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자신만의 간주곡과 계절을 지니고 성장해간다. 오늘, 우리는 봄의 문턱에 있다. 내일이면 라일락과 벚꽃이 축제를 벌일 것이다. 지슬렌, 너를 보기 위해 네가 죽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지만 너는 언제나 그 이전, 그 앞에 있었다. 그러니 돌아간다는 건 적당한 단어가 아니다. - 소나기를 맞으며 눈부시게 웃음 짓던 생기 가득한 너를 볼 수 있으리라. 그리운 너의 미소. 우리는 그리움 속에서 시들어가고,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삶을 깨닫기도 한다. - P8
네가 죽은 후 찾아온 가을과 겨울에 나는 너를 위해 이 작은 글의 정원을 정성스레 가꾸었다. 정원에는 노래와 이야기로 만든 두 개의 문이 있다. 노래는 나의것이나 이야기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이야기를들려주는 자일뿐. 그 이야기를 너의 아이들, 천국의 새이자 너의 영원한 생명인 가엘, 엘렌, 클레망스에게 바친다. 이 책의 영토를 마음껏 밟으며, 누구의 것도 아닌빛, 네가 온전히 섬겼던 빛을 활짝 누리도록 그들을 초대한다. - P9
네 죽음은 내 안의 모든 걸 산산이 부서뜨렸다. 마음만 남기고, 네가 만들었던 나의 마음. 사라진 네 두 손으로 여전히 빚고 있고, 사라진 네 목소리로 잠잠해지고, 사라진 네 웃음으로 환히 켜지는 마음을. - P13
지슬렌, 죽음의 날개가 단숨에 너를 휘감았다. 너를사랑하는 자들 위에 오래도록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광대한 날개로. - P16
우리는 잠깐 살기 위해, 찰나에 불과한 삶을 살기위해 두 번 태어나야 한다. 육신으로 먼저 태어나고 이어서 영혼으로 태어나야 한다. 두 탄생은 뿌리째 뽑히는 것과 같다. 육신을 세상에 던져버리는 첫 번째 탄생, 하늘 꼭대기까지 닿도록 영혼을 힘껏 던지는 두 번째탄생. 나의 두 번째 탄생은 1979년 9월 말의 어느 금요일, 밤 10시쯤 방으로 들어오는 널 보면서 시작되었다. 그날 밤, 나는 네 첫 번째 남편 집에서 널 만났다. 떠날채비를 하던 순간, 네가 들어왔고, 피곤한 하루의 삶에서 돌아온 네가 내 앞에 있었다. 영원히, 라고 할 수 있으리라. 네 죽음조차 네가 내 앞에 있는 걸 막을 수 없으므로, 그다음 일은 어린아이 장난처럼 간단하다. 단지 너를 따라다니면 됐으니까. 나는 너의 첫 결혼과 이혼, 그리고 두 번째 결혼에서도 너를 쫓는다. 나는 외발로 돌차기 판을 지나고, 너는 계속해서 네 갈 길을 가고, 나는 너를 꾸준히 뒤따른다. - P17
16년 동안, 나는 어디든 너와 함께 했지만 1995년 8월 12일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왜 불가능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마치 네가 유리나 공기뒤에, 1밀리미터 두께에 불과한 공기나 빛, 유리 같은 무언가 뒤에 있는 것만 같았다. 네가 바로 저편에 있는데, 아무리 오래 유심히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더 잘 보기위해, 얇디얇은 공기와 빛과 유리를 오래도록 보기 위해. 뚫어지게 응시하며 다짐한다. 끝내 보고야 말리라고, 끝내 알고야 말리라고, 비록 내 두 눈이 멀지라도, 죽음의 아찔한 광채가 점차 희미해진다 해도, 나는 얇게 둘린 공기와 빛과 유리를 결코 넘을 수 없으나 너는 순식간에 넘어섰다는 것을 이해하고 깨닫고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너는 수많은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P18
아름다움. 그렇다. 아름다움은 여인의 얼굴에 신선한 자유의 공기를 아로새긴다. 인생처럼 아름답고 쾌활하고 온화하고 한가롭고 걱정 없는, 피곤하고 가볍고 견딜 수 없고 경이롭고 종잡을 수 없는, 웃고 절망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그리고 느린, 아주 느리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자유의 공기. 내게 남은 건 이 생생한 아름다움에 네 죽음의 검은빛을 스며들게 하는 일이다.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넘치는 혼란과 감사를, 그래, 감사를 담아서. - P21
다르게 말한다면, 가장 훌륭한 어머니는 아이만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나쁜 어머니라고 부르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또 다르게 말한다면, 훌륭한 어머니는 여성, 애인, 아이가 되겠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고, 그 사실을 잊지않는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 P27
나는 전화기를 드는 순간, 네 목소리라는 걸 바로 알아채곤 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아니 이렇게 말해야 하리라. 나는 네 목소리를 어떠한 인식 이전에 촉각으로 알아챘다고. 네 목소리는 목소리가 실어오는 단어보다 앞서 말을 건넸고, 소중하고 귀한 얘기를 전해주었다. 삶은 네 웃음처럼, 그리고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감지할 수 있었던 네 목소리처럼, 결코 끝나지 않고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 P30
나는 오늘 생각한다. 네 죽음이 누구나 겪는 본질적이면서도 자비로운 불운으로 나를 다시 데려왔기에. 나는 생각한다. 책의 저자들 역시, 아무리 근엄하고 수많은 생각을 했던 그들이라도 부지불식간에 이 비참함을 알았을 거라고, 그러니 가장 자신만만하고 가장 똑똑한 사람들조차 순진하고 어리석은 본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거라고, 그 본능이란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 P33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그만 놀게 할 때, 시간이 가고 있음을 상기시킬때, 아이들도 이와 똑같은 괴로움을 겪는다. 사람들이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길 때, 노래를 흥얼거리던 네 방식, 결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이에게 속하는 네 방식, 자유로워지기 위한 네 자유로운 방식, 사랑하기 위해 네가 사랑하는 방식. 오, 지슬렌, 그렇게도 많은 것을 담기엔 관은 터무니없이 작기만 하다. - P37
나는 너에 대한 험담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네게 상처 주는말, 아무리 조심스러운 비난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난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둔다. 그렇다고 앙심을 품는 건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너에 대해 의혹을 발설하는 자들과 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생긴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며,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법이다. - P38
너는 내게 혼미해질 정도의 강한 질투를 알게 했다. 무엇하러 숨기겠는가. 질투는 사랑과 유사한 점이 하나도 없으며, 그보다 더 사랑에 난폭하게 반하는 감정도 없다. 질투는 눈물과 비명으로 자신의 사랑의 크기를 증명한다고 믿지만,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원초적인 편애를 표현할 뿐이다. 질투에 세 사람이 연루되는 건 아니다. 심지어 두 사람도 아니다. 불현듯 자신의 광기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 P39
내가 네게서 사랑한 것을 담담히, 단순하게 표현해야 한다면, 네가 지녔던 자유를 사랑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너 자신조차 예측할 수 없던 네 마음, 누군가가 너에게 느꼈을 수도 있던 정념을 거부하던 네 마음을 사랑했고, 다시 말해, 너의 사랑과 지성을 사랑했다. 그 까닭은 진정한 사랑과 관능적인 지성과 몸소 체험한 자유만이 우리에게 고동치며 비상하는 단 하나의 심장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P43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두 번 결혼했고, 수많은 관계로 이어져 있던 너. 나는 너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 더 자유롭고, 더 지혜롭고, 더 사랑이 깊은 사람을 본적이 없다. 자유와 지혜와 사랑은 세 단어 이나 똑같은 말이다. 각 단어가 다른 두 단어와 유리되면 알맹이도 의미도 없는 텅 빈 언어가 되어버리므로.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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