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이나 말투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뛰어난 위원들 모두가 예외 없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다. 먼저, 분쟁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다. 당사자들이 겉으로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과 속으로 가장 아쉬워하고 있는 것은 다를 때가 많다. 체면상 또는 전략적 허세(블러핑)로 목청을 높이고 있을 때 슬쩍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하면 못 이기는 척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심리학이다. 사람의 마음을 잘 파악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눈치이기도 하고, 거창하게 말하면 콜드 리딩(신체 언어, 억양 등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기술)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69

다음으로는 적절한 카리스마다. 양쪽 말을 끝없이 들으며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한다고 분쟁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적절한 시점에는 조정위원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타협안을 자신 있게 제시하여 흔들리는 당사자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 경청 과정에서 얻어낸 조정자에 대한 신뢰를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0

마지막은 인내심이다. 뛰어난 조정위원들은 일단 타협안에 접근했다가도 금세 다시 물러서는 당사자들의 변덕에 화가 날 법한데도 끈기 있게 다시 처음부터 설득을 시작하곤 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0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끌린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동료 인간이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라는 점은 미래에도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기계가 발전해도 인간은 대체불가능한 자원일 수 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5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은 비극이다. 역사의 두 측면을 있었던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얼마든지 지금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빛을 애써 지울 필요도 없고, 빛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83

이념 문제 아닌 것을 이념 문제화하는 강박증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둘째, 삼인성호三人成虎. 몇몇이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이 사회에 진짜 심각한 이념 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 만큼 속았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90

민주주의는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필요로 한다. 잘못을 은폐하는 문화는 투명성도 효율성도 침해할 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92

인간사회는 참 묘해서 교과서처럼 정의가 늘 승리하지도 않고, 거기 앞서 무엇이 정의인지도 정의하기 어렵고, 분명히 선의에서 비롯한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만 심화하기도 하고,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는 슬프지만 많은 격차가 있고, 빈곤과 불평등에는 사회가 책임질 부분도 있지만,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이런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뭔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훼손되는 것일까? 결국은 직시할 문제와 모색할 해결책 두 가지가 있을 뿐 아닐까?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09

그런 내게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한 인간의 폭력성을 냉정하게 해부해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위안을 준 책이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하버드대 교수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이 책에서 인간이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왔는가를 인류사 차원에서 탐구했다. 이런 책이 좋다. 게으른 고정관념을 깨주는 책. 요약하면 인류의 역사는 원래 내내 끔찍이도 폭력적이었으므로 현재가 그나마 가장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이 폭력을 감소시킨 원동력인지를 분석한다. 묘하게도,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또는 철저한 비관에서 출발하면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내 지론과도 통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17

핑커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폭력을 감소시킨 결정적인 힘은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 즉 근대국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개인들은 국가를 만드는 사회계약을 체결했고, 국가가 폭력 수단을 독점함으로써 무정부 상태의 폭력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게 된다. 상업의 발전 역시 중요한 요소다. 더 많은 교역 상대와 물건을 교환하게 되면 상대가 죽었을 때보다 살았을 때 내게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근대 이후 폭력적인 남성 문화에서 탈피하는 여성화,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세계주의의 흐름도 평화를 촉진시켰다. 이는 결국 자유주의적 인도주의를 향해 가치 체계를 진화시켜온 이성의 힘이다. 이를 모두 종합하면 인류 역사가 밟아온 ‘문명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19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보적이고 자유를 희구하는 민중’의 이미지는 지식인들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자유, 가치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의 서유럽적 가치는 엘리트, 중산층들의 선호이고, 서민들은 윤리적 보수주의, 종교적 원리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24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나는 숨진 경찰관 아메드다. 샤를리는 나의 종교와 문화를 조롱했다. 하지만 나는 샤를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시사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숨진 무슬림 경찰관에 대한 한 무슬림의 트윗이다. 끝 문장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앞의 문장들은 자신의 신앙을 조롱하는 행위에는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히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27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구약성서엔 폭력적 차별적 요소가 많지만 근대 계몽적 인도주의에 적응한 현대 기독교는 이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예를 들며 종교는 인간사의 지적 사회적 흐름에 반응한다고 분석한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28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은 합리적 추론보다 도덕적 직관에 의존하는데, 미국 진보 세력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발달시킨 도덕성 중 자유와 배려에만 치중하고 정당한 권위, 고결함,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무시해 지지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상대의 도덕감정을 모욕하는 것보다 상대도 공감할 만한 부분을 넓혀가는 것이 현명하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28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구상 행복지수 최상위의 국가이면서 과학기술, 경제력, 정치 민주화 등 모든 측면에서 뛰어난 국가들, 이민 가서 살아보고 싶은 나라들은 전부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고 있는,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복지국가 원리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독일 등(여기에 사회문제 많은 미국이 왜 끼는지는 뒤에 다시 얘기해보도록 하자).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30

일조량, 자연환경, 지정학적 조건 등은 생각 이상으로 인간사회의 많은 것을 좌우한다. 복지 정책으로 인해 사람들이 무력증에 빠져 북유럽의 자살률이 높다는 순진하기까지 한 주장보다는 연간 일조량, 기후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일조량 부족으로 인한 계절성 우울증은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으니까 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33

북유럽사회의 그림자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은 수입의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내는데다 물건 가격에 붙는 부가세 같은 간접세도 높아 결국 모두가 비슷비슷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대박이나 야심, 화려한 성취 같은 것이 어려운 협동조합사회에 가깝다는 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34

이런 주제를 잘 요약한 것이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는 대사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44

우리 사회는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한 집단주의 문화의 사회다. 나서는 걸 죄악시하고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가 뭘 잘했을 때의 칭찬보다 그가 뭐 한 가지 잘못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달려들어 돌팔매질하는 광기가 훨씬 뜨겁다. 당연히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면 책임을 맡지 말아야 한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45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어떤 통속적인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아래 대사를 듣고 그 통찰력의 깊이에 놀란 일이 있다.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Anyone can be cynical.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Dare to be an optimist.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46

앞의 글에서 얘기했듯 우리 사회처럼 ‘결과책임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전문가가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지면서 체계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기가 어렵다. 그때그때 책임만 회피하려는 미봉책이 난무하기 쉽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51

슬로빅에 따르면 일반인이 체감하는 위험도는 양적 지표보다는 결과의 끔찍함 정도, 자신의 지식 범위 밖에 있는 미지의 정도,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 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한다.* 치사율이 높다고 알려진 신종 전염병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한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52

집에 돌아가며 생각했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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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좋게 말하면 냉소주의였고, 정확하게 말하면 비겁했다. 불의를 질끈 잘 참는다. 타인들이 원하는 연기를 잠시 해주면 내 자유가 더 확보된다는 걸 일찍 영악하게 깨우친 거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0

게다가 현대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성격조차 타고난 요소, 즉 유전자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말해준다. 그 바탕 위에 인간관계, 일, 독서 등을 통해 쌓아온 직간접 경험들이 결국 ‘나’라는 고유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1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도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공부하는 젊은이가 부잣집 사모님 앞에 잘못 없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꼴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 앞이 아득해진다. 한남대교를 지날 때마다 십 년 넘도록 마주치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은 여전히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다. 그 현수막을 아이 아빠가 16년째 새것으로 바꿔 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

그리고 나뿐 아니라 모두가 경험한 순간이 있다. 눈앞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시퍼런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순간. 몸이 떨리고 무섭고 무력하고 울음조차 안 나오는 시간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깨달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

솔직히 내가 쓰는 글의 출발점에는 ‘나같이 이기적이고 무심한 사람조차 자꾸 접하다보니 결국은 깨닫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더라. 하물며 나보다 훨씬 따뜻한 가슴을 가진 많은 분이 이런 일들을 보고 듣는다면 어떻겠나. 내가 겪은 것들을 알려드리기라도 하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

독자님들은 이제부터 어쩌면 낡은 일기장을 꺼내 읽어볼 때처럼 거칠고 두서없는 느낌이나 생각들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다.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5

나는 그저 이런 생각으로 산다. 가능한 한 남에게 폐나 끼치지 말자. 그런 한도 내에서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 하며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 인생을 즐기되, 이왕이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남에게도 좀 잘해주자. 큰 희생까지는 못하겠고 여력이 있다면 말이다. 굳이 남에게 못되게 굴 필요 있나. 고정되고 획일적인 것보다 변화와 다양성이 좋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선호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다양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껴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가고 싶은 것이 최대의 야심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8

인간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 과잉 기대도 말고 과장된 절망도 치우고 서로 그나마 예쁜 구석 찾아가며 참고 살자 싶다. 큰 기대 않고 보면 예쁜 구석도 꽤 있다. 이건 결국 자기변명이다. 그래야 남들이 나도 참아줄 테니. 어차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살 것도 아니면서 인간의 본질적 한계, 이기심, 위선, 추악함 운운하며 바뀌지도 않을 것들에 대해 하나마나한 소리 하지 말고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존재답게 최소한의 공존의 지혜를 찾아가자. 그게 각자의 행복 극대화에도 최선의 전략일 것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9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쓰고 보니 난 여전히 소년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정 많은 휴머니스트보다는 도구적으로 최소한의 도덕을 찾는 현실주의자다. 그게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소수보다 ‘찌질한’ 다수가 많은 것이 현실이기에 그 다수의 하나로서 간증하는 거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9

‘세상과 전면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가 내 초기 상태다. 사춘기 소년이 아니니까 ‘세상과 일체의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망상이다. 다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0

나이를 먹으며 조금 나아지는 것이 있다면 관성의 법칙으로 멈춰 있을 때 조바심 내지 않고 몸을 맡겨두는 여유가 생겼다는 거다. 몸도 머리도 비워서 가볍게 놔두면 또 움직일 동력도 생기기 마련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0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2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때 지루하게 배우던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지금의 서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 개인주의 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3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4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6

자기 이익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합리성이다. 이와 동전의 양면처럼,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는 개인의 이익이 지속가능하지 못하도록 ‘반대 인센티브(불이익)’를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합리성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26

반면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36

서교수에 따르면, 행복감이란 결국 뇌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뇌가 특정한 종류의 경험들에 대해 기쁨, 즐거움, 설렘 등의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실증적 연구 결과,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0

서교수가 이야기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행복의 메커니즘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이다. 이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옛말의 지혜와 같은 이야기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0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6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지인들과의 소모임, 젊은 판사들과의 독서 모임, 수준은 극히 낮지만 연습하는 과정이 즐거운 법원 합창단 등의 소소한 모임이 즐겁다. 책 읽기를 좋아하다보니 조금씩 글도 쓰게 되었고 운좋게 책도 내게 되고 신문에 칼럼도 쓰게 되었다. 글쓰기를 통해 출판문화계 사람들, 작가들, 언론인들을 알게 되고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한마디씩 던지는 반응을 읽는 재미도 알게 되었다. 법조계와는 상관없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생긴 것이다. 내가 통제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 고령화사회에서 새로운 행복의 원천이 생긴 거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8

일본사회에 매이지 않은 채 로마에 일 년, 크레타 섬에 일 년, 세계를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자유롭게 떠돌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소설과 소소하고 유치한 수필을 끝도 없이 써대던 예전의 하루키다. 뭐, 그 와중에 돈도 잘 벌었으니 더욱 부러울 뿐이고…… 그렇다고 내가 이제 와서 이런저런 잡문을 써댄다고 하여 하루키 같은 작가가 될 가능성이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상관없다. 팔리든 말든 내 나름대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내게 즐거움을 준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9

나는 소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채워가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에는 주저 없이 자기 힘닿는 범위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고 싶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60

어차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라면, 개인의 행복이 골방 속에서 누리는 자유에 그치지 않게 사회와 함께하는 행복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61

책, 글쓰기, 여행, 인간관계. 모두 내게 중요한 행복의 원천이다. 하지만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에 못지않은 과분한 행운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62

나는 전두환 총통 각하 덕에, 과외와 사교육 없이 변별력 있는 전국 단위 시험 한 방으로 승부 내는 그분 스타일의 단순 무식 명쾌한 입시제도의 혜택을 듬뿍 받은 세대의 한 사람이다. 그 은혜를 입은 나로서는 그분의 전 재산 상당액(29만 원)을 무이자로 그분에게 빌려드릴 용의가 있을 정도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71

교과서 및 자습서, 『성문종합영어』 『수학의 정석』 등 입시를 위해 봐야 할 필수 텍스트도 거의 표준화돼 있던 시절. 강북에서 혼자 알아서 공부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력고사를 잘 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잘 친 거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71

수험생의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다. 난 그럴 시간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사진 아래의 깨알 같은 글씨를 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입장을 바꿔 교과서 중심이라는 제약하에서 변별력 있게 출제해야 하는 출제위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학생들이 유심히 보지 않는 교과서 구석의 시시콜콜한 곳에서 문제를 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71

어찌 흘러흘러 가다보니 나 또한 뒤늦게 나이 먹어서 법관 해외연수 덕에 팔자에 없는 하버드 로스쿨을 일 년짜리로나마 다녀오게 되었고, 체계적인 법리 실력은 없이 구체적 분쟁 해결에만 관심 많은 야전형 판사로 일하고 있다. 이런 쓸데없는 글이나 쓰며 말이다. 뭐,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75

한 왕조가 건설되어 발전하는 시기와 쇠락하여 망해가는 시기의 특징이 몇 천 년에 걸쳐 놀라울 만큼 비슷하게 반복된다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76

공부 하나 달랑 잘해서 먹고살고 있는 불균형한 인성의 나는 그 우아하고 세련된 분들 사이에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서민계층 자제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공부 하나밖에 없다. 도서관 덕분에 돈 안 드는 독서가 가장 큰 취미요 특기일 수밖에 없다. 서민계층 자제들에게 가장 유리한 시스템은 사교육 없는 공교육이다. 교과서와 큰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참고서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확실히 좋은 점수를 받는 아주 단순한 제도다. 이건 상류층 내지 중산층 학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시골 깡촌이나 달동네에서 우연히 돌연변이로 달랑 공부 하나 잘하게 태어난 ‘불균형한 인성의 공부 기계’가 자기 아이의 자리를 빼앗아갈지 모르니 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79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빈곤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역사가 증명하듯 근본적 기반이 흔들린다. 모든 곳에 희망이 있어야 사회가 유지된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85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에 관한 원칙인 존 롤스의 『정의론』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를 배려하기 위한 불평등은 정의에 부합한다고 하여 실질적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86

하지만 뭔가를 할 용기도 없었고, 당시 대학가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것도 체질적으로 어려웠다. 역사의 필연이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 계급이 어떻고 하는데 나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가장 중요한 인간이다. 아무리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심하다지만 거창한 이념을 다 떠나서 나 자신은 한국에서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 것 같고, 미국에서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북한, 소련, 중국 같은 전체주의사회에 사는 것은 상상만도 끔찍했다. 자기 자신이 살고 싶지 않은 체제를 남들에게 권하는 건 죄악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92

자본주의의 허위의식에서 깨어나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나면 된다는 식인데 이건 종교일 뿐이다. 개미 연구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이 정확하다. "이론은 훌륭한데 종種이 틀렸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92

결국 나는 마음속으로 무거운 부채의식은 있지만 아무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책만 엄청나게 읽어대고, 영화제 다니고, 연애하고, 나이트 록카페 다니는 날라리 학생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93

젊은이의 마음은 심히 비장했으나 몸은 비루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처음 겪은 지랄탄 몇 방에 이미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멘붕. 아무것도 못하고 도망만 다니다 겨우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승객들에게 질질 짜면서 이렇게 시민들이 가만 계시면 안 된다고 호소 비슷한 것을 했던 기억이 있다. 옆에 후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투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생긴 대로 살아야지.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94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전근대성, 근대성, 탈근대성이 공존하던 1930년대 독일사회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특징이 같은 시대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96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4

흔히들 첫번째 질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두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필요 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더 나아가 진심으로 친구의 비만을 걱정해 충고하고 싶다면 말을 잘 골라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 옳은 충고도 ‘싸가지 없이’ 하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진심이 담긴 필요한 말이라고 해도 배려심 없이 내뱉으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더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4

경영자야말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그 인재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는 조직 내 관료주의의 벽을 부수는 능력. 그리고 더 중요한 능력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능력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51

이런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 부모 잘 만나 경영자의 막중한 책임을 물려받고, 학벌과 연줄로 자리를 차지한 중간관리자들은 일생 파벌 다툼이나 하며 진입장벽을 쌓고, 장그래 같은 젊은 인재들을 소모품으로만 쓰고 버리는 기업들에게 미래가 있을까. 물론 ‘미국식 능력주의meritocracy’가 만병통치약은 아니고, 거기서 소외되는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할 거면 우선 제대로 된 자본주의부터 하면서 그다음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능력들이 각기 다른 기준을 통해 정확하게 평가받고 보상받는 자본주의 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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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크리스마스를 사랑한다. 트리를 장식하고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쿠키를 굽고 선물을 포장하는 그 모든 것이 좋다. 심지어 대다수가 싫어하는 일들, 붐비는 쇼핑몰에서 선물을 사고 크리스마스 소식지를 읽고 친척들을 만나고 공항에서 수하물을 부치려고 긴 줄을 서는 것조차 좋아한다.

좋다, 거짓말이다. 수하물을 부치겠다고 긴 줄을 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는 건 좋다. 호랑가시나무와 촛불과 에그노그와 캐럴도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영화를 좋아한다. 좋다, 또 거짓말이다. 모든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영화 <멋진 인생> 그리고 한스 안데르센의 <전나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34번가의 기적>과 크리스토퍼 몰리의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와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 <적막한 한겨울에>를 사랑한다. 우리 가족은 매년 <사랑에 눈뜰 때>와 <크리스마스 스토리>를 보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조지 V. 히긴스의 <‘크리스마스 과거 유령’은 눈옷을 못 입어요>를 큰 소리로 읽으며 우리 집 전통에 보탤 새로운 고전을 간절하게 찾는다.

그리 많지는 않다. 우선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들이 보기보다 훨씬 더 쓰기 어렵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관련 주제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써왔고 눈사람, 산타, 목동에 관해 가능한 모든 변주가 이루어져 왔다.

-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4894 - P10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려는 작가는 감상과 회의 사이에서 팽팽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대다수는 결국 냉소나 신파 중 하나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 한스 안데르센 말이다. 그는 손수건 세 개는 적시고 남을 만큼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막심 고리키는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두고 "가난한 소녀나 소년을 데려다가 대개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이는 창문 아래 어딘가에서 얼어 죽게 한다"고 발끈한 적이 있다. 성냥팔이 소녀도, 빳빳하게 서 있는 장난감 주석 병정도, 심지어 눈사람도(물론 얼어 죽은 게 아니라 녹아 사라졌지만) 모두 억울한 운명을 맞았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말이다.

안데르센이 나타나기 전에는 누구도 그리 우울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책 속에서 꽤 많은 어린이를 죽게 만든 디킨스조차도 <크리스마스 캐럴>의 타이니 팀은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데르센은 모두의 크리스마스를 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을 얼어 죽게 하고 충직한 장난감을 녹여 주석 덩어리로 만들고 가만히 숲에 서 있기만 했던 죄 없는 전나무를 베어내 땔감으로 만들어버렸다.

더 안타깝게는 안데르센에게 영감을 받은 수십 명의 모방자가 남은 빅토리아 시대 내내 거룩한 아이들을 죽이고(일부는 도무지 참아줄 수가 없어 죽을 만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죽였다.

-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4894 - P11

그리고 앞서 말한 크리스토퍼 몰리의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가 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전나무>에 대응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안데르센과 달리 몰리는 크리스마스의 목적이 고통만이 아니라 구원까지 일깨워주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독자를 아프게 하고 좌절하게 하지만 종국엔 대단한 기쁨을 안겨준다.
-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4894 - P15

또한 그는 글쓰기에 대해서도 많이 알았다. 구성이 빼어나고 대사가 훌륭하며 첫 문장 "우선 말리가 죽었다는 말부터 해야겠다."는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첫 문장 "나를 이슈마엘이라 불러달라." 다음 좋은 문장으로 꼽힌다. 그는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도 알았고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4894 - P19

그러나 압도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는 ‘인간은 변할 수 있고 속죄할 가치가 있다’는 교훈을 믿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사실상 ‘그러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다.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면 딱딱해진 우리의 심장은 어느새 쩍 갈라지며 열린다. -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4894 - P20

얼마나 사랑하면 나 역시 수년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써왔다. 여기 그 이야기들을 모았다. 교회 성가대와 크리스마스 선물과 우주에서 온 기분 나쁜 녀석들에 관한 이야기,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야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 그리고 소원이 있는 줄도 몰랐던 이야기, 별과 목동과 동방박사와 산타클로스와 겨우살이와 <멋진 인생>과 재생용지로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심지어 살인사건도 나온다. 그리고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유령’에 관한 이야기도.

여러분이 좋아하면 좋겠다. 그리고 다들 아주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면 좋겠다! -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4894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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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카가 세상을 떴을 때, 그는 아무런 칭호도 받지 못했었고 많은 빚만을 남겼다. 아들인 오콩코가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뜻밖의 일인가? 다행히도 세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본인의 가치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였다. 분명 오콩코는 큰일을 할 재목이었다.

-알라딘 eBook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중에서 - P12

하지만 그는 평생 어떤 두려움 속에 살았는데, 그것은 실패와 유약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악과 변덕스러운 신 그리고 주술에 대한 두려움, 숲에 대한 두려움, 잔혹함으로 눈이 벌건 자연의 힘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한층 더 컸고 뿌리가 깊었다. 그 두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 즉 그가 아버지를 닮은 것같이 보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알라딘 eBook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중에서 - P19

그래서 오콩코는 아버지 우노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증오하는 감정에 지배받게 되었다. 그 하나가 친절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게으름이었다.

-알라딘 eBook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중에서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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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훌륭한 예술가란 그 아무도 닮지 않은 자기 자신의 흔적을 지구라는 돌 위에 새겨놓은 사람일 것이다. 마리 로랑생이 이십대에 그린 자화상은 슬프고 고독하게 보이지만,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굳은 의지와 자유로운 정신이 엿보인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19

요즘은 나혜석의 예언이 딱 들어맞아 신기한 기분도 든다.

"조선의 남성들아.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니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그러니 소녀들이여,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21

늙음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타고난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자코메티 조각의 힘은 훌륭한 장인을 넘어서는 위대한 철학가가 작품 안에 있는 덕분이다. 자신이 살았던 20세기의 절망을 그토록 극명하게 표현한 예술가는 드물다. 그는 매일 전진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고자 했다. "나는 계속한다. 그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더 멀어진다는 걸 알면서."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22

말하자면, 이것은 사랑에 빠질 때와도 비슷한 존재의 원근법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대의 객관적인 본질을 왜곡시켜, 자신만의 시각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자코메티의 작품이 이전 조각 작품들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그 실물 크기에 관한, 실재와 무 사이의 변증법이다. "인간이 걸어 다닐 때면 몸무게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가볍게 걷는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가벼움이다." 그의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보여주면서, 반대로 참을 수 없는 인간 상황의 무거움을 암시한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23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걸어야만 한다."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자코메티의 말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94295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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