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국민공회가 로베스피에르의 엄격한 권위에 따라 1793~1794년에 세운 자코뱅적 전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 P418
산악파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철저한 민주적 공화국의 건설을 명확히 자각하여 중요한 3대 목표를 내세웠는데, 그 3대 목표란 조국의 방위와 혁명의 수호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 - P418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저마다 소생산자인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자코뱅의 신념이었다.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초를 인식하는 점에서만큼은 자코뱅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 P421
자코뱅의 평등주의는 소유의 평등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를 세우기 위해 무산 시민을 없애고 소토지 생산자층을 형성하려는 평등주의였다. - P422
그러나 테르미도르파는 군주주의를 반대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도 반대하였다. 테르미도르파의 공화국은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었으나 민주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세운 정책은 상퀼로트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물리치는 동시에 왕당파의 왕정복고도 거부하면서 부르주아적 규범 안에서 혁명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 P421
말을 바꾸면, 테르미도르파의 이상은 국왕 없는 입헌군주주의였다. 이 모순을 해결할 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보나파르티슴이었다. - P455
팡테옹 클럽에는 공화 3년 헌법을 비난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을 후회하고 1793년 헌법의 부활을 주장하는 좌익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끌고 또 총재정부가 가장 무서워한 그룹은 그라쿠스 바뵈프를 중심으로 하는 과격한 평등주의자들이었다. 바뵈프는 일찍이 1795년 11월에 기관지인 《인민 논단Le Tribun du peuple》에서 ‘프랑스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제하에,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그것은 특권층과 민중,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전쟁이다. …… 민주주의란 넉넉히 소유한 자들이 넉넉지 못한 자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의무이다. …… 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관리 제도를 세워 사유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재능을 자기 직업에서 발휘하게 하고, 거기서 나온 생산물을 공동으로 보관하게 하고, 분배를 공동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 P468
그 헌법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를 수립하여 지배를 강화한 것으로서 상퀼로트에 기반을 둔 1789년 헌법의 민주주의 정신을 짓밟고 거꾸로 1789년 혁명의 부르주아적 전통에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1789년의 혁명 이념은 공화주의가 아니라 입헌군주주의였다. 그런데 공화 3년에는 군주가 목이 잘려 없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부득이 군주 없는 입헌군주주의 헌법으로 돌아간 것이 바로 공화 3년 헌법이었다. 공화 3년 헌법은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의 모순된 헌법이었다. 왕당파와 자코뱅파가 선거 때마다 진출하여 그 헌법을 위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동시에 헌법을 지키기 위하여 쿠데타가 연발한 이유도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총재정부의 사회적 기반은 부르주아지와 함께 국유재산의 구입으로 토지 소유자가 된 농민이었는데, 이 농민층은 자기들의 새 소유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는 앙시앵레짐의 부활을 극도로 두려워하였다. 요컨대 혁명으로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할 때 농민은 앙시앵레짐을 타도한 부르주아지와 이익의 일치를 발견한 것이다. 농민층이 총재정부의 온건한 중도적 공화주의를 지지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총재정부가 바뵈프의 ‘평등주의자의 음모’의 위협을 받자 1796년 4월 "왕정의 재건이나 1793년 헌법의 재건을 선동하거나 …… 농지법의 이름 밑에 사유재산의 약탈과 분배를 선동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린 것은 이들 총재정부의 본질에 완전히 적합한 것이었다. - P482
총재정부의 본질이 그러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익과 좌익의 공격 앞에 비틀거리면서 해마다 쿠데타 방식으로밖에는 헌법을 유지할 수 없었을 때, 이들을 지지하는 사회적 기반이었던 부르주아지와 농민은 초초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제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더 과격하지 않고 더 강력한 정부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 P471
프레리알 쿠데타는 쿠데타라기보다는 일종의 의회 혁명으로서 전해에 일어난 플로레알 쿠데타의 우경화에 대한 보복이었다. - P472
헌법! 그것은 바로 당신들의 손에 의해 파기되지 않았소. 프뤽티도르 18일에, 그리고 플로레알 22일에 그리고 또 프레리알 30일에 헌법은 침범되었소. 헌법을 존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들에게 헌법을 말하는 바로 저 사람도 헌법이 파기되고 찢어져 없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 P471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 P476
1799년 11월 9일 쿠데타가 일어났고, 12월 25일 나폴레옹을 통령으로 하는 통령정부가 창설되었다. - P474
나폴레옹 전쟁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전쟁론Vom Kriege》을 저술한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였다. 권력을 유지하지 위하여 정치로 안 되면 전쟁을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권력은 나의 명예에 유래하고 나의 명예는 나의 전승에 유래한다. 그러므로 나의 권력은 그 기반으로서의 새로운 명예와 새로운 전승을 계속하지 않으면 무너지리라. 정복이 나의 현재를 만들었고 정복만이 이 현재를 유지할 수 있다. - P488
그리하여 평화조약의 정식 조인은 6개월이 지난 뒤 1802년 3월 25일에 겨우 실현되었다. 이것이 아미앵 조약이다. 이 조약은 프랑스에 유리하였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왕자가 되었다. - P498
이 재산 문제를 종교 협약에서 해결하겠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첫째 동기였다. 둘째 동기는 현 체제를 부장하는 망명 귀족과 국내의 가톨릭 신도를 떼어놓으려는 것이었다. - P502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 P518
나폴레옹의 제위는 이중으로 성별되었다. 하나는 국민투표의 인민의 소리vox populi에 의하여 또 하나는 종교의식의 신의 소리vox Dei에 의하여. 피우스 7세가 나폴레옹에게 걸었던 기대는 하나밖에 실현된 것이 없었다. 그것은 혁명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다시 사용한 것이었다. 1806년 1월 1일부터 옛 역서가 다시 사용되었다. 이는 혁명의 종결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P520
그 사회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봉건제도와 함께 봉건귀족의 권력 및 소유관계를 전복한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제도와 함께 시민계급의 권력 및 소유 관계를 수립하였다. - P528
그러기에 나폴레옹의 역사적 필연성은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의 종결과 완성에 있었다. 브뤼메르 쿠데타 직후 "혁명은 그 당초의 원칙에 고정된다.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총재정부의 선언은 그 쿠데타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였다. - P529
민법을 종교적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혁명의 원리를 방어하고, 신분의 세습을 금지하고 상속과 소유에 관한 혁명적 입법의 일반적 원리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민법전은 가족 관계에서 가장의 우월적 지위와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규정하여 보나파르티슴의 권위주의적 색체를 반영하였다. - P532
요컨대 혁명 입법에 비하면 반동적이고 앙시앵레짐의 법률에 비하면 혁명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 민법보다도 가장 진보적이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가는 곳마다 민법이 미친 혁명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비단 유럽만이 아니라 민법전은 근대 세계의 모든 나라에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정치적 이념을 전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민법전은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가히 보편적·세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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