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돼지를 탐욕스럽고 더러운 동물로 여긴다. 이것은 네 번째 이상한 점과 맞물린다. 우리는 돼지를 먹고 돼지가 우리 몸의 일부가 되는데도 돼지를 멸시하고 혐오한다. 더럽고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돼지 같은 놈"이라고 욕한다. 실제로 돼지가 탐욕스럽고, 더러운 동물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돼지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더럽다고 욕하는 인간의 속성이 참 모순되게 느껴졌다. 돼지가 굉장히 다층적이고 희한한 동물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돼지가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점점 돼지를 주인공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38
한국에서 사육되는 1,000만 마리의 돼지들 중 두 돼지의 삶을 따라가보기로 한다. 공장식 양돈농장에서 태어난 아기 돼지와 소규모 친환경농장에서 태어난 아기 돼지. 이름 없이 ‘번호’만 있던 이들에게 각각 ‘돈오’와 ‘돈수’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42
돼지의 이름을 뭐라고 붙일까 고민하다가 ‘돈오’, ‘돈수’라는 이름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불교에서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물론 ‘돼지 돈豚’의 발음을 살린 이름이기도 하다.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변화한다는데, 깨달음의 화신化身처럼 갑작스럽게 내 인생에 나타나 화두를 던진 돼지.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43
돈수가 태어난 날 원중연 선생님은 일기를 쓰셨다.
돼지 영화를 촬영했다. 십순이가 여덟 마리 새끼를 순산했다. 기다림은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끝자락이 아름다운 것은 그 끝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눈이 온다. 모두를 축복하는 눈인가 보다. 내 안에서 또다시 발견된 십순이. 순산 과정에서 함께 얻은 희열. 태고부터 날마다 일상처럼 빚어지는 일들이 영혼과 순간, 그 모두를 아우른다. 어느 먼 훗날 오늘을 되짚어볼 때 기다림도 경이로움도 모두 내게 감동일 것이다.
가을날 국화꽃이 동토를 가르며 시작했듯 산고의 아픔을 통해 또다시 이어지고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나와 돼지의 인연이었으리라.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76
가톨릭 신자들의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모습도 떠올랐다. 어찌 감히 돼지를 성모마리아에 비하느냐고 하겠지만, 성녀와 인간 엄마와 돼지 엄마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생명의 힘, 사랑의 힘이다. 모든 탄생의 순간은 경이롭다. 온 우주가 도와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순간.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귀하며, 동등하다. 누구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점에서. 고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77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이 1794년에 쓴 《동물 생리학, 혹은 생물의 법칙Zoonomia or Laws of Organic Life》을 보면 다음과 같은 관찰 기록이 나온다.
돼지들이 입에 지푸라기를 물고 시끄럽게 울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분명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신호다. 돼지들은 잠자리를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짚을 모으며, 시끄럽게 우는 것은 다른 돼지들을 불러서 함께 잠자리를 더 따뜻하게 하자는 뜻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82
돼지들은 친구와 노는 것을 좋아하고 장난을 좋아하고 주변 환경을 탐색하는 것을 좋아하고 쾌적한 잠자리를 좋아하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좋아한다. 사람과 똑같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96
어린 아들의 부드러운 이마에 입 맞추고 재우며 자장가를 불러주다 보면 돈수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까맣고 순진한 그 눈동자, 쌍꺼풀 진 동그란 눈, 기다란 속눈썹, 보송보송한 털… 사람 아기와 다를 바 없이 사랑스러운 돈수와 돈수의 형제들을 보며 나의 진짜 딜레마가 시작됐다. 더 이상 돼지를 돈가스나 삼겹살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98
"퇴비를 써서 비옥해진 땅에 작물을 기르고, 그렇게 키운 채소에서 나온 부산물을 돼지에게 주고, 돼지가 그걸 먹고 똥을 싸면 또 좋은 퇴비가 생기고. 순환이죠. 좋은 작물 먹고 건강하게 자란 돼지들의 똥이 밭으로 가면 또 거기서 최고의 균형이 맞춰진 무, 배추, 인삼이 나오는 거죠. 자연은 순환이 철칙이에요. 이 순환이 자꾸 단절되어서 문제지."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01
‘가축家畜’의 한자를 보면 ‘家(집 가)’는 지붕 밑에 돼지가 있는 형상이다. 즉, 지붕 밑에 돼지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집이었다. 다시 말하면 집에는 돼지가 있었다. 한자를 쓰는 농경 문화권에서 돼지는 집의 구성원으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畜(짐승 축)’은 ‘밭 전田’ 위에 ‘검을 현玄’을 썼다. 짐승은 퇴비로 밭을 검게, 비옥하게 만드는 존재다. 집에 살면서 밭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동물이 가축인 것이다. 가축은 이렇게 인간과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농경에 이로움을 주는 존재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01
원가자농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유기농 경축순환 농장이다. 경축순환이란, 작물의 부산물을 가축이 먹고 가축의 퇴비를 작물 재배에 이용하는 순환을 말한다. 과거에는 이런 농장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극히 소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02
"똥, 땅은 원래 하나예요. 발음도 비슷하잖아요?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먹어서 똥이 더러워진 것이지, 올바른 음식을 먹으면 똥이 더러울 게 없지요. 똥이 땅으로 가고, 땅에서 난 것이 몸으로 와서 다시 똥이 되는 순환이 이루어지면 땅과 인간 모두 건강할 수 있어요."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03
현대의 모든 재앙은 순환의 깨짐, 단절에서 왔다. 가축의 분뇨는 땅과 강을 오염시키고, 남은 음식은 쓰레기가 되어 골칫거리가 되고, 빗물도 자원으로 순환되지 못하고 하수구로 흘러가버리고, 에너지도 방사능 폐기물을 남기는 핵에너지, 심지어 사람들의 혈관도 콜레스테롤로 막혀 피가 제대로 순환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재앙의 해결은 막힌 곳을 뚫고 끊어진 순환을 연결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04
선생님의 책꽂이에는 가령, ‘돼지를 빨리 살찌우는 법’ 이런 책 대신, 제레미 리프킨의 명저 《육식의 종말》, 실천윤리 철학자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 환경운동가 니콜렛 한 니먼이 쓴 《돼지가 사는 공장Righteous Porkchop》 같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돼지 농장주가 육식을 비판하는 책들을 읽고, 동물 해방 철학서를 읽는다니!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11
가축, 가축이 먹는 사료, 가축이 싸는 똥, 똥이 뿌려지는 땅, 그 땅에서 난 작물, 작물과 가축을 먹는 사람의 건강,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돼 있어요. 사람복지, 동물복지가 다른 게 아니에요. 가축이 좋은 것을 먹고 편안하게 살면 사람복지가 자동으로 되는 거예요. 한 고리예요. 하나가 온전하면 나머지가 온전해지는 거예요. 하나가 그릇되기 때문에 다 사슬처럼 어그러지는 거예요.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17
내 자식, 남의 자식, 사람, 돼지, 흙, 작물, 야생초… 만물이 하나로 연결된 순환의 고리.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귀하게 대하고 모든 것에 친절하라. 땅에서 땀 흘리며 배운 농부의 철학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19
팔리 모왓의 《울지 않는 늑대Never Cry Wolf》 같은 책이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늑대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포악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동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20
서구 문화에서 늑대는 오랜 세월 부당한 박해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화, 전설, 동화, 그림책, 영화에서, 늑대는 인간에게 해로운 잔인한 짐승, 죽여 마땅한 존재로 묘사돼 왔다. 《빨간 모자》,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양》, 《아기 돼지 삼 형제》, 《피터와 늑대》 같은 이야기에서 늑대는 착한 주인공들을 간교하게 속여 괴롭히고 무자비하게 잡아먹는 악당으로 묘사된다. 착한 사람들이 못된 늑대를 잡아 가위로 배를 싹둑싹둑 가르고 돌을 집어넣고 다시 실과 바늘로 배를 꿰매 강물에 풍덩 빠트리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늑대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내재되고 문화로 전승된다. 이런 옛날 이야기들을 뒤집거나 재해석하는 작품들이 최근 많이 나오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22
‘교활한 여우’, ‘미련한 곰’, ‘사악한 뱀’이라는 표현은 정당한가? 종교나 문화에서 전승된 이런 통념은 생태적으로 볼 때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비인간 동물에게 던져 그들에게 ‘누명’을 씌워왔다. 그래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들의 가죽을 벗기거나 잡아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두 번의 죽음을 겪는다. 실제로 죽음과 멸종으로 몰리고, 문화 속에서는 인간을 해치는 포악한 가해자로 곡해됨으로써 또 죽는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24
대중문화에서 탐욕의 상징으로 돼지를 이용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매우 좋아하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부모를 돼지로 변하게 한 상투적 상징에는 실망했다. 그 영화에서 돼지가 된 부모는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는데, 실제 돼지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명예 훼손이다. 지구상의 동물계에서 토할 정도로 먹고 소화제를 먹는 동물은 호모사피엔스라는 종뿐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30
신선한 고라니 똥을 보다가 앨런 와이즈먼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세계 곳곳을 누비며 기술한 저서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이 떠올랐다. 인간이 사라지면 불과 1년 만에 야생동물들이 큰 혜택을 보게 된다. 고압전선에 부딪혀 매년 10억 마리씩 희생되던 새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상아 때문에 죽임을 당하던 코끼리는 인간이 사라지고 100년이 지나면 개체 수가 20배로 늘어난다. 인간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우리의 몸 구석구석을 집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충치균, 포도상구균, 대장균 같은 균들과 인간의 주거 공간에 세 들어 살아온 바퀴벌레들뿐일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36
뛰어난 후각을 가진 돼지가 자신들의 분뇨 위에서 먹고 자고, 신선한 공기 한번 마셔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돼지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너무 가혹했다. 그런 환경에서 온갖 약물을 투여 받으며 억지로 사육된 돼지를 먹는 우리의 삶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해야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의 창밖으로 숱한 고깃집 간판이 번쩍였다. 간판 속에서 요리사 복장을 한 돼지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42
약물과 스톨이라는 강력한 관리 도구를 통해, 이 많은 분만을 직원 몇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명의 몸에 맞게 농장이 운영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목표 생산량에 맞춰 생명의 몸을 통제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426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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