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라는 말은 당신이 꿈만 꾸다가 생을 마감하게 할 병이다. 찬반양론 리스트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또한 나쁘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중요하고, ‘결국’에는 그 일을 원한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라. 단, 중간에 방향을 수정하도록!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53932

약점을 고치려고 애쓰느니, 당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를 더 잘 활용하는 쪽에 초점을 맞춰라.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53932 - P63

상대적 소득은 두 가지 변수를 이용한다. 바로 돈과 시간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53932 - P67

절대 소득 총액이 (누구네 집과 비교하는 식의 임의적 관점이 아닌) 내 꿈대로 사는 데 필요한 만큼 있다고 가정할 때, 상대적 소득은 뉴리치에게 진정한 부의 척도가 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53932 - P68

‘건강한’이란 뜻의 그리스어 접두사 ‘Eu’가 쾌감euphoria이란 단어에서와 마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추동하는 역할 모델들, 허리 군살을 없애기 위해 체력 단련을 하거나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두 긍정적 스트레스, 즉 유익한 스트레스이자 성장을 위한 자극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53932 - P70

뉴리치는 부정적 스트레스를 없애고 긍정적 스트레스를 찾는 데 똑같이 적극적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53932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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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의 공화주의 혁명의 전통은 이제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코뱅파와 바뵈프의 혁명적 전통은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나자 파리 코뮌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은 마치 1848년 혁명이 6월폭동을 일으켰던 것과 흡사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22

여기서 1871년 9월의 혁명은 1792년과 1848년을 연상케 하였다. 특히 독일과 치른 전쟁은 1792년을 방불케 했는데, 임시 국방정부의 다음과 같은 첫 선언은 1792년을 그대로 연상케 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22

1870년 9월에 구성된 임시 국방정부는 1792년의 공화국처럼 과격하지도 않았고 1848년의 공화국처럼 분열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새 정부는 출발부터 대체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24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는 자치 조직으로서 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넘어서서 정치적 힘을 발휘하였다. 이 기이한 조직체는 그 역사적 정당성을 프랑스 혁명 시대의 파리 코뮌에 뿌리박고, 국가란 코뮌의 연합체에 불과하다는 이론에 뒷받침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조국을 방위하려는 민중의 애국심이 국토 방위에 불성실한 정부를 넘어서서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중 의지의 표현으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87

이러한 권력 구조였기 때문에 결국 코뮌 집행위원회는 1793년의 국민공회가 반란 코뮌의 간섭을 받았던 것처럼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간섭을 받게 된다. 1793년의 반란 코뮌의 기능을 1871년에는 ‘방위대 중앙위원회’가 맡게 된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00

근년에 와서는 루즈리Jacques Rougerie가 제기한 바와 같이 파리 코뮌을 상퀼로트적 성격을 띤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의 종장終場으로 보느냐, 아니면 파리 코뮌 직후 이래 마르크스에 의해 주장되어 온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느냐 하는 논쟁이 일고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7

톰슨David Thomson도 파리 코뮌을 장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모범이라고 추켜올린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역사적으로 볼 때 파리 코뮌은 장차 이루어질 행동의 희망 섞인 모델로서 간주될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낡은 전통이 갖고 있던 일종의 절망적인 클라이맥스로 간주될 때에만 의의가 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시발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종말이었다고 확언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8

그는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그해 봄 거의 동시에 지방 대도시에서 일어난 코뮌들은 1789년 이래로 이어져 온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이 양산한 착잡한 분규들을 뒤돌아볼 때 이들을 매듭짓는 과정 중 최대의 것으로서, 그 후부터 프랑스는 혁명적 전통을 돌아볼 때면 코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폭력에 대한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9

이렇게 톰슨은 파리 코뮌을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특정지었던 공화적·혁명적 전통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파리 코뮌의 처절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에 의한 혁명의 기도를 포기하게 하여 평화적 타결과 화해의 길을 열게 했다고 해석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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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이름은 농민과 군인에게는 질서와 영광을 의미하였고, 상공업자에게는 경제적 번영을 의미하였다. 또한 많은 노동자에게는 사회주의와 대혁명의 계승자로 보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56

농민과 대다수 국민에게 공화정이란 무질서와 불안정과 중세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나파르티슴은 질서와 영광과 번영을 의미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57

국민투표란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색인 간접민주주의를 짓밟는 제도로서, 이것은 보나파르티슴의 창작 중 최고의 걸작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68

그러므로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는 비틀거리는 제2공화국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제2공화국의 실험은 심각한 환상으로 끝났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69

그리하여 나폴레옹 3세는 크림 전쟁에 영국과 함께 참전하여 전제주의의 나라 러시아를 항복시키고 1856년에 파리에서 열국 평화회담을 열었다. 유럽 열강이 파리에서 회담을 갖기는 1822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인데, 그때의 프랑스는 떳떳치 못한 위치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당당한 전승 국가의 하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79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이탈리아 통일 왕국의 탄생은 나폴레옹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통일은 따지고 보면 그의 실책에 의해 촉진된 것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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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flets
At dusk they pour from the sky. They blow across the ramparts, turn cartwheels over rooftops, flutter into the ravines between houses. Entire streets swirl with them, flashing white against the cobbles. Urgent message to the inhabitants of this town, they say. Depart immediately to open country.
The tide climbs. The moon hangs small and yellow and gibbous.
On the rooftops of beachfront hotels to the east, and in the gardens behind them, a half-dozen American artillery units drop incendiary rounds into the mouths of mortars. -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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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인 시그프리드André Siegfried는 프랑스 문화의 특성을 삼중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문화는 대서양적인 것과 대륙적인 것과 지중해적인 것이 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다. - P639

프랑스 사람이나 프랑스 국민은 있어도 프랑스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부와 동부의 주민은 게르만족이고 서부와 중앙 고원 지방의 주민은 켈트족이며 남부의 주민은 지중해인 즉 라틴족이다. - P640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한 부르주아는 가톨릭의 울트라몬타니즘에 반대하고 교육과 결혼 문제를 가톨릭교회가 관장하려는 교권주의Clericalisme에 반대하였다. 교권주의는 교육과 결혼, 이혼 문제를 국가가 관장하는 세속화laïcisation에 반대하고 교회가 그것들을 도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P650

교권주의와 반교권주의Anti−Clericalisme의 싸움은, 위에서 말한 가톨릭교 안에서 일어난 울트라몬타니즘과 갈리카니슴의 싸움과 함께, 정치적·사상적으로 19세기 프랑스의 특이한 역사를 장식하게 될 것이었다. - P650

파리 조약은 프랑스의 국경을 혁명이 일어난 1789년 당시의 것으로 환원하였다. - P664

그 헌장은,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 재능에 따르는 취업의 자유, 재산에 비례하는 납세, 관권의 자의적인 억압과 체포로부터의 자유, 종교와 출판 및 언론의 자유, 소유권의 불가침성 등을 보장하였다. - P665

왜냐하면 유럽 정치 문화의 전통에서는 외국인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듯이 영국 왕실은 독일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George I에서 시작했고, 영국의 명예혁명에 의해 군림한 오렌지 공 윌리엄 3세William Ⅲ of Orange는 네덜란드 사람이다. 조지 1세나 윌리엄은 영어를 모르는 완전한 외국인으로서 국민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했지만 곧 쉽게 친근해질 수 있었다. - P673

나폴레옹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는 웰링턴 휘하의 영국군 9만 6,000명과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휘하의 프로이센군 12만을 먼저 치기로 하였다. 그는 6월 6일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참패였다. 그는 두 빈 손을 내밀며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고 소리질렀다. - P685

유배지에서 나폴레옹과 생활을 함께한 역사가 라스 카즈Emmanuel de Las Cases와 구르고Gaspard Gourgaud 장군 및 몽톨롱Charles Tristan de Montholon 장군이 남긴 나폴레옹 전기들은, 1815년 이후의 반동 체제에 대한 반발과 낭만주의의 안개 속에서 문학적인 나폴레옹 전설을 프랑스 국민에게 심어주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죽지 않고 프랑스에 살아남았다. 약 100만의 생명을 군신에게 바친 나폴레옹에게 19세기의 프랑스인은 증오의 비碑를 세우지 않았다. - P687

그의 조카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이념Des ideés napoléoniennes》(1839)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백부의 정치 이념만이 프랑스를 구제할 수 있다고 선전하더니, 드디어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고 이어 제2제국의 황제가 되어, 전설적인 나폴레옹의 구현자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나파르티슴은 프랑스의 19세기 역사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 P688

복고 왕정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프랑스 혁명을 승인하는 오를레앙 공을 새 왕으로 추대하는 7월혁명은 별 저항 없이 쉽게 성공하였다. 새 왕은 부르봉의 왕들과는 달리 "신의 은총에 의한 프랑스 왕 필리프 7세"가 아니라 "신의 은총과 국민의 의사에 의한 프랑스 국민의 왕 루이 필리프"였다. 필리프 7세가 아닌 루이 필리프라는 왕호는 그의 7월왕정이 자유주의적·시민적 왕국임을 분명히 말해 준 것이었다. 새 왕은 바로 국민의 왕이었다. 새 왕은 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자로 추대된 것이다. 주권은 왕에게 있지 않고 국민에게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67

7월왕정이 삼색기를 국기로 제정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색기는 어떠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도 계속 프랑스 국기로 남아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68

사실 7월혁명은 부르주아가 내세운 민권 사상의 승리였으며,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통하여 이미 수립된 바 있었던 부르주아의 정치적·사회적 우월권이 재확립된 사건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69

어쨌든 7월혁명을 정치혁명에서 그치게 하여 더 큰 변화를 막으려는 저항파parti de la résistance와 계속 더 전진시키려는 운동파parti de mouvement가 7월왕정에서 서로 대결하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73

더구나 7월왕정 시대는 프랑스의 산업 혁명기로서 근대 공업 노동자계급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들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은 부르주아적 7월왕정에 불만을 품게 하고 공화국의 수립을 열망하게 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77

그러나 그는 1846년에 탈옥에 성공하여 영국으로 도망하였다. 1848년 2월에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로 다시 돌아와서 국회의원에 선출되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 3년 후에는 쿠데타에 의해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3세라고 칭하게 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78

이렇게 하여 7월왕정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정치적·이념적으로 최소한 네 줄기가 뚜렷한 형태로 각축하기 시작하였다. 극우의 정통주의, 극좌에 공화주의, 그 중간에 입헌군주주의로서의 오를레앙주의, 그리고 현대 프랑스에 특이한 보나파르티슴. 이 넷은 1789년에 시작하여 나폴레옹이 실각할 때까지 이미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일이 있었고, 프랑스 국민이 실컷 경험한 바였다. 그런데 프랑스 국민은 이제 1815년 이래 대혁명의 경험을 한 바퀴 더 되풀이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79

어떤 정치조직도 불신하는 프랑스 특유의 생디칼리슴Syndicalisme이라는 노동운동의 씨앗이 이때 배태하기 시작한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85

파리 폭동의 진압을 ‘트랑스노냉 가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이 학살은 1848년 6월 폭동과 1871년 파리 코뮌의 선례가 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87

그러나 토크빌Alexis Tocqueville은 기조 시대의 프랑스 정치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주주들이 활동하는 주식회사 같다고 평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695

무릇 산업혁명은 산업자본주의를 급속히 발전시키고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은 산업자본가 계급을 크게 성장시키는 동시에 근대 공업 노동자계급을 급속히 만들어내는 법이었다. 이 산업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그리고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새로 창조된 부의 불평등한 분배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00

미슐레Jules Michelet 《민중Le peuple》과 《프랑스 혁명사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라마르틴의 《지롱드당의 역사Histoire des Girondins》를 비롯하여 루이 블랑의 열두 권짜리 《프랑스 혁명사》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06

7월혁명에 의하여 양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2월혁명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다. 두 혁명은 사흘 동안의 시위와 소규모 시가전에 의해 민중의 힘으로 혁명을 실현한 점에서 외관상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혁명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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