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프랑스의 만성적 적자 재정을 재건하여 재정과 통화의 안정을 실현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서 갓 출발한 프랑스의 산업 자본주의를 본궤도에 올려놓았는데, 그의 재정 정책의 요점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간접 세제였고 둘째는 정복 국가에 대한 배상과 강제 수탈이었고 셋째는 국유재산의 판매였다.
1803년 공화 11년, 제르미날 7일 순금 320밀리그램을 함유한 제르미날 프랑이라는 금화를 발행했는데, 이 화폐는 19세기를 거쳐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큰 인플레이션 시기까지 꾸준히 그 가치를 유지하였다. 그 덕택에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경제는 안정된 재정하에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 P536

나폴레옹은 토지 문제에 관한 한 혁명의 결과를 철저히 보호하는 데 세심하였다.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 P539

이상에서 보나파르티슴의 역사적 필연성이 무엇인가를 프랑스 혁명 후의 사회관계에서 찾아보았다.
결론은 한마디로, 당시 프랑스 자본주의는 아직 미성숙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혼자의 힘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확립할 수 없었고, 결국 군사독재의 힘에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P539

나폴레옹이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에서 대륙 국가들과 영국의 무역을 일체 금지시킨 칙령을 대륙봉쇄령이라고 한다. 그것은 새로운 대륙 체제Contrinental system였다. 나폴레옹의 대륙 지배는 1807년의 틸지트 조약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 P558

대륙과 영국의 경제적 관계가 그만큼 뿌리 깊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륙봉쇄가 영국 경제를 멍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륙 국가들도 영국 못지않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은 수출품 시장을 새로 신대륙 특히 중남미에 개척하여 타격을 경감시킬 수 있었으나, 유럽 대륙의 나라들 특히 러시아 같은 나라는 농산물의 수출 시장을 찾지 못하여 고통이 매우 컸다. - P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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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구성원은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이때 출발점은 심리적 안정감을 조성하기 위한 기본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95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업무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새로 짜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95

실패를 보고하기 두려워하는 문화는 심리적 안정감이 낮은 조직에서 발견되는 흔한 현상이다. 따라서 리더가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조직의 심리적 안정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96

구글 X의 CEO이자 문샷 프로젝트의 수장인 아스트로 텔러는 "위험 요소가 많은 대형 프로젝트에 구성원을 참여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얼마든지 실패해도 좋은 환경을 먼저 구축하는 것이다. 발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프로젝트에 몇 년씩 질질 끌며 돈을 퍼붓느니 그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중단시킨 직원에게 그만큼 보상을 해주는 편이 낫다"라고 말했다.[ 11 ]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98

다시 말해 리더가 적극적으로 나서 심리적 안정감을 조성하지 않는 한 구성원은 본능적으로 실패를 피하고자 도전을 회피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알라딘 eBook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중에서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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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민공회가 로베스피에르의 엄격한 권위에 따라 1793~1794년에 세운 자코뱅적 전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 P418

산악파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철저한 민주적 공화국의 건설을 명확히 자각하여 중요한 3대 목표를 내세웠는데, 그 3대 목표란 조국의 방위와 혁명의 수호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 - P418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저마다 소생산자인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자코뱅의 신념이었다.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초를 인식하는 점에서만큼은 자코뱅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 P421

자코뱅의 평등주의는 소유의 평등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를 세우기 위해 무산 시민을 없애고 소토지 생산자층을 형성하려는 평등주의였다. - P422

그러나 테르미도르파는 군주주의를 반대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도 반대하였다. 테르미도르파의 공화국은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었으나 민주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세운 정책은 상퀼로트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물리치는 동시에 왕당파의 왕정복고도 거부하면서 부르주아적 규범 안에서 혁명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 P421

말을 바꾸면, 테르미도르파의 이상은 국왕 없는 입헌군주주의였다. 이 모순을 해결할 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보나파르티슴이었다. - P455

팡테옹 클럽에는 공화 3년 헌법을 비난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을 후회하고 1793년 헌법의 부활을 주장하는 좌익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끌고 또 총재정부가 가장 무서워한 그룹은 그라쿠스 바뵈프를 중심으로 하는 과격한 평등주의자들이었다.
바뵈프는 일찍이 1795년 11월에 기관지인 《인민 논단Le Tribun du peuple》에서 ‘프랑스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제하에,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그것은 특권층과 민중,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전쟁이다. ……
민주주의란 넉넉히 소유한 자들이 넉넉지 못한 자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의무이다. ……
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관리 제도를 세워 사유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재능을 자기 직업에서 발휘하게 하고, 거기서 나온 생산물을 공동으로 보관하게 하고, 분배를 공동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 P468

그 헌법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를 수립하여 지배를 강화한 것으로서 상퀼로트에 기반을 둔 1789년 헌법의 민주주의 정신을 짓밟고 거꾸로 1789년 혁명의 부르주아적 전통에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1789년의 혁명 이념은 공화주의가 아니라 입헌군주주의였다.
그런데 공화 3년에는 군주가 목이 잘려 없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부득이 군주 없는 입헌군주주의 헌법으로 돌아간 것이 바로 공화 3년 헌법이었다.
공화 3년 헌법은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의 모순된 헌법이었다.
왕당파와 자코뱅파가 선거 때마다 진출하여 그 헌법을 위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동시에 헌법을 지키기 위하여 쿠데타가 연발한 이유도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총재정부의 사회적 기반은 부르주아지와 함께 국유재산의 구입으로 토지 소유자가 된 농민이었는데, 이 농민층은 자기들의 새 소유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는 앙시앵레짐의 부활을 극도로 두려워하였다.
요컨대 혁명으로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할 때 농민은 앙시앵레짐을 타도한 부르주아지와 이익의 일치를 발견한 것이다.
농민층이 총재정부의 온건한 중도적 공화주의를 지지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총재정부가 바뵈프의 ‘평등주의자의 음모’의 위협을 받자 1796년 4월 "왕정의 재건이나 1793년 헌법의 재건을 선동하거나 …… 농지법의 이름 밑에 사유재산의 약탈과 분배를 선동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린 것은 이들 총재정부의 본질에 완전히 적합한 것이었다. - P482

총재정부의 본질이 그러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익과 좌익의 공격 앞에 비틀거리면서 해마다 쿠데타 방식으로밖에는 헌법을 유지할 수 없었을 때, 이들을 지지하는 사회적 기반이었던 부르주아지와 농민은 초초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제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더 과격하지 않고 더 강력한 정부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 P471

프레리알 쿠데타는 쿠데타라기보다는 일종의 의회 혁명으로서 전해에 일어난 플로레알 쿠데타의 우경화에 대한 보복이었다. - P472

헌법! 그것은 바로 당신들의 손에 의해 파기되지 않았소. 프뤽티도르 18일에, 그리고 플로레알 22일에 그리고 또 프레리알 30일에 헌법은 침범되었소. 헌법을 존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들에게 헌법을 말하는 바로 저 사람도 헌법이 파기되고 찢어져 없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 P471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 P476

1799년 11월 9일 쿠데타가 일어났고, 12월 25일 나폴레옹을 통령으로 하는 통령정부가 창설되었다. - P474

나폴레옹 전쟁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전쟁론Vom Kriege》을 저술한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였다. 권력을 유지하지 위하여 정치로 안 되면 전쟁을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권력은 나의 명예에 유래하고 나의 명예는 나의 전승에 유래한다. 그러므로 나의 권력은 그 기반으로서의 새로운 명예와 새로운 전승을 계속하지 않으면 무너지리라. 정복이 나의 현재를 만들었고 정복만이 이 현재를 유지할 수 있다. - P488

그리하여 평화조약의 정식 조인은 6개월이 지난 뒤 1802년 3월 25일에 겨우 실현되었다. 이것이 아미앵 조약이다. 이 조약은 프랑스에 유리하였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왕자가 되었다. - P498

이 재산 문제를 종교 협약에서 해결하겠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첫째 동기였다. 둘째 동기는 현 체제를 부장하는 망명 귀족과 국내의 가톨릭 신도를 떼어놓으려는 것이었다. - P502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 P518

나폴레옹의 제위는 이중으로 성별되었다. 하나는 국민투표의 인민의 소리vox populi에 의하여 또 하나는 종교의식의 신의 소리vox Dei에 의하여. 피우스 7세가 나폴레옹에게 걸었던 기대는 하나밖에 실현된 것이 없었다. 그것은 혁명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다시 사용한 것이었다. 1806년 1월 1일부터 옛 역서가 다시 사용되었다. 이는 혁명의 종결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P520

그 사회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봉건제도와 함께 봉건귀족의 권력 및 소유관계를 전복한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제도와 함께 시민계급의 권력 및 소유 관계를 수립하였다. - P528

그러기에 나폴레옹의 역사적 필연성은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의 종결과 완성에 있었다. 브뤼메르 쿠데타 직후 "혁명은 그 당초의 원칙에 고정된다.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총재정부의 선언은 그 쿠데타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였다. - P529

민법을 종교적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혁명의 원리를 방어하고, 신분의 세습을 금지하고 상속과 소유에 관한 혁명적 입법의 일반적 원리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민법전은 가족 관계에서 가장의 우월적 지위와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규정하여 보나파르티슴의 권위주의적 색체를 반영하였다. - P532

요컨대 혁명 입법에 비하면 반동적이고 앙시앵레짐의 법률에 비하면 혁명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 민법보다도 가장 진보적이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가는 곳마다 민법이 미친 혁명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비단 유럽만이 아니라 민법전은 근대 세계의 모든 나라에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정치적 이념을 전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민법전은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가히 보편적·세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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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위치한 안전지대 밖에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볼 때 종종 까먹곤 하는 이 질문을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이런 총체적 혼란의 시기가 시작을 도모할 수 있는 큰 기회이다. - P23

황금조차 나이를 먹기 마련이다. 뉴리치는 은퇴 후로 삶을 집행 유예하는 걸 그만두고, 뉴리치만의 화폐인 시간과 기동성을 이용해 현시점에서 풍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기술이자 과학이다. - P29

40년 동안 일한 후 은퇴해서 보상 받는 인생 계획 대신, 미리 이 보상을 맛보도록 미니 은퇴를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 P38

셋째, 이 책은 당신의 ‘꿈의 직업’을 찾는 데 필요한 책이 아니다. 나는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완벽한 일자리란 가장 짧은 시간 일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한한 성취감을 주는 일자리를 절대로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성취감을 목표로 하지 않겠다. 이 책의 목표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도 수입은 저절로 생기게 하는 것이다. - P41

협상 타결deal making이란 단어에서 영문자 DEAL은 또한 뉴리치의 멤버가 되는 과정을 첫 글자만 따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 P42

D단계 정의Definition의 첫 글자인 D 단계에서는 기존의 잘못된 상식들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새로운 게임의 법칙과 목표를 알려 줄 것이다. - P43

E단계 제거Elimination의 첫 글자인 E 단계에서는 시간 관리에 관한 케케묵은 기존 관념들을 완전히 뿌리 뽑을 것이다. - P44

A단계 자동화Automation의 첫 글자인 A 단계에서는 환차익 거래, 아웃소싱, 무결정nondecision 규칙을 이용하여 현금을 자동적으로 창출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 P45

L단계 해방Liberation의 첫 글자인 L 단계는 세계화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기동성 선언문이라 할 수 있겠다. - P46

그러므로 직장인은 각 단계를 기업가적 마인드의 DEAL(정의-제거-자동화-해방) 순으로 읽어 나가되, 실행에 옮길 때는 DELA(정의-제거-해방-자동화)의 순서로 해야 한다. - P47

DEAL 과정은 프랑스 경제학자 세이J. B. Say가 1800년에 이 단어entrepreneur를 맨 처음 만들었을 때처럼 당신을 순수한 의미의 기업가가 되도록 변화시킬 것이다. 바로 경제적 자원을 생산성이 낮은 영역에서 생산성이 높은 영역으로 이전시키는 사람 말이다. - P48

일을 위한 일이 되지 않도록 하며,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일만 한다. (‘최소 유효 작업량’) - P56

회복기와 모험기(미니 은퇴기)를 인생 전반에 걸쳐 고르게 배치한다. 활동을 그만두는 게 목표가 아니란 걸, 당신을 흥분시키는 일을 하는 게 목표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56

관리자도 직원도 아닌 소유자가 된다. 기차를 소유하여 다른 사람이 정시에 운행하도록 한다. - P57

더 질 좋은 제품을 갖되 잡다한 것은 덜 소유한다. 물건을 사는 것 혹은 사려고 마음먹는 것과 같은 대부분의 물질적 욕망은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보내는 데 대한 정당화 말이다. - P58

생각은 크게 하되, 돈은 매일매일 들어오도록 한다. 현금이 들어오는 게 먼저고, 한탕은 나중이다. - P59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갖되, 일을 위한 일로 되돌아가지 않고 꿈을 추구할 자유와 결단력을 갖는다. - P59

유예자: 자신을 위해 일한다.

뉴리치 :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일하게 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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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사기의 완전 폐지는 산악파가 국민공회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1793년 7월 17일령에 의하여 비로소 실현된다. - P308

지롱드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산악파는 상퀼로트의 요구에 응하는 적절한 조치들을 하나하나 실시하였다. - P349

그는 파리 코뮌과 국민공회의 사이, 국민공회와 자코뱅 클럽의 사이, 파리와 프랑스의 사이를 잇는 살아 있는 유대로서 코뮌과 국민공회를 둘 다 수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 P352

한편 혁명정부는 혁명력(공화력)을 제정하여 전해인 1792년 9월 22일을 새 역법의 설날로 정하였다. 1년을 열두 달, 한 달을 30일, 한 주일을 10일로 나누고 그 끝날을 휴일로 하고, 연말의 5일을 상퀼로트의 날로 정하여 공휴일로 하였다. 달의 명칭도 전통적인 이름을 버리고 계절의 특징을 따라 붙였다. - P359

혁명력의 재정에는 최소한 두 가지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하나는 전통적인 역법의 불합리성을 합리적으로 고친다는 생각이었다. 달마다 날수가 다르고 7일을 일주일로 할 때 빚어지는 복잡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수학적 과학 정신의 소산이었다. 또 하나는 공화정의 선포를 인류 역사의 획기적 사건으로 생각한 혁명 정신이었다. 역사를 인간 이성의 발달과 과학적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했던 계몽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 이성의 몽매의 산물인 왕정을 타도하고 계몽주의의 산물인 공화정을 수립한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뜻깊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몽매한 역사이고 이제부터의 역사는 이성의 역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서 공화정이 시작되는 날을 혁명력의 설날로 잡았던 것이다. - P361

왼쪽의 에베르파와 오른쪽의 당통파를 없앤 로베스피에르는 이제 양쪽에서 오는 반대에서 모두 해방되었다. - P377

동시에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기에 앞서 국가의 것"이라는 생쥐스트의 사상에 따라 1793년 말 초등교육의 의무제를 세계 최초로 제정하였다. - P395

날이 밝자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일파 22명이 곧바로 형장으로 끌려가고, 함께 체포된 코뮌파 70명도 그 뒤를 따랐다. 이 사건이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이고, 이 쿠데타를 주동한 자들을 테르미도르파라고 부른다. - P414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의 민주 공화주의를 100년간 후퇴시켰다. 테르미도르파의 지배하에서 뒤늦게 그 쿠데타의 성격을 깨달은 노동자들이 최고 임금제의 부활을 위하여 봉기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 P415

프랑스 혁명은 테르미도르 9일로써 막을 내리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나폴레옹의 제정과 부르봉 왕가의 복위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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