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로 덕분에 고갱은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133 - P242

고갱은 태생부터 태초의 자연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때의 황홀함을 잊지 못해 5년 동안 배를 타고 원시의 자연이 있는 지구 곳곳으로 간 그였죠.
결국 고갱은 본능적으로 예술을 부여잡았고, 이내 ‘원시와 야생’을 자기 예술의 근원으로 삼기에 이른 것입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133 - P254

1905년, 마티스는 자기 부인의 얼굴을 살색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빨주노초파남보’를 치덕치덕 바른 〈모자를 쓴 여인〉이라는 작품을 전시에 내놓죠. 이건 사람이 아닌 ‘야수’를 그린 거라는 어느 비평가의 조롱은 그대로 ‘야수파’라는 화파의 명칭이 됩니다.
256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133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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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지 공간을 사랑했다. 격자들로부터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을 배웠다. 이 작고도 결속력 있는 공동체, 대를 이어 전승되는 신화들, 정교한 자연의 이치, 그리고 세계의 놀라운 구조에 관해서. 격자 사이를 걸을 때 나의 영혼은 충만했다. 내가 평생 알았던 모든 것과 앞으로 알게 될 모든 것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떠나야 했다.

-알라딘 eBook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중에서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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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영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산업혁명을 수행하여 인류를 근대적 경제 성장의 길로 이끌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62

즉 자발적인 지적 탐구와 과학적인 검증 방식의 발전 등에서 영국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이런 전통은 개신교 신앙과 경험주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특히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일찍이 17세기에 과학이 추상적이 아니라 실용적이어야 하고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설파했고, 영국인들은 베이컨의 생각을 좇아 과학과 기술의 융합에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산업혁명을 수행해낼 수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63

영국인들이 원한 세상은 모든 물자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자유무역의 세계였다. 그들은 자유무역이 영국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혜택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고 그 원칙을 전 세계에 퍼뜨리려 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64

결정적인 첫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만 2,000년 전에 인류가 수렵과 채집 생활을 버리고 농경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65

인류의 경제사적 삶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이 바로 산업혁명이다. 1770년경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근대적 경제 성장을 가져다주면서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65

산업혁명 전에 인류는 ‘맬서스적 악순환’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영국 국교회 목사인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는 1798년에 출간된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반해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유명한 원칙을 발표했다. 달리 표현하면 인구와 경제는 동시에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66

산업혁명의 본질은 인간의 기술과 노동력을 대체한, 빠르고 규칙적이며 정확하고 지칠 줄 모르는 기계에 무생물 동력을 붙여줌으로써 생산성의 무한정한 향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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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회가 존재하고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들이 본성상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30

스미스는 그 유명한 저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1776)에서 정치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경제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즉 노동의 분업을 통해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증대된 효율성으로 산출한 더 많은 재화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사람들은 각자 더 많은 부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국가가 할 일은 거의 없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32

이러한 ‘의도치 않은 결과’의 법칙이야말로 스미스 이론의 핵심이며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경쟁을 통해 개인의 이윤 동기를 공공선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시장이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자기 규제적 메커니즘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34

물론 국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국가의 개입을 유도하는 정치 철학도 존재했다. 특히 공리주의 내지 벤담주의로 알려진 일련의 사상들은 자유방임과는 명백히 다른 종류에 속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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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은 트라팔가르 전투 직전에 신호로 그의 함대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넬슨은 모든 병사가 의무를 다할 것을 믿는다Nelson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신호를 보낼 것을 명했다.
부하 지휘관 가운데 누군가가 ‘넬슨’ 대신 ‘영국’을 제안하자 넬슨이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신호 담당자는 ‘confides’가 시그널 어휘록에 없어서 스펠링을 일일이 적어야 한다며 대신 ‘expects’는 목록에 있음을 알렸다.
그 결과 ‘영국은 모든 병사가 각자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유명한 메시지가 탄생했다.
수십 척의 전함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이 신호를 듣는 순간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0

트라팔가르 해전 후 영국 해군의 우위가 도전받지 않았다면 나폴레옹 역시 유럽 대륙에서 도전받지 않는 지배력을 즐겼다.
‘고래와 코끼리는 서로 맞붙어 싸우기가 어렵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었다.
해군력만으로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확실했다.
나폴레옹을 격파하려면 해양 전략을 대륙 전략과 혼합할 필요가 있었고, 나폴레옹의 운명이 판결나기까지 그 후 10년이 더 걸렸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영국이 온 세상의 바다를 제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폴레옹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2

프랑스혁명 전쟁과 나폴레옹전쟁은 영국이 해상력을 장악하기 위해 성장하면서 마주쳐야 했던 가장 큰 시련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3

몽테스키외는 영국인들이 "자유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고 그 나라의 법체계와 관습은 개인의 자유에 이롭게 작용한다고 관찰하면서 "법으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 성공한 영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민"이라고 감탄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7

볼테르는 영국의 자유와 부와 권력의 상호 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즉 무역은 영국인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그들의 부는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며, 그렇게 얻은 자유는 그들의 상업을 확대시키고, 무역으로 번 돈으로 해군력을 강화시키면 그 해군력을 기반으로 영국은 다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국가의 위신을 드높인다고 관찰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8

사실상 잉글랜드의 왕권은 앵글로색슨의 전사들 무리와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5세기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섬을 침략해 들어온 앵글로색슨 부족들은 9세기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군웅할거의 양상을 띠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99

1,000년에 걸친 로마와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지배는 ‘분산된 지배’라는 구조를 낳았고 수많은 내부 전쟁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0

왕권은 바이킹의 침략을 물리치고 웨식스 왕가를 강화시켜 잉글랜드 통일의 초석을 놓은 알프레드 대왕(재위 877∼891) 시기에 잠시 강화되었지만, 곧 다시 약화되었다.
두 번째 바이킹족의 지배가 끝나고 웨식스 가문의 에드워드 고해왕이 즉위했을 때(1042) 그의 즉위를 도운 유력한 귀족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왕권은 다시 약화되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앵글로색슨 국가의 마지막 왕인 에드워드 고해왕이 죽은 후 브리튼섬을 침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연 윌리엄의 치세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윌리엄은 ‘정복왕’이라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왕권의 약화에 적잖이 기여했다.
윌리엄을 도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그에게서 봉토를 받은 노르만 기사들은 아마 2,000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소수 이민족 지배자가 다수 원주민들을 통치해야 하는 상황이 야기되었으며, 그 결과 지배자는 바뀌었지만 앵글로색슨의 제도들은 유지되었다.
즉 분권적 통치 제도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1

1201년에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는 존 왕(재위 1199∼1216)에게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해협을 건너지 않겠다고 도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과정들이 모여 그 유명한 대헌장Magna Carta(1215)으로 귀결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5

14세기 초에 이르면 잉글랜드 왕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국가적·지역적 행정을 유력 가문들과 공유한다는 매우 독특한 정치 제도가 만들어졌다. 즉 왕은 국가 엘리트와 통치를 나눠야 한다는 원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7

16세기에 이르면 잉글랜드는 왕국이기보다 마치 오늘날의 국민 국가와 유사한 정치 공동체라는 의식이 나타났다. 즉 왕과 신민들 사이는 일종의 ‘정치 계약’에 의한 관계라는 의식이 생겨났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8

‘계약에 기초한 동등한 사람들의 동맹’으로 표현했다.6 그러한 계약설은 후에 홉스와 로크의 사회 계약설로 연결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9

잉글랜드 왕권을 제약한 요인들 가운데 관습법인 보통법Common Law도 매우 중요하다.
유럽 대륙과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보통법 체제가 발달했는데 그것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구습에서 유래했다.
12∼13세기에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법이 부활하여 기존 관습법을 국왕의 사법권으로 대체하면서 절대 왕정의 수립을 돕고 신민들이 누리던 관습적 권리들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잉글랜드에는 이미 11세기에 보통법 체제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법과 무관한 색슨 시대의 관습법이 유지되었다.
특히 보통법은 신민의 재산권을 보호해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09

1640년대 영국혁명 시기에 보통법은 소유권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왕의 자의적 통치로부터 신민들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1

로크는 자유를 자신에게 허용된 법의 한도 안에서 자기 자신, 행위, 소유물, 그리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관리할 자유로 정의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1

인간이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고 스스로를 정부 아래 두는 가장 중요하고 주된 목적은 ‘사유 재산의 보호’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잉글랜드를 자유의 땅으로 만든 데 기여한 요인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고려할 것은 개신교 신앙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2

그랬던 헨리가 왕비와의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이유로 교회를 로마로부터 분리하여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세우게 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2

로마를 설득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헨리는 결국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자신이 수장인 국교회를 만들어 로마의 허락 없이 이혼하는 길을 택했다.
대륙의 여러 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연루되어 있던 왕에게 교회와 수도원 소유의 막대한 재산도 매력적이었다.
그런 연유로 잉글랜드는 1534년에 개신교 국가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그것이 잉글랜드를 자유의 땅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3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는 종교개혁을 자유로운 인간 정신이 이뤄낸 ‘위대한 도약’이며 인간의 사유를 해방시킨 ‘쾌거’로 정의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4

이처럼 왕권이 일찍부터 제한받게 되자 직접적 결과물로 의회가 발달했다.
영국 의회는 ‘모든 의회의 어머니Mother of all the parliaments’로 불린다.
그 별칭이 말해주듯 의회 제도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먼저 발달했다.
의회의 전신인 정기 자문 회의는 앵글로색슨 시대의 유물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게르만 부족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 전통이 유럽 대륙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렸는 데 반해 섬나라인 잉글랜드에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5

잉글랜드 의회는 원래 왕이 소집한 자문 회의로부터 발달했는데, 13세기 말부터 귀족만이 아니라 평민 대표가 참석하는 회의가 소집되었고, 그 후 귀족원(상원)과 평민원(하원)으로 나뉘면서 오늘날과 흡사한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17

하원의 권력이 크게 강화된 결정적 사건은 1642년에 시작된 영국혁명(혹은 내전)이었다.
세금과 군대 통솔권 문제로 의회와 갈등을 벌이던 찰스 1세가 의회 지도자들 5명을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6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찰스는 항복했고 1649년 1월에 처형되었다.
그때 왕정과 더불어 상원이 폐지되면서 하원이 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겪으며 공화정에 환멸을 느낀 잉글랜드인들이 다시 왕정을 복구시켰을 때(1660) 상원도 다시 살아났고 예전 권력을 회복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0

1688년 잉글랜드에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예혁명으로 불린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0

결국 정파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의회 지도자는 왕을 몰아내고 개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와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빌렘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 합의했다.
윌리엄(빌렘의 잉글랜드식 이름)은 의회의 요청대로 1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는데 공황 상태에 빠진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도주하자 무혈 혁명이 되었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라는 사건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2

윌리엄은 의회가 제시한 여러 조건을 수락하고서야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고 의회는 그 조건들을 다음 해에 권리장전(1689)으로 공포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2

이처럼 명예혁명이 남긴 유산은 ‘의회 주권과 관용’이었고, 이 전통은 그 후 영국 역사에서 한 번도 포기되지 않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3

‘국가 영역의 바깥’을 지칭하는 시민 사회는 개인들의 합이며 개인의 사적 욕구가 교환되고 충돌하는 장을 의미하는데, 방점은 ‘개인’에 있다. 시민 사회는 명예혁명 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유럽 대륙의 국가들이 신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종속을 요구한 데 반해 잉글랜드의 정치 철학은 시민 사회를 인간 삶에서 최상급의 영역으로 높이 평가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5

개인과 시민 사회를 정치적 간섭에서 해방시키려는 이념은 자유주의인데 17세기 말에 로크로부터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1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6

로크의 정치 철학은 정부의 목표는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며 국가보다 사회가 우선이라는 원칙에 서 있다. 즉 국가와 시민 사회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시민 사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의 이 철학이 그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 역사가 실제로 나아간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6

시민 사회의 주인공은 보통 부르주아지라고 말하지만 흥미롭게도 영국의 경우 초기 시민 사회 발달의 주역은 지주층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7

이를 일부 연구자들은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토지와 상업·금융 간에 맺어진 동맹의 매개는 주식회사였다.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는 자신의 돈을 직접 운용할 필요 없이 주식에 투자하고 이윤을 배당받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8

영국의 특성은 대륙에서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토지 귀족화가 아니라 반대로 ‘지주층의 부르주아화’였던 것이다.1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1090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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