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또래의 과묵한 바텐더 아슈인이 영국식 해장술이니 미리 해장하는 셈치고 마시고 가라며 마지막에 꼭 ‘블러디 메리’를 만들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보드카 베이스에 토마토 주스와 타바스코 소스, 우스터 소스, 소금, 후추를 넣는 칵테일, 블러디 메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92

토마토 수프와 클램차우더에 보드카를 섞어놓은 맛인데 심지어 술 위에 가니시로 셀러리 줄기까지 꽂아주다니. 이게 술이면, 색으로 보나 성분으로 보나 블러디 그 자체인 선짓국 국물에 소주를 넣고 배추를 꽂은 후 ‘블러디 영희’라고 이름 붙이면 그것도 술이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93

나중에 더 자주 마신 술은 ‘블러디 마리아’였다. 블러디 메리에서 술 베이스만 보드카에서 테킬라로 바꾼 칵테일. 테킬라를 원체 좋아하기도 하지만, 보드카 대신 멕시코 술인 테킬라가 들어가면서, ‘메리’의 스페인식 발음 ‘마리아’로 이름을 바꿔 붙인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94

첫 밖혼술의 문을 족발집에서 부케와 함께 화려하게 열고 나니 그 이후의 밖혼술들은 한결 문턱이 낮아졌다(그 부케는 밖혼술과의 미래를 축복하는 부케라고 믿고 있다). 어쩌다 퇴근길에 혼자 순댓국집에 들르면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마시는 데 스스럼이 없어졌고, 집 근처에 분식과 술을 같이 파는 흔치 않은 가게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는 가끔씩 들러 김밥에 반주를 곁들이곤 했다(김밥, 특히 꼬마김밥은 만두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안주이기도 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201

그렇다. 여자들이 조금의, 아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법적으로 허용된 공간이라면 그 어디에서든지 밖혼술을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당연히 좋은 세상이다. 밖혼술의 기준에서 세상은 그리 좋아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나빠졌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210

올해의 첫 술자리를 함께한 술친구 JYP—YG 콤비(유명 소속사와는 무관하다)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축구광 닉 혼비의 이름을 따서 ‘김혼비’라는 필명으로 냈으니, 『아무튼, 술』은 그에 맞는 필명을 따로 정해야 한다며 ‘김혼술’을 강력 추천했는데, 혼술 성적표가 저 모양이라 망했다. 하지만 역시 술은 혼자보다 같이 마실 때가 더 좋은 것 같다. 어쩌면 내 마음에는 절이 아니라 주막이 지어져 있을지도.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211

상대에게 술이 작은 독려가 된다면 얼마든지 술을 무한대로 사주고도 싶다. 물론 술 없이도 그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좋겠지만, 세상에는 맨 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말들이라는 게 분명 있는 법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224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술은 제2의 따옴표다. 평소에 따옴표 안에 차마 넣지 못한 말들을 넣을 수 있는 따옴표. 누군가에게는 술로만 열리는 마음과 말들이 따로 있다.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뾰족한 연필심은 뚝 부러져 나가거나 깨어지지만, 뭉툭한 연필심은 끄떡없듯이, 같이 뭉툭해졌을 때에서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말들.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영원히 속에서 맴돌며 나도 상대도 까맣게 태워버릴지 모를 말들. 꺼내놓고 보면 별것 아닌데 혼자 가슴에 품어서 괜한 몸집을 불리는 말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227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고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나의 오랜 술친구들과 미래의 술친구들과 오래오래 술 마시면서 살고 싶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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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해, 달, 별 말고 또 다른 종류의 천체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들을 ‘떠돌아다니는 별‘이라는 뜻에서 통틀어 행성行星, planet이라고불렀다.
행성은 떠돌이 삶을 영위하던 유목민들에게는 특별한 정감과친근감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행성이라고 알고 있던 것은 모두 일곱 개였지만, 해와 달을 제외하면 다섯이 남는다.
행성들은우리에게 멀리 있는 별들이 이루는 고정된 별자리를 배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달에 걸쳐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관찰해 보면이 별자리에 들어 있던 행성이 저 별자리로 이동하고 가끔은 느릿느릿
‘공중제비‘를 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늘의 여러 천체들이 모두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겼다.
해와 달은 물론별 또한 계절의 오고 감을 알려주지 않는가?
그렇다면 행성들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점성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P112

천문학은 과학이고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는 학문이다.
점성술은 사이비 과학으로 확고한 근거 없이 여러 행성이 인간의 삶을지배한다고 주장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딱히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둘은 확실하게 서로 갈라섰다. - P119

천문학자로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이룩한 업적을 열거하면 다음과같다.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 줬고 그들의 밝기를 기록하여 목록을 만들었고 지구가 왜 구형인지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했으며 일식이나 월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아마도 행성들의 이상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의 모형을 제시한 것이리라. 그는 행성 운동의 모형을 개발하여 하늘의 신호를 해독하고자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하늘을 연구하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음에틀림없다. 그는 그것을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 라는기록으로 표현해 놓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땅은 안정되어 있고 단단하고 고정적인 데 반하여그 외의 천체들은 매일같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지구 중심 우주관이 하나의 보편타당한 자연 진리로 서슴없이 받아들여졌다. 이 시점에서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가 남겼다는 기록을 다시 읽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 P120

당시 사람들은 하늘의 구조와 원리를 지구상의 그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상상했기 때문에 하늘을 철저히 관측할 의지가 생길 턱이 없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은 중세의 암흑시대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그로부터1,000년 동안 천문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마침내 1543년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였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holaus Copernicus가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는 아주 색다른 가설을내놓았다. 그 가설의 가장 대담한 제안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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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섞어도 통 ‘그 맛’이 안 나던 떡볶이의 간을 단박에 맞췄던 라면수프처럼, 욕 한 방이 지금 오고가는 대화의 간을 딱 맞출 게 분명한 순간이. 말하자면 씨발의 스팟.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49

힘겨울 것 같았던 밤이 조금 든든해졌다. 자양강장에 좋다는 칡주(feat. Y)가 있으니까. 칡 냄새에 마시면 좋을 청하(feat. P)까지 있으니까. 너희들이 있으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0

취기가 작은 눈금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게 아니라 육상선수처럼 성큼성큼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취기를 앞서기 위해 거의 뛰듯이 걸었지만 몸집이 커진 취기란 늘 인간보다 빨라서 광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쯤에는 결국 나를 앞질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8

저 멀리 집이 보였다. 누군가 몇백 미터 떨어진 집까지 걸어가는 나의 모습을 봤다면, 인류의 진화 과정을 역으로 구현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8

하지만 우주적 모멘트는 나의 형질을 유인원에서 마침내 네발짐승으로 바꾸어놓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70

이문재 시인이 「바닥」이라는 시에서 그랬지.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지구의 정수리와 나의 정수리가 맞부딪치는 우주적 모멘트였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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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건 바로 내가 술집에 들어갈 때마다 겪는 딜레마다.
특히 음주를 시작하기 애매하디애매한 함정 같은 시간에.
환희의 극치일까, 고통의 극치일까.
가는 기차는 천국행이고 돌아오는 기차는 지옥행일 이상한 왕복 기차권을 끊을지 말지, 그냥 얌전히(?) 걸을지 오늘도 목하 고민 중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4

가을이 와버렸다. 1년 중 가장 술맛이 도는 계절. 퇴근길마다 부는 선선한 바람과 걷기 좋은 날씨가 발걸음을 번번이 술집으로 이끄는 계절. 그래서 요즘 매일 퇴근길마다 싸운다. 아쉬탕가 요가를 하러 갈까 vs 술을 마시러 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6

지난주는 요가의 완패이자 나의 완패였다. 전어회가 제철이라, 막장과 마늘을 살짝 올린 기름진 전어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아버지가 담가준 김치가 막판이라, T가 신김치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스팸과 집에 있는 모든 야채를 다 넣고 볶은 뒤 흰자는 튀기듯이 바삭하게 노른자는 톡 치면 흘러내리게 익힌 달걀프라이를 얹어 내온 김치볶음밥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으슬으슬한 게 오뎅 바가 제격이라, 무가 적당히 우려진 국물에 담겨 푹 익기 직전의 오뎅 꼬치를 쏙쏙 빼어 먹으며 온사케를 마시느라고, 외근이 끝나니 광장시장 근처라, 빈대떡과 고기완자에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두 번째 시킬 때 넉넉히 담아 주셔서 아직도 많이 남은 큼직큼직 썬 양파를 툭툭 넣은 간장만으로 막걸리 한 병을 더 비우느라고, 금요일이라, 매주 듣는 강의가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자카야에 들어가 내가 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인 바삭한 굴튀김과 어떻게 해 먹어도 기본은 가는 가라아게에 하이볼을 마시느라고.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7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38

적절한 순간에 찰진 욕을 구사하는 여자들을 향한 동경이 있다. 살다 보면 가끔 욕이 아닌 다른 언어로는 설명할 수도, 그 느낌을 살릴 수도 없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 누군가 던지는 찰기 도는 다부진 욕 한 방이 가져오는 카타르시스는 화려하고 청량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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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했고,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사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건, 이미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을 유머의 소재로 고르는지 혹은 고르지 않는지(후자가 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걸 그려내는 방식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무엇인지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9

그 사람이 집 안에 숨겨두거나 남겨둔 모습 말고 그가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선별한 모습, 딱 그만큼까지만 알고 대면하고 싶은데, 집 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개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 나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04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 치기 어린 상태가 아니면 모험할 엄두를 못 내는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18

그래서 우리는 재작년부터 ①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④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이라는 규칙을 정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2

영화 속에서 외계인의 언어, 시제에 얽매이지 않는 원형적인 ‘헵타포드어’를 이해하고 나자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게 된 루이스 뱅크스 박사처럼, 갑자기 내 눈앞으로도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져 나타났다. 이 비슷한 시각에 딱 한 시간만 먹자고 술집에 들어갔다가 새벽 서너 시까지 신나서 술을 마시고는 울다시피 출근했다가 기다시피 퇴근해서 기절하는 우리의 많은 과거들과 미래가 생생하게 보였다. 술이란 건 참 시도 때도 없이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마시고 싶다는 점에서나,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6

그러자 정신이 맑아지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걷는 것이다. 집까지. 여기서부터 집까지는 지하철역 두 정거장 거리. 조금 아쉽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걷기는 많은 것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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