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라며 문을 열어 주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좁은 케이지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배식하는 기계에게 온기를 느끼겠다고 몸을 부비는 아이들을 보며 이 행성에서 인간이 사라졌으면 하고 얼마나 많이 바랐던가. 지독히도 인간 중심적인 이 행성에서 동물들은 변화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보호받지 못하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자유를 주다니. 복희는 그것 역시도 착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겼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57
보경 때도 그랬지만 요즘 애들이야말로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 관계는 깔끔하게 쳐내는 기지를 잘 발휘하지 않던가. 누군가는 경쟁시대에 익숙해져 유대를 잃어버렸다고 비판했지만 보경은 그런 면모를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도움 되지 않는 관계에 얽혀 시간을 허송으로 낭비하는 것보다야 현명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61
긴 병은 가족 사이의 부채負債를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잖은 상처를 줬지만 그 상처를 해결할 틈도 없이 또 새로운 상처가 쌓였고, 이전에 쌓였던 상처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충분히 빚을 덜어낼 기회가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힘내라는 말이 영혼 없이 습관처럼 나왔고 화낼 일이 아닌데도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렇게 슬프지 않은데도 걷다가 괜히 벤치에 주저앉기도 했다. 그때마다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참았다. 끝이 있는 고난이라 다독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보경을 울린 것도 의사의 말이었다. 어머니, 이게 비보험이거든요.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73
가끔은 자신과 주원이 삼차원에 있고 아이들이 다차원에 있는 것 같았다. 주원은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했고 이해했다. 가끔은 주원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은혜는 주원의 표현방식이 좋았다. 주원의 배려는 남들과 다르다. 주원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인도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춰 은혜를 기다렸다. 그 행동에는 은혜를 배려해야겠다는 선의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뿐이었다. 은혜는 그런 주원이 편했다. 주원에게는 선의가 아니었겠지만 은혜에게는 그것이 선의였다. 은혜가 미안함이나 고마움 따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사람 사이에 당연하게 일어나는 화음 같은 것.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80
은혜는 한참을 망설이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보경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가 본인이 한 말을 어기고 싶지 않았는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만일 보경이 이유를 물어봤다면 은혜는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돌아오는 길이 외로워, 엄마. 힘들지는 않은데 외로워. 외롭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길을 외롭다고 부를 수 있을 거 같아.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86
연재가 친구를 집에 데려가지 않는 이유에 그리 대단한 상처가 있던 건 아니었다. 때는 연재가 계주 경기에서 레일을 이탈했던 열한 살 무렵이었다. 연재는 방과 후 활동으로 마이크로봇을 제작하며 그곳에 있던 동갑내기 넷과 친구가 되었고, 그 아이들 집에 놀러 갔을 때, 인생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과 비슷하게 살지 않으며 때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많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재의 집에도 가자는 아이들의 제안에 연재는 하루 정도 고민한 후 기꺼이 아이들을 초대했지만, 그 아이들은 연재의 집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옛것은 빨리빨리 모습을 감춰야 된다는 듯이, 아직까지 탈바꿈하지 못한 연재의 삶을 희한하고 불편한 것으로 치부했다. 정작 살아가는 연재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음에도. 아이들은 착해서 대놓고 집에 대한 품평은 하지 않았지만 그 후로 연재의 집에 가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꼈다. 어떤 것들은 숨길 수 있는 한 숨기는 것이 좋다고.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96
콜리는 이 집에 사는 인간들을 한 명, 한 명 살폈다. 전부 다르고 독특한, 이를테면 파랑노랑 하늘이거나 분홍보라, 초록빨강의 하늘 같은 인간들이었다. 천 개 이상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면 이 인간들을 표현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을 텐데.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201
보경은 콜리에게 사사로운 것까지 내뱉은 자신의 말을 후회했는데, 그때 거부감이 한 꺼풀 벗겨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콜리는 보았다. 자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냈다며 말을 무르는 보경의 표정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소량의 편안함을 발견했다. 콜리는 이를 통해 한 가지 방법을 습득했다. 대화다. 대화를 많이 할수록 보경에게 깔려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표피같이 얇게 한 꺼풀씩 벗겨졌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205
아파트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단지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학교 끝나고 자정이 다 되는 시간까지 쿵쾅거리는 연재를 이해해줄 너그러운 이웃은 없었을 테니까. 집은 그런 의미로 좋았다. 사막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 외딴 오두막같이, 사막을 횡단하는 이들이 가끔씩 들러 쉬고 가지만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곳.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은혜는 사람이 피곤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214
투데이의 운명과 세상의 무책임한 몰이해에 대한 분노가 한계치를 넘은 듯했다.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사람만 이렇게 잔인한 거 같아요."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220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221
연재는 경쟁을 포기한 쪽이다. 연재는 은혜가 있는 한 부모의 관심을 반의반도 얻지 못할 거라는 걸, 자신이 무슨 일을 해내도, 아주 잠시라도 관심을 전부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연재는 투정이 없었다. 하라는 것을 불만 없이 해냈고 속을 썩이지도 않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바라는 것이 없었고 입을 열지 않았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