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우리 셋과 새로 사귄 벗 사이의 차이 중 하나였다. 우리는 진지할 때를 제외하고는 실없는 농담을 기본으로 했다. 에이드리언은 농담일 때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는 진지했다. 그런 그를 우리가 이해하게 된 건 다소 시일이 지나서였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13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17
콜린처럼 좀 더 아나키즘적인 몇몇은 모든 게 우연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 세계는 끊임없는 카오스 상태로 존재하며, 오로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모종의 원초적 본능, 즉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로부터 기인한 숙취에 다름없는 그것이, 일어날 법했거나 그렇지 않은 사건에 대해 사후事後에 의미를 부여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19
"음, 한 가지 의미에서 보자면,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합니다." 그는 전에 그랬듯 잠시 뜸을 들였고, 그 바람에 우리는 그가 은근히 조롱을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 모두의 차원을 넘어서 고도로 진지한 상태인 건지 다시 한 번 궁금해졌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제 사고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21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어쨌거나 필 딕슨 선생이 우리에게 해준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리고 이제까지 소설과 무관하면서도 그에 준하는 삶을 산 사람은 - 롭슨을 제외하면 - 에이드리언이 유일했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25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런가, 과연? 어디에서 읽었나?" "라그랑주입니다. 파트리크 라그랑주. 프랑스인입니다." "그런 추측을 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 설명해줄 수 있겠나?" "롭슨의 자살이 그 예입니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27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당시에 ‘교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설명해두는 게 좋겠다. 최근에 친하게 지내는 여성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의 딸이 고민을 안고 찾아왔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대학 2학기째였던 그녀의 딸이 한 남자와 자게 됐는데, 그 남자는 - 공공연히, 그리고 친구 딸이 아는 바로는 - 비슷한 시기에 딴 여자들하고도 잤다는 거였다. 그는 ‘교제할’ 한 사람을 고르기 위해 그 여자들 전부를 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딸은 황망해했는데, 그 방식보다는 - 그것이 얼토당토않다는 건 반쯤 인식했지만 - 자신이 끝내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33
즉 한 여자를 좋아하면 할수록, 또 잘 맞으면 잘 맞을수록 정작 섹스의 기회는 줄어드는 듯하다는 것. 물론 - 훗날에야 비로소 분명해진 생각이긴 하지만 - 내 안에 ‘노’라고 말하는 여자에게 주로 끌리는 본능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뒤틀린 본능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36
베로니카는 내 서가에 대해선 레코드 수집 목록보다 더 좋은 점수를 주었다. 당시는 문고본들에 전통적인 재킷을 입혀 출간하던 때였다. 오렌지색 펭귄 문고판은 소설, 파란색 펠리컨 문고판은 비소설 하는 식으로. 책꽂이에 오렌지색보다 파란색이 더 많다는 건 진중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볼 때 내 서가엔 이름값을 하는 책들이 많았다. 리처드 호가트와 스티븐 런시먼*, 요한 하위징아와 한스 아이젱크**, 윌리엄 엠프선, 그리고 존 로빈슨 주교***의 『하나님께 맹세컨대』와 테렌스 래리의 만화 시리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내가 그 책들을 다 읽었다고 짐작한 베로니카는 날 칭찬했고, 너덜너덜한 책들 대부분이 중고서점에서 사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37
베로니카의 서가엔 수많은 시집들이 책과 팸플릿 형태로 꽂혀 있었다. T. S. 엘리엇, 오든, 맥니스, 스티비 스미스, 톰 건, 테드 휴즈. 그리고 조지 오웰과 아서 쾨슬러의 ‘레프트 북클럽’ 판본들과 소가죽으로 장정한 19세기 소설들 몇 권, 아서 래컴이 삽화를 그린 동화책 두어 권과 그녀의 마음의 양식인 『성 안의 카산드라』가 꽂혀 있었다.
-알라딘 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중에서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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