로 모을 수 있게 된 것도 민중시위를 빨리 진압할 수 있었던 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 교훈을 하나얻을 수 있습니다. 국회에서 다수파의 의지가 정치의 방향을 정하다 보면, 민중은 자칫 이용만 당하다가 큰 성과를 얻지도못한 채 버림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국민공회는 새로 헌법을만들어 총재정부를 탄생시켜서 혁명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 P251

1789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명목상 왕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많았지만 주로 외국인 군대만 믿을 수 있었고, 프랑스인부대는 새로 생긴 국회와 국민의 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군주가 군대의 힘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혁명이 일어났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 P255

집정관부는 형식적으로 집정관 세 명이 행정부를 이끌었지만, 사실상 제1집정관이 모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독재체제였습니다.
물론 제1집정관은 나폴레옹이었고 그는 입법부에도 간섭합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 나폴레옹 1세가됩니다.
그는 프랑스 영토를 넓히고 유럽 여러 나라에 자매 공화국을 세우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언제나 이기기만 할 수는 없죠.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결국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겨우되돌아 나왔고, 1815년 6월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패배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폴레옹의 시대는저물고 유럽은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지요. - P258

1794년,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7월 14일, 1792년 8월 10일, 1793년 1월 21일, 1793년 5월 31일을 기념일로 정하는 법을 제정합니다.
바스티유 정복, 제2차 혁명, 왕의 처형, 지롱드파의 실각을 국민 모두가 기념하자는 뜻이었죠.
그 밖에도 최고 존재를 숭배하는 범위 안에서 국민 · 인류·프랑스인 · 자유의순교자 · 진리의 순교자에게 바치는 축제도 만들었어요.
결국국민공회는 일곱 가지 축제를 제정했는데, 나중에 나폴레옹은1789년 7월 14일을 기념하는 ‘화합의 축제‘만을 남깁니다.
바스티유 정복은 비록 7명, 그것도 잡범과 정신이상자만 석방시켰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기 때문이지요.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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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1789년 1월에 시에예스Sieyes, 1748~1836 신부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Tiers Etat?》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소책자에서 제3신분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3 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 P28

1789년 8월 4일부터 11일까지 1주일 동안 국민의회의 거물급 귀족들은 봉건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혁명의 주역들은 지난 6월 17일 국민의회를 선포하고, 6월 20일 죄드폼의 맹세로 그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6월 23일 왕의 명령을 거부하여 정치적 구체제절대왕정를 무너뜨린 지 한 달 반 뒤에, 사회적 구체제를 무너뜨렸다.
그후 인권선언에 헌법 정신을 담아 나라를 재조직하는 일과 구체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일에 매달린 국민의회는1790년 6월에는 귀족 칭호까지 금지하게 된다.
이처럼 1년 사이에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 P30

"우리는 프랑스 혁명이 낳은 구체제가 아니라, 프랑스혁명을 낳은 구체제를 이해해야 한다." - P36

구체제는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소수가 특권을 누렸습니다.
인구 대다수는 농촌에서 살았고 대부분의 세금은 농민이 냈죠. 도시민은 어떤 물건을 소비하면 소비세를 냈고 귀족은 대개 세금을 면제 받았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때문에 따로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피의 세금을 낸다고 그럴 듯한 이유를 댔던 것이죠. - P37

성직자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라는 세금을 걷으면서, 한편으로는 나라에 돈을 냈어요. 그런데 그들은 5년에 한 번 기부금의 액수를 정한 뒤 매년 5분의 1씩 나눠서 냈습니다.
그동안 자기 수입이 늘거나 물가가 올라도 5년 동안은 이미 정한 돈만 냈던 것이죠. 이것이 특권임은 아시겠죠?
성직자들이 농민에게는 5년 동안 물가에 따라 세금을 더 걷으면서도 나라에는 고정된 돈을 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내는 돈은 ‘세금’이 아니라 ‘기부금‘이라 칭했고요.
그래서 물가가 오르고 돈 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실제 수입이 줄어들었지만, 성직자들은 오히려 수입이 늘었습니다. - P38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늘었고, 겨울철에는 더욱 비참했지요.
혁명이 일어나기 전해 여름에는 돌풍이 불고 우박이 떨어지더니, 겨울1788~1789에는 기온이 영하20도 가까이 내려가 사람이 죽어도 땅을 파지 못해 묻을 수없을 만큼 추웠습니다.
그 결과 곡식이 터무니없이 모자랐고, 미국에서 밀을 수입해도 빵 값이 치솟는 것을 막을 수 없었어요.
혁명은 국가재정이 바닥나고 혹독한 추위를 견뎌 낸 사람들이 비싼 값에도 빵을 구하기 어려울 때 일어났습니다. - P39

가난한 사람은 면역력이 없기 때문에 가벼운 설사병에 걸리거나 감기에만 걸려도 죽기 쉬웠어요. 그들 주위에는 언제나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고, 그래서 죽음을 더 두려워했죠.
임산부도 죽음을 연상시켰습니다. 산욕열로 죽는 임산부, 어머니 배 속에서 죽어 버린 아기,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가많았기 때문입니다.
통계를 보면, 네 명의 아기 가운데 한 명이 돌을 맞이하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그들은 어둠 악마 지옥과 관련해서 상상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갔던 겁니다. - P42

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하려면 1789년 5월 5일에 모인 전국 신분회 얘기부터 알아야 합니다.
전국 신분회를 삼부회三部會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삼부회는 일본 말을 그대로빌려 쓴 말이라, 이 책을 읽는 분들은 앞으로 삼부회‘보다 ‘전국 신분회‘라는 말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 P46

그런데 1789년의 전국 신분회는 175년 만에 처음 열렸습니다. 그동안 프랑스 왕은 전국 신분회를 소집하지 않고서도 세금을 신설하여 돈을 마련했죠. 돈이 많이 드는 사업 가운데하나가 전쟁입니다. 이기면 다행이지만 지면 나라 살림이 거덜났어요.
루이 14세는 툭하면 전쟁을 벌였고, 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도 여러 번 전쟁을 치렀죠. 그리고 아주 중요한 7년 전쟁1756~1763에서 영국에게 지면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 전쟁을지원했는데, 미국은 독립했지만 프랑스는 별로 얻은 것이 없었어요. 오히려 나라 빚만 늘었죠. 결국 외국에도 손을 벌려 돈을 빌렸지만 돈이 들어가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이자를 갚는 데만 한 해 예산의 절반 이상을 쓸 정도였습니다. - P47

제3신분 대표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국민의 98퍼센트를 대표하기 때문에 진정한 주권을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들의 주장은 몹시 위험했겠죠. 왜냐하면 주권은 왕이 혼자 행사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번 전국 신분회에서는거의 600명이나 되는 제3신분이 똘똘 뭉쳤고, 거기에 일부 귀족과 성직자가 합세해서 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6월 17일 전국 신분회를 국민의회라 부르기로 결의합니다. 국민의회는 지금의 국회에 해당해요.
제3신분 대표들이 주축이 되어 국회를 만든 것은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절대군주의 의지가 곧 법이 되던 시대가가고, 이제 국민의 의지가 법으로 나타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죠.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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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가 족장에서 왕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권력이나 특전도 변한 것은 아니었다. 권한의 범위는 바뀌거나 확장되지 않았다. 이 시기 군대는 자유민들로 구성되었고, 왕은 자유민의 수장일 뿐 그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왕권이 루이 14세Louis XIV나 나폴레옹Napoléon이 당연하게 누렸던 권력과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 P117

이처럼 침략은 통상적인 순서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정복하기, 그다음엔 분할하기, 마지막엔 분할한 영토에 이름 붙이기 순이었다. - P122

재위 기간이 13년에 불과했지만 테우데베르트는 ‘유익한Useful 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백성을 위해 봉사했기 때문이다. 메로빙거와 카롤링거, 카페 왕조를 통틀어 백성으로부터 ‘유익한’이라는 수식어로 불린 왕은 테우데베르트가 유일하다. 샤를이나 필리프 2세, 루이 14세, 나폴레옹도 ‘아우구스투스’나 ‘대제’라는 칭호에 만족했을 뿐이다. - P139

570년 9월 10일, 아라비아 반도 서북쪽 변경 근처의 메카Mecca에 거주하는 쿠라이시족Quraysh族 집안에서 남자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5대째 대대로 메카 시를 통치한 집안이었다. - P155

그가 메카를 탈출한 서기 622년 7월 16일, 세상의 세 번째 기원이 시작되었다. 바로 헤지라Hegira의 기원(헤지라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피한 일을 일컬으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으로 한다_옮긴이)이다. - P158

유년을 고아로 살고, 성년을 도망자로 지내고, 말년을 정복자로 마무리한 이 인물, 그는 바로 동방에서 ‘무함마드 아부알 카심Mohammed-Aboul-Cassem’이라 일컫는 마호메트Mahomet이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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