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은 서양문학으로도 이어져 스탕달의 『적과 흑』, 모파상의 『벨 아미』,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읽으며 프랑스의 양소유들을 손에 땀을 쥐며 응원…… 까진 아니고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곤 했다. D. H. 로런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고는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기대감에 차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었는데, 제목에 ‘부인’이 있다고 다 비슷한 것은 아니더라.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38
사춘기 사내 녀석의 과잉분비되는 호르몬이란 그 위력이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세계문학사에 난해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조차 완독하게 만들었다. 의아하게 생각되는 분은 『율리시스』 제18장 ‘침실/페넬로페’를 읽어보시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참고로 『율리시스』는 발간 당시 미국에서 외설 문서로 판금 처분을 받고 소각당하기까지 했던 작품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38
게다가 호르몬 과잉 사춘기 소년은 불순한 동기로 어른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어댔지만,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체득하는 것들이 있더란 말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처절한 가난의 고통,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 작가마다 다른 문체의 매력, 이야기의 흡입력, 글의 맛과 멋.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40
책을 덮고 내 취향의 글이란 뭘까 생각해봤다.
•어깨에 힘 빼고 느긋하게 쓴 글. •하지만 한 문단에 적어도 한 가지 악센트는 있는 글. •너무 열심히 쓰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잘 쓴 글. •갯과보다는 고양잇과의 글. •시큰둥한 글. •천연덕스러운 깨알 개그로 킥킥대게 만드는 글. •이쁘게 쓰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촌스럽지도 않은 글. •간결하고 솔직하고 위트 있고 지적이되 과시적이지 않으며 적당히 시니컬한 글.
이런 스타일의 글이라면 화학자들의 사생활에 관한 책이든 코털 가위 제조업계의 흥망성쇠에 관한 글이든 즐겁게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좋고 이쁜 것만 보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읽기 싫은 글을 이름값 때문에 힘겹게 읽으며 사서 고생할 필요 있나 싶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42
김연수의 상 받은 유명한 작품들보다 이런 소소하고 귀여운 문장들이 더 내 취향이다.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첫 작품 「벚꽃 새해」는 단편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글인데, 어느 한 부분을 오려낼 도리가 없으니 한번 읽어들 보시라.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44
김영하의 글은 감성 과잉이라고는 ‘1도 없는’ 쌀쌀맞음과 감탄스러울 정도의 이지적인 매력이 특징이다. 특히 뭔가의 핵심을 논리적이고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대치동에서 학원 강사를 했으면 일타 강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알쓸신잡〉을 봐도 내로라하는 말발의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유려하게 이야기하는 건 김영하더라.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44
내 취향 그대로다. 어깨에 힘 빼고 썼고, 시큰둥하며, 적재적소에 악센트가 있으며, 천연덕스러운 깨알 개그가 있다. 그의 대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고양잇과의 글’ 중에서도 최고봉이다. 애송이 고양이가 아니라 달관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메모리〉를 부를 것 같은 고참 고양이다. 인용 허가를 받기 어려워 여기에서 직접 소개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의 다른 대작 『빈 서판』 역시 흥미진진하다. 도덕적 원칙주의 때문에 불편한 과학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공격하는 학자들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근거를 제시하며 비판한다. 곳곳에서 ‘쫌!’ 하며 혀를 차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차근차근 설득해보려 애쓰는 핑커의 모습이 보여서 킥킥대게 된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45
서점에서 책을 뒤적거리다 내 취향의 글을 발견할 때의 쾌감은 대단하다. 다른 책들은 억지로 꾸역꾸역 입에 쑤셔넣는 느낌이라면, 문체가 내 취향인 책은 잘 만든 메밀국수 면발이 호로록 넘어가듯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그 재미 때문에 서점 들르기를 멈출 수가 없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48
지식인들의 글에는 독자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삼엄한 차단 장치들이 있다. 그들은 같은 말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하려 애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들의 글끼리는 또 그 글이 그 글같이 엇비슷하기도 하다. 공통점은 읽으며 쉽게 공감하게 되는 생동감 있는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의 글은 마치 비슷한 관 속에 누워 있는 귀족의 시신들처럼 우아하게 죽어 있다. 그렇다. 지식인풍의 ‘있어 보이는’ 품위 있는 글을 쓰려면 ‘죽은 글쓰기’를 위해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8
죽은 글을 쓰려면 먼저 당신의 생생한 생각을 직접 쓰는 천박함을 피해야 한다. 세상에는 특정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인용들이 있다. 한동안 가장 핫했던 아이템으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있다. 누가 당신 차를 긁어놓고 도망간 얘기를 쓸 때조차 ‘중산층의 씁쓸한 뒷모습,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한 얼굴이다’라고 써야 있어 보인다. 죽은 글을 쓰고 싶은 그대, 우선 관습적 인용을 생활화해야 한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8
같은 일도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 문제를 얘기하려면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패놉티콘’(조지 오웰의 『1984』는 유행이 지났으니 사용에 주의할 것) 등등 많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8
죽은 글쓰기를 위한 두번째 원칙 역시 인용에 해당한다. ‘내가 뭔 소릴 하고 있는지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당신의 논지를 적들이 너무나 쉽게 알아보게 방치하는 것은 노출증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세상에는 고슴도치같이 남의 글을 꼬투리 잡고 물어뜯는 것이 유일한 자존감 유지 비결인 골방 평론가들이 넘쳐난다. 그런 험한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스트레이트하게 쓰는 것은 마조히즘이다. 충무공 정신으로 한사코 논지를 감춰야 한다. 이런 엄폐술의 최고봉은 당신 자신까지 속이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난 누구? 여긴 어디?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59
층위, 서사, 지점(절대로 그냥 ‘주목할 점’이라고 하면 안 된다. ‘주목할 지점’이라고 해야 함), 착종, 아포리아, 디아스포라(이 두 개를 혼동하지 말 것),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불어이기에 더 큰 효과가 있다. 천박하게 ‘시뮬레이션’이었다면 아마 아무도 안 썼을 것이다. ‘미슐랭 가이드’와 ‘미셰린 가이드’의 어감 차이를 생각해보라), 타자, 권력, 자기복제, 반영……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60
이것들을 가져다가 마음껏 돌려막기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당신 스스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한껏 분리되어 허공을 떠도는 몰아지경沒我之境에 빠지게 된다. 충동의 층위에서 욕망의 층위로 이동하는 지점에서 서사는 붕괴되고 주체의 환상이 타자의 향유에 대한 방어로 착종되는 생의 본원적 비극성에 도달하여 우리는 비로소 자아의 인지부조화에 각성하고 마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60
덧붙여 흥미로운 것은 당연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얘기를 할 때도 굳이 ‘개인적으로’를 덧붙이는 강박증도 자주 관찰된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크림 파스타를 좋아해." 이런 얘기를 길게 듣다보면 나는 개인적으로 하품이 나고 개인적으로 소변이 마려워진다. 이 비법의 장점은 에볼라처럼 전염된다는 것이다. 당신 페북에 이 기술을 시전하면 틀림없이 소싯적 문학 소년소녀였던 아재, 아지매들이 퍼덕퍼덕 낚시를 물어 "제 상념을 맴돌던 언어들을 어쩜 그리 명징하게 포착하셨는지요"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등등의 댓글을 달며 집단 환각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예술의 본질 역시 짝짓기 활동이 아니겠는가. 아, 죽은 글쓰기는 사랑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61
그놈의 ‘아브락사스’ 운운이 소피 마르소 사진만큼이나 흔하게 여기저기 쓰이고 있다는 걸 알고 난 뒤에는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아하스 페르츠’로 갈아타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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