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위대한 원시 예술가들은 고대벽화나 건축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다. 그 예술품들은 모두 신에게 바친 겸허하고 절실한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생겨난 이후 모든 예술품이 상업화되면서부터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어떤 인쇄물도 작가의 허락 없이 작품을 이용할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에 빠지기도 한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21

우리가 체 게바라를, 마이클 잭슨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혀 다른 의미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을 모두 포기하고, 모든 사람들이 배고프지 않고 평등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도전하며 길 위에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 체 게바라는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26

전도서의 이런 구절을 기억하는가? "헛되고 헛되다.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 지금 있었던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것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32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된다. 그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기분이 드는 한겨울, 바람이 분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32

나이가 들면서 몸에 나는 상처라면 몰라도 마음의 상처는 남기지 않으려 한다. 흰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눈이 녹으면 다 사라지듯이 우리 마음의 상처도 그러하기를.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39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가족이 있어도 소통 없이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47

사람들이 바라는 건 결국 사랑이다. 사랑이란 다시 말해 관계의 고정관념이 아니라 누군가의 진심 어린 따뜻한 관심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무도 자살하지 않을지 모른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47

하긴 외롭지 않은 젊음이 어디 있으랴.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의 고독이 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지닌 당연한 감정이라는 걸 깨닫는 과정이다. 나도 너도 세상을 다 불태워도 시원찮을 만큼 외롭던 시절을 거쳐왔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는 이 세상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낮잠을 자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어서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을 뿐임을 젊은 그대는 아는지.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48

하지만 ‘나’라는 섬에서 ‘너’라는 섬으로 가려면 우리는 무엇을 타고 가야 할까? 우리 모두는 다 하나의 작은 섬이다. 그때의 내게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이나 다 고립된 섬이었다. 지독하게 고독했던 젊은 날 우리 모두는 그저 표류하는 섬이었다. 섬과 섬이 만나서 아무리 곁에 있어도 그저 따로따로 섬일 수밖에는 없는 인간 존재의 고독감을 그때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또 있을까?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56

정말 산책하기 참 좋은 별 지구, 그중에서도 덕적도, 그 무심하게 떠나가던 배를 어찌 잊을까. 우리의 삶도 어느 날 저 떠나가는 배처럼 무심하게 떠나가리니. 사랑하라, 무심하고 아쉬워서 더욱 아름다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들을……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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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란 단어는 얼마나 두근거리는 느낌인가. 아니, 사실 어떤 일이든 처음은 두렵다. 생애 처음으로 했던 일들을 생각한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2

그렇게 우리의 모든 감정과 마음 씀씀이는 상황에 따라 매 순간 움직인다. 언젠가 처음 들었던 라디오 광고 중 이런 구절이 기억난다. "옷장 속에 오래도록 입지 않은 옷이 가득 차 있다면 그 옷들은 유행에 뒤진 것들이라는 뜻이다. 버려라."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잘살게 된 걸까? 그때만 해도 처음 듣는 문구 ‘버려라’는 내게 몹시 참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버릴 것이 너무 많다. 준 것보다 훨씬 덜 받았던 것만 같은 관계의 기억, 마음 곳곳에 오랜 먼지처럼 쌓여있는 미움과 분노의 기억부터 털어버리는 거다.

가슴 두근거리던 모든 처음에 건배, 모든 중간에도, 그리하여 드디어 모든 마지막을 위하여 건배. 삶은 누구에게나 작든 크든 그저 의미 있는 여행이며 선물이기를.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5

"덕선아 나 져도 되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바둑기사인 택이가 덕선이에게 하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나 져도 되지?" "나 못해도 되지?" "나 살쪄도 괜찮지?" "나 늙어도 괜찮지?" 사랑, 그건 나의 아픈 곳을 쓸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내가 욕하는 상대를 같이 실컷 욕해주며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말해주는 게 아닐까?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6

햇볕과 공기와 꽃들과 사랑을 주고받았던 사람들과 동물들, 세상의 모든 풍경들과 함께했던 순간들로 행복하다. 내 부모를 부모로 만나 더할 수 없이 행복하다. 내 형제가 세상을 떠났어도 함께했던 기억들로 행복하다. 오늘 같은 겨울날, 늘 오빠 같던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와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만두를 사 먹고 집까지 걸어오던 옛 기억이 행복하다. 세상을 떠난 동생이 캄캄한 하늘의 별로 떠서 내 길을 안내해주는 것 같아 슬프지만 행복하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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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통용되어온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 등의 거창한 이념과 몸짓을 넘어, 아직도 빈곤과 질병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세상에서 나는 감히 ‘산책주의자’라 불리고 싶다. 천재지변 등이 일어나 다른 별로 이사를 가야 한다면, 이 지구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세상의 각기 다른 골목길들을 산책한 일일 것이다. 세상 곳곳의 모르는 골목의 지도는 산책자인 나를 늘 설레게 한다. 조용한 걸음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낯선 세상에 도착한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5

사람과의 만남도, 사랑하던 순간의 기억도 골목길을 산책하는 것과 닮았다. 누구나 내면에 자신만의 골목길을 지닌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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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나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미워할 구실을 찾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3

원치 않는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그런 상황과 왜 마주하게 됐는지 반성하기보다 그 상황을 적으로 만드는 게 더 쉽고 빠른 해결책이니까.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3

어머니를 향한 연민보다 원망이 커질수록 괴로움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나는 기일까지 일부러 무시하면서 어머니를 철저히 잊어버리기 위해 애를 썼다. 기일이 몇 차례 아무 일 없이 흘러간 이후, 어머니는 더 이상 내 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4

내겐 스위스까지 날아갈 비행기 티켓 값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평등하지는 않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36

남 좋은 일만 한 꼴이지만, 저 차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몸속에는 과연 팔아먹을 만한 장기가 있기나 할까. 어쩌면 나는 저 망가진 차보다도 가치 없는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41

1일이 새해 첫날이자 휴일이었으므로 자동이체는 오늘 중에 이뤄질 예정이었다. 사발면이 익는 동안 나는 편의점에 설치된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카센터 사장이 송금한 100만 원을 포함한 잔액을 모두 인출해 지갑에 갈무리했다. 자동이체의 손길을 피해 조금이라도 현금을 많이 챙기는 게 수수료 1,200원을 지불하는 일보다 급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42

고민 해결의 실마리가 돼준 것은 연구실에서 접한 모성애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상당히 많은 여성이 자식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성애 결핍을 느꼈지만, 자식이 자라는 동안에 모성애가 커진 여성도 많았다. 엄마도 사람이니 힘이 들면 스트레스를 받고, 자식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사람마다 인내심에 차이가 있으니, 엄마의 인내심에도 저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인간다움이란 게 경선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성애 결핍을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아이와 함께 유대를 쌓는 시간을 가지면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66

어머니에게도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생의 마지막에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꿈속에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내게 무거운 의문을 남겼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73

가족이 된 AI를 버리기는 어렵다는 경선의 말에 반발심이 일었다. 그렇다면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유민은 왜 주저 없이 나를 버리고 떠났으며, 진짜 가족인 어머니는 왜 그토록 험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다는 말인가.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76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선 디지털 사후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도 훌륭한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씁쓸했다.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AI로라도 다시 만나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아니, 그 이유가 내가 아님을 확인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지구 위를 돌아다닌 이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으므로, 내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나는 살아서 꼭 어머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78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우울하고 경솔했으며, 과격하고 괴팍했다. 또한 소심하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다. 관대하기보다 옹졸했고, 게을렀으며 말이 많았다. 겸손한 성격이었는지 오만한 성격이었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대체로 냉정했지만 온후할 때는 더없이 온후했다. 한쪽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성격은 중립에 놓았다. 설정을 마쳐놓고 보니 내가 어머니를 너무 형편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0

퇴근 후 나는 귀가하자마자 노트북을 펼치고, 내가 아는 어머니에 관한 정보를 출생부터 사망까지 연대순으로 정리해봤다. 1959년생 돼지띠. 태어난 달은 여름인 7월이다. 이제 환갑이 노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세상이니, 어머니는 지금 살아 있어도 할머니보다는 아줌마로 불렸을 것이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3

엄마. 내겐 쓰고 읽을 수는 있으나 부를 수는 없는 단어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5

어머니를 기록하는 과정은 내가 어머니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87

어머니는 며칠 동안 나와 동생에게 세끼 모두 간장에 비빈 밥을 줬다. 반찬은커녕 김치도 없었다. 밥의 양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마가린을 밥에 함께 비벼줬지만, 나중에는 매 끼니 간장만 비빈 밥이 나왔다. 매를 맞을까 두려워 칭얼거리지 못했던 나는 참지 못하고 밥그릇을 엎으며 울었다. 어머니는 내 온몸에 매질하다가 함께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봤다. 놀란 나는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껴안으며 더 큰 소리로 울었다. 그 이후로 간장에 비빈 밥을 먹는 일은 없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98

난 항상 우리 큰아들을 보면 미안하다. 화를 풀 곳이 없어서 큰아들을 너무 많이 때리고 마음고생을 시켰다. 큰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불쌍하고 속상하다. 어렸을 때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21

스무 살 혜진은 세상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던 어린 새였다. 어린 새는 날개를 채 펴기도 전에 붙잡혀 오랜 세월 새장 속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의 자살은 갑작스러운 충동에서 나온 선택도, 누군가를 미워해서 벌인 선택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어머니가 살면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 결정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이었다. 온몸으로 새장과 부딪쳤던 어린 새는 죽음으로써 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25

"지금까지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니까 그래요. 많은 사람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대체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요. 그런데 말이죠, 죽음이 자신과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 달라요. 죽기 전에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조바심을 내요. 낯선 곳을 여행하든, 그동안 못 만난 사람을 만나든, 맛있는 음식을 먹든."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29

서운했다. 내가 아버지 수술 소식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내게 수술 소식을 알려주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걸까. 아버지에게 한마디를 하려다가 내 몸 상태를 알리지 않은 나 또한 아버지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자문하며 입을 닫았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136

나는 지금까지 강가에 서서 흘러내려오는 강물과 이미 흘러내려간 강물만 바라보다가 내 앞에 흐르는 강물을 지나쳐버리는 삶을 살아온 건 아닐까. 강이 수많은 지류와 만나듯, 사람도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나는 나와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세월의 강물에서 느리게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랐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22

"남편이요? 그런 사람 제 옆에서 없어진 지 오래예요."
수연은 오 년 전에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혼 원인은 남편의 외도였다. 처음에는 남편을 용서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남편이 외도를 멈추지 않자 그녀도 더는 참지 않았다.
"그대로 더 참았다가는 평생 마음고생을 하다가 화병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빨리 이혼을 선택했어요. 그런 아빠와 같이 살면 아이 교육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대신 양육비는 꼬박꼬박 받아내고 있어요. 아이와 제게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죠."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18

할미꽃이었다. 아직 봄이 오지도 않았는데 꽃이 피다니. 신기한 마음에 나는 쪼그려 앉아 꽃과 줄기를 덮은 하얀 솜털을 쓰다듬었다. 할미꽃처럼 등이 굽으며 늙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AI로 되살아난 어머니도 나와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나는 문득 오래 살아서 그런 미래가 가능한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꿈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며 내 배를 쓰다듬던 어머니의 손길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랫배가 따뜻해졌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34

"굳이 만나서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살아보니까 미워하는 감정이 남아 있으면 이별해도 이별한 게 아니더라. 이별한 이유를 몰라도 제대로 이별한 게 아니고."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0

역사에 관한 평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듯, 인간관계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정립된다. 과거에 중요했던 관계가 현재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현재 가벼워 보이는 관계가 미래에 돌아보면 인생을 바꾼 중요한 인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정은 과거의 어머니와 제대로 이별하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유민과의 만남이 과거에 매몰돼 오랫동안 허우적거렸던 나를 현재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1

이유를 알 수 없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버스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을 꺼냈다. 버스가 흙먼지를 몰고 오며 멈춰 섰다. 단 한 명의 승객도 없었다. 나는 버스 맨 뒤쪽 운전석 반대 방향 창가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점점 속도를 냈다. 자리가 심하게 덜컹거렸지만,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유민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2

사실 작가 정진영이 이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할 현실의 문제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다. 따지고 보면, 경이로운 기술 혁신의 산물인 작고 편리한 휴대전화기가 일반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여전히 해결이 요원한 문제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섬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화의 단절은 핵가족 시대에도 여전하다. 아니, 더욱 심각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주인공 범우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의 어머니 사이에 영상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한 작품의 구도 역시 바로 이 문제를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47

"사랑해요, 엄마"보다 더 쉬운 말이 어디 있겠냐만, 그 말을 입에 올리기가 우리 시대의 자식들—적어도 소설의 주인공 범우 또래이거나 그보다 나이가 든 세대의 자식들—에게는 어찌 그리도 어려운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지극하지만 공연히 쑥스러워서 그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인간들이 적어도 우리 세대의 자식들이 아닌지? 아니, 어머니의 삶과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이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어머니는 지극히 당연한 현존재(現存在)—즉 과거가 없이 오로지 현재적으로만 ‘나’에게 의미를 갖는 존재—로 여기는 인간들이 우리 시대의 자식들이 아닐지? 범우가 그러하듯, "지금까지" "어머니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눴던 일이 있었던가"를 자문하며 "뒤늦은 후회"를 하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우리 시대의 자식들이 아닐지? 혹시 자식들이란 어느 시대나 다 그런 존재들이 아닐지?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57

엉뚱하게도 나는 그 차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겉보기엔 폼이 나지만, 변속할 때마다 엔진에서 충격음과 함께 쇠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음과 단열도 취약했던 차. 속 빈 강정 같은 모양새가 나를 닮아 쓴웃음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던 차. 장기기증을 앞둔 뇌사자처럼 멀쩡한 부품은 다른 차의 부품으로 쓰인 뒤 폐차될 줄 알았던 차. 그 차가 더 말끔해진 모습으로 되살아나 새 주인을 만나 다시 도로를 달릴 수 있게 됐다. 카센터 사장은 중고차 판매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중요한 부품인 엔진과 미션을 일 년이나 무상 보증을 하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나도 저 차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게 자전거 캐리어를 중고로 팔았던 회원에게 문자메시지로 답했다. -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8942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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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재미없는 건 맞는데,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재욱이 말했을 때 재인과 재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서사람은 각자 자기가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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