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론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의 동료들과 이 도시 사람들 몇 명만이 좁은 구덩이 주위에 모여 서서 경외감, 당혹감, 존경심을 한꺼번에 느끼며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해 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울어준 사람은 바로 스토너였다. 이제 완전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고독이 그 울음으로 조금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운 것이 자신 때문인지, 슬론과 함께 보낸 젊은 시절이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기 때문인지, 그가 사랑했던 저 마르고 가엾은 사람 때문인지는 스토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32
스토너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홀리스 로맥스에게 끌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로맥스의 거만한 태도, 달변, 유쾌한 신랄함 속에서 스토너는 비록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37
이렇게 쌀쌀한 날씨, 이파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마당에 황량하게 서 있는 포플러와 느릅나무, 집 안의 온기와 곧 시작될 파티를 위한 물품들을 보며 윌리엄 스토너는 과거의 어느 날이 생각났다. 하지만 한동안은 자신이 기억해 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거의 7년 전 바로 이런 날에 자신이 조시아 클레어몬트의 집에 가서 이디스를 처음으로 보았음을 깨달았다. 아주 멀고 먼 과거의 일 같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변화들을 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1
그는 자신의 기형적인 외모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일찍부터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으며, 자신을 방어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털어놓았다.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도 더욱 강렬해졌다. 윌리엄 스토너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뜻밖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로맥스가 일종의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스토너 자신도 예전에 아처 슬론의 강의를 들으며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로맥스는 일찌감치 혼자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지식이 스토너의 경우보다 더욱더 그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두 사람은 비슷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또는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그 사실을 시인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4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6
그럼에도 그는 이 집을 소유하게 된 것이 점점 기뻐져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위안을 얻었다. 1층 거실 옆에 있는 그의 서재에는 북쪽으로 높게 창문이 달려 있어서 낮에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었다. 나무로 된 벽은 세월의 풍요로움을 안고 은은히 빛났다. 지하실에는 상당량의 판자가 있었는데, 먼지와 곰팡이투성이기는 해도 서재의 판벽널과 같은 판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판자들을 손질해서 책꽂이를 몇 개 만들었다. 언젠가 책에 에워싸인 서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중고가구점에서 낡아빠진 의자, 소파, 아주 오래된 책상을 몇 달러에 사서 몇 주 동안 수리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7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7
그래서 빚과 궁핍이 정기적으로 거듭 압박을 가하는데도 그는 몇 년 동안 행복했다. 젊은 대학원 시절과 신혼 시절에 꿈꿨던 삶과 거의 비슷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디스가 그의 삶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그가 예전에 희망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은 교착상태와 비슷한 긴 휴전에 들어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따로 보냈다. 이디스는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 집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했다. 청소와 세탁과 광내기가 끝나면 그녀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 생활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녀가 윌리엄의 서재에 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에게 서재는 없는 존재인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8
윌리엄은 여전히 딸을 돌보는 일을 대부분 맡고 있었다. 오후에 대학에서 퇴근해 돌아오면 그는 자신이 아이 방으로 바꿔놓은 2층 침실에서 그레이스를 데리고 내려와서 자신이 일하는 동안 서재에서 놀게 했다. 아이는 바닥에서 조용히 잘 놀았다. 혼자 노는 것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가끔 윌리엄이 말을 걸면 아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서히 기쁨을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8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 장식이 없는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펼쳤다. 섬세하고 활기찬 아이 같았다. 그는 책으로 완성된 자신의 원고를 다시 읽고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을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가 느껴졌으며, 자신이 그토록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50
아버지는 분빌 외곽의 작은 무덤에 묻혔다. 윌리엄은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옷을 입고 밭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해마다 일하던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른 흙 한 덩이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스러뜨리며 달빛 속에서 어둡게 보이는 흙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바지에 손을 털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틀 때까지. 땅 위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척박한 회색 땅이 그의 앞에 무한하게 펼쳐질 때까지.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57
처음 며칠 동안은 집이 텅 빈 것 같아서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익숙해져서 점점 즐기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안 돼서 그는 자신이 몇 년 만에 최고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든 반드시 돌아오게 돼 있는 이디스를 생각할 때면,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 조용한 후회가 느껴졌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2
정신없이 지나가는 학기 중에 묘하게 잠시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윌리엄 스토너는 차츰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어쩌면 자신이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4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5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6
두 사람은 함께 살고 있지만 이제는 자신에 대해서든 상대에 대해서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섬세한 균형이 깨어질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스토너는 한참 동안 망설이며 결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야 비로소 이디스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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