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8월 4일의 봉건제도 폐기 선언은 하나의 큰 사회혁명이었다. 이는 농노제, 영주적 특권과 독점권, 신분별 불평등 과세, 10분의 1세, 관직 매매제, 길드 제도 등 신분과 지방과 도시의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무료 재판제, 법 앞에서의 만민평등의 원칙을 제정했으며, 낡은 앙시앵레짐의 파괴이자 새 프랑스의 출발이었다. - P184

이것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었다. 흔히 〈인권선언〉이라고 부르는 이 선언은 봉건제도의 폐기를 규정한 직후 의회가 8월 12일부터 토론하기 시작하여 26일에 채택하였다. - P185

인권선언을 부르주아지의 산물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은 말하면서 소유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결사의 자유를 위험시하여 그 자유를 아주 묵살하였고, 발언의 자유를 법률로 제한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 등이 비난의 이유이다. - P194

인권선언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선언한 문서이다. 민중의 첫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탑이다. - P195

자코뱅은 선서 성직자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톨릭교회 자체를 공격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여, 종교 헌장이 제정한 국가에 의한 교회 예산의 폐지를 강조하였다. 자코뱅의 이 주장은 앞으로 반교권론이라는 형태로 19세기를 통하여 내내 중요한 정치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반교권론은 국가를 종교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끊어버리자는 주장이다. - P213

당시 의회 밖에서 의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유력한 정치 집단은 ‘헌법의 벗Amis de la constitution’과 ‘1789년 협회’ 및 ‘입헌 왕정 클럽’의 셋이었다. - P217

특히 각종 권력의 남용과 온갖 종류의 인권침해를 세론의 법정에 고발하는 것이 창립 목적이라고 언명한 혁명파의 코르들리에Cordeliers 클럽이 여론 형성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주요한 발언자들은 마라Jean Paul Marat,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데물랭Camille Desmoulins, 에베르Jacques René Hébert, 모모로Antoine François  Momoro, 데글랑팅Fabre d’Eglantine 등인데,
이들은 1793년에 이르면 혁명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이다. - P225

권력은 푀양 클럽의 수중으로 옮겨졌다. 의회를 좌우하는 힘은 이른바 삼두파−라메트, 바르나브, 뒤포르Adrien Jean Francois Duport−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 P236

역사가들 가운데는 왕정 몰락의 근본 원인을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 P236

이리하여 바렌 사건과 샹 드 마르스 사건에다 헌법의 반민주성이라는 요인이 하나 더 덧붙어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 P239

1789년 5월 초 특권 신분이 자신들의 특권을 보유하면서 재정 위기를 해결해 보려는 간교한 생각에서 소집되었던 삼부회가 근대적 국민 대표 기관으로서의 국민의회로 발전하여 헌법 제정의 의무를 스스로 짐으로써 제헌의회의 기능을 완수하였다. - P241

이 의회가 드디어 만들어낸 근대 프랑스 헌법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 헌법, 1791년 9월 3일 국민의회령Décret de l’assemblée nationale du trois Septembre, 1791: La Constitution Française’이다. 이 헌법은 인권선언을 맨 앞에 싣고 봉건제도 폐기의 성과들을 나열한 전문 17조와 본문 7장 201조로 되어 있다. - P242

1791년 헌법에 의한 프랑스 왕국은 겉보기로는 왕국이 틀림없었으나 알맹이는 공화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791년 헌법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른 것 같으나 실은 의회 만능이라는 권력 구조로 무장된 헌법이었다. - P251

그러나 코뮌은 강력한 자치정부municipalité를 가지고 있었다. 코뮌 정부는 임기 2년의 코뮌 평의회와 그 의장 및 동장maire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주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어느 기관보다도 가장 민주적이었다. 더구나 코뮌 평의회는 국민 방위대와 무장군의 동원 요구권이 있었고 누구에 의해서도 해산되지 않았다. 앞으로 혁명이 과격화하여 정치적 위기가 커지면 이 행정상의 지방분권은 국민적 통일에 위협이 되는 한편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코뮌의 민주적 자치 기구가 혁명의 과격화를 더욱 촉진시키게 될 것이다. - P253

1791년 헌법은 근대 시민국가 헌법으로서는 미국 헌법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일찍 제정된 모범적인 헌법이다.
그러나 미국 헌법은 제정된 후 20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한 번도 폐기된 일이 없는데 프랑스의 1791년 헌법은 1년 만에 폐기되고 말았다.
입헌군주국가의 기도가 1년 만에 실패했던 것이다. - P255

헌법 전문의 첫머리를 장식한 인권선언 제1조는 "법률은 공공 의지의 표현이므로 모든 시민은 개인적으로 또는 대표자에 의하여 입법에 협력할 권리를 갖는다"고 못 박아놓고서, 최소한 3일간의 노동임금에 상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지 못하는 국민을 수동 시민이라고 하여 일체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58

제헌 국민의회는 1791년 9월 30일 해산하고 이튿날 10월 1일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745명의 대의원은 정치적 경험이 없는 30세 미만의 젊은이가 대부분이었다. - P261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시민들의 모습. 귀족들이 입는 ‘퀼로트culotte’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sans’다고 하여 ‘상퀼로트sans-culotte’라 불렸다. - P282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주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sans−culotte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 - P284

의회와 코뮌의 대립은 합법적인 힘과 혁명적인 힘의 대립이며 부르주아와 민중의 대립이었다. 이 대립은 앞으로 국민공회가 소집되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기까지 6주일간 계속된다. - P285

파리 코뮌이란 무엇일까? 그 뜻은 파리 시의회City Council라는 뜻이었다. - P285

새 헌법의 원리는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의회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286

그런데 파리 코뮌의 지도자는 코뮌을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입각한 법무장관 당통이었다. 당시 당통은 자코뱅 클럽의 좌파로서 로베스피에르와 단짝이었다. 그리고 코뮌에 신설된 감시 위원회comité de surveillance의 실력자 마라도 한패였다. - P287

9월 학살 후부터 지롱드당이 보수화하여 자코뱅당 좌파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 P294

자코뱅당은 브리소의 지롱드파와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Montagnards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왕권의 소멸과 함께 우익의 푀양이 실각함으로써 집권파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싸움이라는 정치적 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계급적 분열이었다.
지롱드파의 혁명 이념이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의 절대를 비롯한 시민적 자유에 있었다면,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그런 사유권을 자유로이 행사하려고 하여도 소유한 것이 없는 민중에게도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산악파의 이념은 자유와 함께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질적·정치적 평등의 실현에 있었다.
두 파의 혁명 이념의 차이는 앞으로 혁명과 전쟁의 진행에 따라 한결 더 명백히 드러나게 되고, 특히 국내외 반혁명을 분쇄하는 현실적 방법론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거니와 1792년 9월 국민공회의 선거 과정에서 이미 그 기본적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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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다. - P20

영국은 1689년의 명예혁명으로 성취한 입헌 군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미국은 1776년의 독립 혁명으로 달성한 공화주의의 기반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 - P21

이 같은 상황에 놓인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이라고 한다. 앙시앵레짐하에서 부르주아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몰락하는 귀족의 토지를 사들였다. - P30

18세기 프랑스의 사회질서는 제도상으로는 봉건사회의 피라미드형 신분 구성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신분은 세 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신분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이고 제2신분은 세속 귀족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3신분이었다. 앞의 둘은 면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봉건적 특권을 향유하는 특권 신분이고, 이 특권 신분의 꼭대기에 국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왕을 꼭대기로 하는 피라미드형의 신분 질서였던 것이다. - P38

이와 같이 제3신분 안에는 노동자, 농민, 부르주아지의 세 가지 사회적 요소가 뒤섞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 안에서도 빈부의 차와 이해관계의 대립이 일어나고 있었다. - P49

마티에Albert Mathiez는 《프랑스 혁명사La Révolution française》에서 혁명의 궁극적 원인은 번영 속에서 불거진 계급 간의 불균형이라고 말한다.
 
혁명은 쇠퇴하는 나라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하고 번영하는 나라에서 일어난다. 가난은 더러 봉기를 일으키게 하나 사회를 전복시키지는 못한다. 사회 전복은 언제나 계급 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 P50

그들은 봉건제도하에서는 봉건적 부과를 영주에게만 바치면 되었으나 이제 절대주의 체제에서는 새로 국왕이 부과하는 각종 세금까지 바쳐야 했다. 농민이 부담하는 이 이중 조세 체계야말로 앙시앵레짐의 이중적 성격을 말하는 동시에 그 모순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 P56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삼부회의 소집과 함께 국왕에게 제출된 농민들의 진정서를 분석해 보면 지방에 따라 사정이 다르지만, 농민은 대략 수입의 80~90퍼센트를 세금으로 빼앗기고 있었다. - P59

그러나 농민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자들이 있었다. 제1신분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던 농촌 교회의 사제들이었다. 농촌에서는 사제들만이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계몽사상이 그들의 생각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 P61

근세의 기계론적 우주관은 철학 사상에서 경험론과 합리주의를 낳았고, 이 두 철학의 흐름은 하나로 결합하여 이른바 계몽사상을 낳았다. - P79

계몽사상이 앞세우는 유일한 최고의 기준은 이성인데, 이 이 이성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수학적 이성인 동시에 베이컨Francis Bacon의 실증적 이성이었다. - P80

계몽사상은 이 불합리와 모순에 찬 현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며, 그 모순을 제거하여 합리적인 사회를 실현하려는 실천철학이었다. - P80

이에 반하여 루소는 모든 국민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절대 왕정을 계몽적인 입헌군주제로 개량하는 미온적인 개혁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되고 모든 주권은 그 계약에 동의한 인민에게 있었다. - P85

그의 사회계약론에 의하여 비로소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천부의 권리를 갖는다는 인권 사상과 앙시앵레짐의 반자연적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사상이 대두하였다. 루소는, 몽테스키외가 귀족계급에게 유보시키고 볼테르가 상층 부르주아에게 유보시켰던 정치권력을 민중 전체로까지 확대하였다. - P86

루소의 평등주의 원칙은 철저한 민주주의 원칙으로서 그 기초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의 평등에 있었다. 모든 시민은 제 먹을 것을 제 손으로 생산하는 소규모의 토지 소유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원리상 민주주의의 헌장이 되었다. - P86

18세기 프랑스는 제도에 앞서 풍속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제도는 봉건적 신분 질서가 잡고 있었으나 풍속은 부르주아의 돈과 재능을 바탕으로 한 성공을 따르고 있었다. 돈과 재능은 본질상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는 불평등했으나 현실의 풍속은 사회적으로 평등하였다. - P96

또한 상공업을 규제와 금지에서 해방시키고, 이성과 과학을 신학과 도그마에서 해방시키고, 양심을 야만스런 편견에서 해방시키고, 토지를 봉건적 지조地祖에서 해방시키는 자유였다. - P96

하나는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의 참전이고 또 하나는 1786년 영−불 통상조약의 체결이다. - P113

7년전쟁(1756~1763)으로 영국에 빼앗긴 신대륙의 식민지들이 바야흐로 영국에서 독립한다고 나서자 - P113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은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고, 프랑스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의 폭등을 가져왔다. - P114

왕은 칼론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개혁안들은 고등법원에 등록되어야 효력을 발생하는데, 고등법원이 그런 개혁을 용인할 까닭이 없었다. 거기서 정치적 편법으로 강구한 것이 명사회를 소집하여 개혁안을 토의에 부치는 것이었다. 여태껏 왕이 선임한 명사회는 왕의 뜻을 거역한 전례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이 방법을 쓴 것이었다. 1787년 2월 22일 왕이 지명한 명사 14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왕족 일곱 명, 귀족 36명, 법관 33명, 주교 11명, 왕의 고문관 12명, 삼부회가 유력한 지방인 파이 데타pays d’état의 대표자 12명, 도시의 시장 25명. - P120

거기에다 부르주아지는 1614년의 삼부회와 이번 소집되는 삼부회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이번의 삼부회는 국민대표 회의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첫째, 그 구성에서는 제3신분 대표의 인원이 적어도 제1, 제2신분 대표자의 합계에 맞먹어야 하고,
둘째, 표결 방식이 신분별이 아니라 대표자 각자가 한 표식 행사하는 방식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주장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지난 7월 21일 도피네 삼부회가 결의한 바 있었다. - P138

민중의 중론은 이제 양상이 달라졌다.
왕과 전제정치와 국가체제에 관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더 중요한 것은 특권 신분에 대한 제3신분의 투쟁의 문제였다. - P141

제3신분 대의원 총수는 621명이었는데, 약 절반이 법률가들이고 나머지 반은 여러 가지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진정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귀족 신분의 미라보나 성직자 신분의 시에예스Emmauel Joseph Sieyès(흔히 아베 시에예스Abbe Sieyès로 알려진) 같은 사람들이 자기 신분 회의에서는 탈락되고 제3신분 회의에서 제3신분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사실이다. - P145

이제 제3신분 의회는 제3신분이라는 특정 계층의 대표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이라는 일반의지의 대표 기관이 되어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이다. - P153

테니스코트의 서약. 1789년 6월 20일 회의장에서 쫓겨난 국민의회는 베르사유에 있는 테니스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 P156

이른바 ‘대공포La grande peur’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 대공포는 귀족 계급에 대한 농민의 증오와 단결을 부추기고 반봉건적 농민 폭동을 격화시키는 동시에 혁명을 지키기 위한 국민의 무장을 촉진시켰다. - P171

벌판에 번진 불길처럼 무서운 기세로 번져가는 농민 폭동과 대공포를 바라보는 국민의회−헌법 제정의 임무를 스스로 걸머진 때부터는 제헌의회Assemblée Constituante−의 눈은 심상치 않았다. - P173

11일에 발표된 이른바 1789년 8월 법령Décret du août 1789 제1조는 다음과 같았다.
 
국민의회는 봉건제도를 전면적으로 폐지한다. 국민의회는 봉건권이나 공조권 중에서 물적 또는 인신적 노예 상태와 인신적 예속제에 관계된 것과 이러한 것들을 구현하고 있는 일체의 권리를 무상으로 폐지하고, 기타의 모든 권리는 ‘되살 수 있음’을 선언한다. ‘되사기rachat’의 액수와 방법은 차후 국민의회가 정한다. 이 법령으로 소멸되지 않는 권리는 배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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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도 아들 둘 키우고 있지만 내가 아무리 잘나가도 자식이 잘못되면 내 인생 아무것도 아닌 거고 내가 아무리 못나고 가난해도 내 자식이 잘되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게 부모의 자리야.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61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계시는 많은 분을 아우를 수 있는 작가를 떠올리다 앙토냉 아르토를 생각했습니다. 아르토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극작가이자 멋진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앙토냉 아르토가 만년에 쓴 글을 인용하며 이 자리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 짧은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문장은 제게 ‘작품’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신인 작가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출사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80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앙토냉 아르토다 이 말을 즉각 할 수 있기에 나는 그리 말하나니

당신들은 현재의 내 몸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만 개의 분명한 양상들로 모이는 것을 보게 되리라

당신들이 결코 나를 잊을 수 없게 할

하나의 새로운 몸으로

이상입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81

꿈인지 생각인지 혼미한 문장-풍경 사이로 여름을 예비하는 작은 잎들이 내 눈앞에서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여름의 춤, 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제목은 그런 생활이 될 것이며, 그건 내가 바로 그런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읽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고, 때로는 그들만이 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쓰지 않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글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런 생활을 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87

그렇게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득, 오래전 내 뒷목을 스쳤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매우 분명하게 느끼기는 그때와 다름없었으나 이번에는 그 서늘함이 그저 스쳐지나가지 않고 음굴광성 덩굴처럼 아래로, 아래로 퍼져 내 뒤에 묵직하게 머물렀습니다. 그날 이후에도 해수의 집에 간간이 들러 한갓진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나는 그 서늘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고, 그건 휴가지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나는 생각을 떨치려 틈날 때마다 숲길을 전력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거친 숨을 고르기 무섭게 그 생각은 다시금 내 머릿속으로 파고들어왔어요. 끊임없이 엄습해오는 생각을 피하지 못한 채로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나는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26

따스한 나날일 테지만 날이 화창할지, 비로 흐릴지, 자욱한 먼지로 희붐하기만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 꼬물거리는 손으로 당신이 내 손가락을 잡자마자 나는 당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되겠지요.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51

하지만 나는 또한,

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합니다. 당신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동생 해수가 나와 함께 정동길을 걸으며 서로가 꿈꾸었던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우리가 나란히 각자의 두 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

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52

여성성을 모성에서 해방시키는 대신, 젊은 여성을 선택의 주체로 호명하는 일은 사실상 선택을 통해 여성을 모성으로 다시금 자연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 모성이 행복과 연결되고 나면, 1970년대 초반에 그랬듯 모성은 더이상 여성의 숙명이 아니라 여성의 욕망으로 간주된다. (……) 그러나 여성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특히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욕망으로서 모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디어, 정부 정책, 정치 담화 등 다양한 맥락에서 여성의 행복을 규범화하는 전제는 선택이라는 관용어를 통해 모성을 다시금 자연화한다. 모성이 임신한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하게 행복한 선택일 때, 임신중지는 여성에게 괴롭고도 가슴 찢어지는 선택이 된다.(90쪽)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55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는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배경으로 임신중지 및 재생산권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58

‘나’는 이러한 재현 방식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희진의 논리대로 약물적 임신중지법이 "차기 임신에 영향을 주지 않아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추구되는 것이라면, 여성은 임신중지를 택하는 순간에도 ‘(미래의) 모성’에 속박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민이 들고 있는 사례 또한 임신중지에 대한 기존의 편향된 이미지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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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에게는 능력/기술적 측면에서 사회적 필요를 증명하는 동시에 ‘날씬한 여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성별에 대한 이중 억압이 부과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젠더는 그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15

독자가 소설의 인물과 자신을 부분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경험적 유사성은 물론 ‘사회적인 젠더의 구성에 대한 이해’에 의해 가능하다. ‘사적 영역’의 개인과 ‘공적 영역’의 개인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실제 개인의 삶에서 그 영역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음을 고려할 때 여성 서사 및 그 서사와 관계 맺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의 영역이 넓어진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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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말해보자면, 고모가 그 집의 악역이었다. 집안마다 한 명씩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장례식장에서 다른 가족들이 일하는 동안 본인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을 세어보는 사람. 식구들이 모이면 사정 뻔히 알면서 너는 성적이 어느 정도이고 취직은 언제 할 생각이냐고 묻는 사람. 너 친구는 있니? 살이 너무 찐 거 아니야? 운동을 해라 운동을, 응? 그리고 몇 년 만에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이렇게 묻는 사람. 너는 아직도 용돈 받니? 우리 애는 이제 독립했는데, 너는 결혼은 안 해? 남자친구는 있니?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9

바로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구나. 다른 식구들의 신경을 긁어대는 인간. 미움받을 소리를 잔뜩 늘어놓고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못돼처먹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싫은 사람. 그래, 바로 그녀였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2

그러나 그는 거실만 계속 둘러볼 뿐이었다. 새집 냄새가 아직도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주변을 살피는 그의 눈빛은 조금씩 자주 변했다. 염려하다가 안심하다가, 다시 살짝 불안해하다가 고민하다가.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걱정이 잠잠해지는 것을 보았다. 서서히, 고요하게, 모든 그늘이 사라진 얼굴.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4

생각해보면 내가 시어머니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이십 년 넘게 간호사로 일했고, 그때도 요양병원의 야간근무를 자임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사회생활에 능숙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충분히 친절하고 다정한 마음을 전달할 줄 알았달까. 때문에 그녀를 만나고서 나는 남편의 일부를, 그러니까 내가 그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건지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5

그 음식, 제수(祭需), 제찬(祭饌), 제물(祭物). 새빨간 양념에 버무려진 뼈가 붙은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제사상 한가운데 그 요리가 놓여 있었다. 그걸 왜 그때야 발견했을까? 다진 셀러리와 싱싱한 고수가 양념 위에 듬뿍 얹혀 있고, 덕분에 주홍빛 양념 색깔이 더욱 강렬하게 두드러지는 그 요리를. 고추장이라고 하기에는 양념 색이 좀 묽고 옅었다. 그럼 토마토인가? 어디 요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남아? 중국? 아니면 유럽? 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끌었던 건, 그 이국적인 요리가 딱 봐도 지름이 삼십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검은색 르크루제 무쇠 냄비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기에 얌전히 담긴 나물 반찬과 생선조림, 깎은 생밤과 삶은 달걀, 사과와 배 같은 음식들 사이에 말이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8

그런데 너는 고모가 얼마나 짜증나는 인간인지는 고사하고, 할아버지의 베트남 참전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던 거지.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9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나는 고모가 짜증나지 않았다. 그 대화, 한 명은 계속 말을 빙빙 돌려가며 공격하고 다른 한 명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쾌활하게 웃는 그 기괴한 대화가 이들 사이에 아주 여러 번 반복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1

그리고 내 남편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4

할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짙은 눈썹 사이가 좁고 볼이 툭 불거진,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 고요한 얼굴.

놀라울 정도로 남편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8

남편은 복을 누리는 것 같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토마토 고기찜을 앞접시 한가운데 가득 퍼 담았다. 그리고 큰 고깃덩어리를 손으로 집어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붉은 양념이 그의 입가에서 접시로 뚝 떨어졌다. 언제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더니,

사실 네가 좋아하는 거였구나.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30

그 풍경 속에서 시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아버지를 흘겨보는 고모의 날카로운 시선.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쉬는 시아버지. 그리고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할머니만 생각난다. 그리고 남편.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33

시어머니는 남편 앞에 토마토 고기찜을 아예 냄비째 갖다놨다. 벌써 요리의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의 손은 쉼없이 냄비 안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가 이 요리를 왜 이렇게 많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34

그래.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었다. 내내 그 사람을 보고 있었다. 화를 내며 숟가락을 던진 사람. 죽을까봐 마음을 졸이며 삼 년을 기다린 사람. 살아 돌아와서 일 년 동안 집에 처박혀 있던 사람. 아내가 매일 출근하며 차려놓은 밥상엔 손도 대지 않은 사람.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36

그래서 이후 해마다 생일이면 그 요리를 먹어야 했다. 해마다 월남에서 돌아왔던 날이면 그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러니까 아내가 만들 수 없는 음식, 먹고 싶지 않은 음식,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 함께 먹을 수 없는 음식, 그 제수, 제찬, 제물, 그것을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혈관이 지방으로 막혀버렸다. 터져버렸다. 죽어버렸다. 그래서 부디 제발, 이제는 꺼져버렸으면 좋겠는데, 되풀이되는 기억 속에서 귀신처럼 들러붙어 계속 나타나는 사람.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않은 사람. 그래. 바로 그가 내 옆에 있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37

토마토 고기찜은 더이상 만들지 않는다고 들었다.

대신 아주 가끔 내가 만든다. 시어머니가 준 르크루제 냄비에.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38

그러니까 내가 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말이다. 이를테면 시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며 함께 살고, 제사를 열심히 챙기기로 한 대신 시아버지는 너의 삶에 어떤 상관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 약속에는 나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며느리인 내게만 말해주기로 역시 약속했다는 것.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볼까.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내용이 담긴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시어머니는 글 말미에 이렇게 썼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사에 오지 않아도 된단다.’

그녀는 강조했다.

‘정우는 다 모르게 해줘.’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39

네 부모님이 고모의 그런 성질머리를 내버려둔 건 할머니 때문이었다. 함께 사는 건 아들이었지만, 할머니가 의지하는 사람은 딸이었기 때문이다. 하소연하고, 짜증을 내고, 온갖 말을 다 쏟아내는 그런 사람. 그녀의 모든 걸 이해하는 사람.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40

왜냐하면 나는 엄마가 우는 걸 자주 봤으니까. 외할머니가 외삼촌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큰딸을 여러 번 아프게 했다는 걸 알았으니까. 대학교를 갈 수 없게 했고, 결혼식에 돈을 보태주지 않았고, 사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국 그 사위가 보증 빚을 졌을 때 매일 전화를 해서 한숨을 쉬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이고 떠들어댔다. 울었다. 하소연하고 속을 풀었다.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주니. 네가 나를 이해해줘야지. 그리고 다시 전화를 해서 말했다. 너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래? 너 때문에 내가 잠이 안 와.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41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의 얼굴에서 걱정이 잠잠해지는 것을 보았다. 서서히, 고요하게, 모든 그늘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45

"딸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46

그런데 말이야.

과연 그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계속 그날을 떠올린다. 이 이야기를 계속 중얼거린다. 너. 너와 나로 인한 너. 무심코 생각하면 나를 닮은 모습으로 불쑥 떠오르는 너. 그래서 나를 겁나게 했던 너. 어떤 계획도 세우고 싶지 않게 만들었던 너. 하지만 나는 늘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부디 너를 위해 이것만큼은 내가 진짜로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래. 그래서 나는 그날 대답했던 거야. 이것이 너의 드라마, 복(福)이 되길 바라며.



어둠 속에서 나는 대답했다.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참…… 시시하지?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47

스릴러는 일반적으로 앎과 모름이라는 인지의 시차를 이용하여 공포감을 자극하고, 그 기울기 조정을 통해 쾌락을 구성해나가는 장르다. 그리고 그 인지의 시차가 단지 객관적인 시각 차이가 아니라 성을 근간으로 한 권력의 차이임을 밝힐 때, 스릴러 장르의 문법은 여성주의 인식론과 결합한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51

"아내가 만들 수 없는 음식, 먹고 싶지 않은 음식,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 함께 먹을 수 없는 음식"인 토마토 고기찜은 바로 시할머니, 시고모, 시어머니의 울분과 노동력으로 빚어진 음식으로, 시어머니가 양껏 마련한 그 슬픈 음식에 지금 손을 대는 이는 시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그와 겸상할 수 있었던 장손인 남편뿐이다. 대체 여성이 일하고 남성이 누리는 이 가족 내 불평등구조는 어떻게 양산된 것인가.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56

그녀는 한국어 억양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원어민처럼 영어로 말할 수 있는 학생들이 섞인 강의실에서 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일지 어림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66

그녀는 강의 소개를 끝내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았다. 유창하게 말하는 학생들이 가장 먼저 질문을 했다. 그녀는 학생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한번 더 말해달라고 요청하고는 성실하게 답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67

첫번째 수업시간에 우리는 조지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했을 때 쓴 에세이들을 읽었다. 그녀는 에세이를 한 줄 한 줄 따라 읽어내려가며 강독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67

"그곳은 용산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 영어 페이퍼백 소설들을 읽으며 그녀는 용산으로부터도, 자신의 언어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었다. "영어는 나와 관계없는 말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다. 내게 상처를 줬던 말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78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내 글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응주의, 능동적인 순종. 그런 말들에서 나의 글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93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95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십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06

선생님.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그 모습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08

‘여성 서사’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소설 읽기를 시작하며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개인적인 일이란 무엇인가. 공과 사를 구분하고 공적 영역에서의 자기와 사적 영역에서의 자기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통념처럼 정말 가능한가? 분리된 영역에 대한 인식은 어떤 삶의 오류/어려움을 발생시키며 어떤 식으로 봉합되고 추슬러져 삶을 다음으로 나아가게 할까. 소설의 제목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처럼 보인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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