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시민이라는 말에 이미 능동적인 사람이라는 뜻이있었지만, 혁명 초기부터 단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을 나누고, 능동시민에게만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인구 2,800만 명 가운데 능동시민은 겨우 430만 명이었어요. 1789년의 정치무대에 ‘자유는 등장했지만 아직 ‘평등’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죠. - P111
가난한 사람들, 스물다섯 살이 넘은 남자 가운데 3일 치 임금을 세금으로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수동시민이었습니다. - P111
정치생활에서 투표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먼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죠.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라는 말과 ‘프랑스 혁명은 시민 혁명이다‘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둘은 차이가 있습니다. 부르주아라고 하면 도시민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의평민을 뜻했어요. 예를 들어, 뭔가를 만드는 장인계층에서 조합에 가입한 사람을 그가 부리는 직공과 구별해서 부르주아라 불렀는데, 이것은 사회적인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시민은정치적인 의미로 쓰인 말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법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두 말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 P111
유명한 여성 혁명가로 테루아뉴 드 메리쿠르 Théroigne deMéricourt, 1762~1817가 있었습니다. 그는 1792년 8월 10일에 두드러지게 활약했어요. 하지만 그는 지롱드 Girondins파와 함께 고발당한 뒤 정신이상이 되었죠. 그리고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deCorday, 1768~1793는 급진파 마라Marat, 1743~1793를 살해하고, 당당하게 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여성공화주의자 협회‘ 회원들은국민공회에 나가 청원서를 제출하고, 정치클럽에 모여 국회의소식을 담은 신문인 《모니퇴르 Moniteur》를 읽었어요. 그러나 남성은 자신들만의 정치세계를 구축하면서, 여성을 집에 붙잡아두려고 노력합니다. - P112
프랑스 혁명의 좌우명은 ‘자유·평등·우애라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자유·평등·박애’로 알고 계셨다면, 박애는 잘못 번역된 말로, 우애라고 이해해야 올바르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박애는 인류를 두루 사랑하는 마음이지만, 우애는 형제자매나 친구 사이에 아껴 주는 마음이죠. 또한 인권선언에 자유와 평등과 재산권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우애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우애를 두루 쓰고 있었답니다. 우애는 단결을 뜻했어요. - P128
1791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에서 가장 눈여겨볼 내용은 행정권과 입법권을 완전히 나누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왕의 권한은 대신들을 임명하고, 법률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법률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법권은모두 745명 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에 속했어요. 의원을 뽑는방법은 몇 단계를 거쳤습니다. - P154
1791년 9월 13일, 루이 16세는 헌법을 승인하고 이튿날 국회에 나가 헌법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자발적으로입헌군주가 되겠다고 한 것이죠. 이렇게, 다시 루이 16세와 제헌의회는 타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18일 샹드마르스에서 헌법제정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어요. 제헌의원들은 이제입법의회 의원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나면서, 혁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P155
파리 코뮌Commune이란 각 구역 시민대표들의 총회를 말합니다. 그동안 파리 코뮌의 지도부는 시민들을 실망시켰기 때문에, 당통Danton, 1759~1794이 앞장서서 코뮌의 지도부를 바꾸었어요. 8월 10일 새벽에 일어난 일입니다. 곧 그들은 밤새 준비한 군사작전을 실천에 옮겨 튀일르리 궁으로 시민군을 모이게했어요. 여기에는 파리 시민군뿐만 아니라 브르타뉴와 마르세유의 연맹군도 참여했습니다. - P164
여기서 상퀼로트.sansculotte의 활약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퀼로트란 귀족의 바지인 퀼로트를 입지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귀족은 무릎까지 오는 퀼로트를 입고 긴 양말을 신었어요. 상퀼로트는 줄을 친 긴 바지를입고, 카르마뇰carmagnole이라는 조끼를 입었으며, 머리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붉은 모자에 삼색 표시를 달아서 썼습니다. 천으로 만든 모자는 원뿔 모양이라서 머리에 쓰면 끝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죠. 그들은 칼을 차고 창을 들었어요. 그리고 상퀼로트 여성은 줄 친 치마를 입었답니다. - P164
당시까지 혁명을 이끌던 국회, 즉 제헌의회에서 입법의회까지의 국회는 루이 16세와 함께 권위를 잃어버리고, 파리 시민군과 연맹군 그리고 시위대가 승리합니다. 루이16세의 칭호도 더 이상 왕이 아니라 루이 카페 또는 시민 카페로 바뀌고, 탕플Temple 감옥에 갇혔어요. 루이 16세의 먼 조상이 위그 카페였기 때문이죠. 입법의회는 앞으로 보통선거로뽑을 국민공회에 자리를 내줍니다. 왕이 도망가다 잡혔을 때한 신문에서 ‘제2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 대로, 1792년 8월 10일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 P165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는 말이 이때 처음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1791년 12월, 에베르Hebert, 1757~1794는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 《뒤셴 영감Le Pere Duchesne)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다. 제길, 이 말에 속지 마라. 모든 프랑스인은 구체제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목숨을 버릴 것이다." - P167
1790년 1월 중순 브르타뉴 지방과 앙주 지방은 연맹제를 거행했는데, 이때 ‘자유가 아니면죽음이다‘라는 구호가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브르타뉴 지방은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하여 전국 연맹제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1790년 7월 14일 파리에서 전국 연맹제를 전 국민의 화합의 잔치로치렀다. 원래 7월 14일은 처음부터 거론된 날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점점 바스티유 정복을 기념하는 날을 전국 연맹제의 날로 정하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고, 그 전통이 살아남아 오늘날 프랑스의국경일이 되었다. - P169
9월 20일은 여러모로 뜻깊은 날입니다. 입법의회가 마지막으로 모이고 국민공회가 처음 모인 날이면서, 동시에 국경을넘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을 발미에서 격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입법의회는 호적법과 이혼법을 통과시켰어요. 가톨릭이 국교일 때는 이혼을 할 수 없었는데, 이 법이나오면서 결혼과 이혼 문제는 종교와 아무 상관없게 되었습니다. - P181
파리 북쪽의 작은 도시 캉Caen에서 샤를로트 코르데는 마라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파리로 향했습니다. 칼을 사서 품고, 마라에게는 반역자 명단을 넘겨주겠다고 핑계를 대며 접근했죠. 그날도 마라는 약물에 몸을 담근 채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샤를로트는 명단을 넘겨주는 척하면서 칼로 마라를찔러 죽이고는,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잡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이 마라를 죽인 날은 1793년 7월 13일입니다. 혁명 기념일 전날 지도자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그 나름의 뜻이 있겠죠? - P222
1793년 가을부터 이듬해 7월 말까지 혁명, 공포정, 로베스피에르는 거의 같은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인물을 몇 명만 말하라고 한다면, 거의 모든 이가 그의 이름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 P234
국민공회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주축으로 지배세력이던 몽타뉴파산악파 가운데 용케 살아남은소수를 ‘크레투아산꼭대기’ 파라 부릅니다. 산악파라는 커다란 산이었다가 산꼭대기로 밀려 올라갔다니, 그들이 얼마나 세력을잃고 외로워졌는지 짐작이 가시죠? 그 대신 온건파인 평원파가 세력을 늘렸습니다. 이제 이들이 혁명을 떠맡아 ‘테르미도르 국민공회‘를 이끌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국민공회의역사를 ‘지롱드파 국민공회’, ‘몽타뉴파 국민공회‘, 그리고 ‘테르미도르 국민공회‘로 정리할 수 있으실 겁니다. 국민공회 밖에서는 자코뱅 클럽이 문을 닫습니다. - P249
국민공회에서 극좌파인 크레투아파산꼭대기파를 체포하면서, 의견을 쉽게 하나로 모을 수 있게 된 것도 민중시위를 빨리 진압할 수 있었던 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 교훈을 하나얻을 수 있습니다. 국회에서 다수파의 의지가 정치의 방향을 정하다 보면, 민중은 자칫 이용만 당하다가 큰 성과를 얻지도못한 채 버림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국민공회는 새로 헌법을만들어 총재정부를 탄생시켜서 혁명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 P251
1789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명목상 왕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많았지만 주로 외국인 군대만 믿을 수 있었고, 프랑스인부대는 새로 생긴 국회와 국민의 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군주가 군대의 힘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혁명이 일어났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 P255
집정관부는 형식적으로 집정관 세 명이 행정부를 이끌었지만, 사실상 제1집정관이 모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독재체제였습니다. 물론 제1집정관은 나폴레옹이었고 그는 입법부에도 간섭합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 나폴레옹 1세가됩니다. 그는 프랑스 영토를 넓히고 유럽 여러 나라에 자매 공화국을 세우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언제나 이기기만 할 수는 없죠.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결국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겨우되돌아 나왔고, 1815년 6월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패배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폴레옹의 시대는저물고 유럽은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지요. - P258
1794년,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7월 14일, 1792년 8월 10일, 1793년 1월 21일, 1793년 5월 31일을 기념일로 정하는 법을 제정합니다. 바스티유 정복, 제2차 혁명, 왕의 처형, 지롱드파의 실각을 국민 모두가 기념하자는 뜻이었죠. 그 밖에도 최고 존재를 숭배하는 범위 안에서 국민 · 인류·프랑스인 · 자유의순교자 · 진리의 순교자에게 바치는 축제도 만들었어요. 결국국민공회는 일곱 가지 축제를 제정했는데, 나중에 나폴레옹은1789년 7월 14일을 기념하는 ‘화합의 축제‘만을 남깁니다. 바스티유 정복은 비록 7명, 그것도 잡범과 정신이상자만 석방시켰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기 때문이지요.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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