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 괜찮으시다면 파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사월의 신선한 아침에 맞이하는 그 푸르름 말입니다. 벨벳의 부드러움과 눈물의 반짝임이 담겨 있는 푸르름이지요.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테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처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약돌, 갓난아이의 눈물 같은 다이아몬드가 담겨 있지요. - P17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 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 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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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념적 스승이었던 마르크스는 서유럽 민주주의사회가 내세운 ‘개인의 자유’를 냉소적으로 비판했지만 자유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이가 온전하게 자유를 누리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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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은 타고난 무정부주의자여서 단 하나의 불꽃만 던져도 혁명의 에너지를 터뜨릴 수 있다고 한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의 말이 그들의 지침이 됐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84

어떤 정파는 노동자의 수가 적고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하는 노동자는 더 적으니 지금은 차르 정부와 싸우는 자본가계급과 민주주의자들을 지원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일단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해 정치적 자유를 확보한 다음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노동자를 조직하자는 단계론을 편 것이다. 다른 정파는 자본가계급의 권력도 차르 체제와 다를 바 없는 소수자의 독재이니 당장 권력을 장악해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한꺼번에 해치우자고 했다. 이 정파의 우두머리가 레닌이었다. 레닌은 차르 정부를 타도하고 세울 정부를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또는 ‘절대다수의 소수에 대한 독재’라고 했다. 레닌 그룹은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를 자처하면서 반대파를 멘셰비키(Mensheviki, 소수파)라 했다. 두 정파는 1905년 4월 런던에서 연 제3차 당대회 때 완전히 갈라섰고 1917년에는 총을 들고 서로를 죽였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89

헌법은 주어졌다. 집회의 자유는 주어졌다. 그러나 군대는 집회를 포위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주어졌다. 그러나 검열은 전과 다름없이 존재한다. 인간의 불가침성은 주어졌다. 그러나 감옥은 투옥된 사람으로 넘쳐난다. 헌법이 주어졌다. 그러나 전제정은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주어졌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90

레닌은 러시아가 자본주의 후진국이라 사회주의혁명은 시기상조라는 멘셰비키의 견해를 비판하려고 홉슨의 이론을 써먹었다. 제국주의는 국가재정을 투입해 극소수 투자자와 기업의 이익을 지켜주는 정책이어서 사회적으로 불필요하고 국민경제에 해롭다는 것이 홉슨의 견해였다. 그것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레닌은 홉슨의 이론을 비틀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했다. 홉슨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그가 레닌과 같은 이론을 제시했다고 오해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99

"제국주의는 본국의 프롤레타리아 상층을 매수하고 포섭해 혁명을 예방한다." 레닌은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회주의혁명은 선진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러시아 같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다. 그게 법칙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는 당장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패전은 혁명을 촉진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조국이 전쟁에 패배하게끔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레닌의 주장이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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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지식 청년의 지적 반항’이라는 평을 들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는 예전의 내가 있었다. 열정은 넘치지만 공부는 모자란, 열심히 배우지만 사유의 폭은 좁은, 의욕이 지나쳐 논리적 비약을 일삼는, 공감하기보다는 주장하는 데 급급한, 현학적 문장을 지성의 표현으로 여기는, 글쓰기의 기초가 약한 젊은이가 보였다. 그런 모습으로 누구의 서가에 놓이는 것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책을 거두어들였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11

오래된 책을 다시 쓰면서 세상과 나의 변화를 돌아보았다. 달라진 세상을 대하는 소회는 「에필로그」에 적었으니 여기에서는 ‘나의 변화’만 이야기한다. 나는 역사의 발전을 예전처럼 확신하지 않는다.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집단적 의지와 실천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한 번의 사회혁명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지만 생물학적 본능의 한계로 인해 호모사피엔스가 스스로 절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항하는 청년’이 ‘초로(初老)의 남자’가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자들 덕분에 인간의 물리적 실체와 생물학적 본성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어 그러는지도 모른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12

"나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오늘 나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부디 나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나는 고발한다』, 책세상, 2005, 106·108쪽.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35

19세기 막바지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건이 왜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끌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첫 번째 이유는 ‘인간적 요소’일 것이다. 드레퓌스 가족은 서로 믿고 사랑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참혹한 불운과 시련을 이겨냈다. 반전을 거듭한 드라마의 주인공들,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고 부당한 비난과 박해를 감수하며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드러낸 피카르 중령, 지성과 열정의 화신 졸라, 끝까지 책임을 다한 클레망소, 언론의 선동과 반유대주의자의 집단 광란을 이성의 힘으로 이겨낸 시민들,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심 요구파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연대한 세계의 지식인들, 그들은 인간이 어리석고 때로 기괴하지만 지적 재능과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44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 대통령의 말을 오해했다. 그가 거론한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은 식민지와 종속국의 자주권을 존중하거나 보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패전국의 식민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자는 말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한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옛 영토를 처리하는 원칙이었을 뿐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은 끝나지 않았고, 더 무서운 전쟁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70

제1차 세계대전은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의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인류는 무력행사를 절제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겨우 20여 년 뒤에 더 끔찍한 전쟁을 또 벌였다. ‘위대한 조국’을 들먹이며 민중을 현혹해 싸움터로 내모는 권력자와 정치인은 지금도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661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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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하루하루는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무엇 때문에 내일을 걱정한단 말인가. 오늘이야말로 모든 것에 대한 훌륭한 해답이 되어줄 것을. 당신 안에는 신을 향한 미소 어린 믿음과도 흡사한 난공불락의 태평스러움이 자리한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차라리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13

변함없이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늘 그렇듯 거짓은 한마디도 찾을 수 없다. 통상적인 말, 실체가 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다. 관념을 섬기고 거짓을 섬기는, 구름 잡는 말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하며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조급한 목소리로 병적인 지성을 과시하는 신문기자들의 말보다 세상을 훨씬 더 투명하게 보게 해준다. 그녀의 글이 당신 마음에 와닿는 건 당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맛보는 감동과도 흡사하다. 꾸밈없는 현존과, 세상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존재 방식.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19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2

피로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생각거리들 중 하나이다. 피로는 질투 같고, 거짓말 같고, 두려움 같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이런 불순한 것들을 닮아 있다. 그것들처럼 피로는 우리를 땅으로 내려서게 한다. 삶에서 처음 마주치는 피로의 얼굴은 어머니의 얼굴이다. 고독에 지친 얼굴이다. 갓난아이는 꿈과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피로를 가져다준다. 피로가 맨 먼저이다. 밤은 강탈당하고 행복이 숨통을 조여 온다. 사랑과 잠. 피로는 삶의 이 신성한 두 문에 대번 손을 댄다. 피로는 돌 위를 흐르는 물처럼 사랑을 마모시키며, 물에 물을 가져다 붓듯 잠을 쌓아간다. 피로는 사랑을 침범해 들어오는 미개한 잠이며, 광대한 사랑의 숲에 번지는 잠의 불이다. 피로는 나쁜 어머니 같다. 밤중에도 일어나 목소리로 우리를 달래고 품에 안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어머니가 아니다. 피로에 절은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들은 무언가를 쉴 새 없이 하는 사람들이다. 휴식과 침묵, 사랑이 내면으로 파고들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피로에 절은 사람들은 장사를 하고, 집을 짓고, 경력을 쌓는다. 피로를 피하기 위해 그런 일들을 하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피로에 빠진다. 그들의 시간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일을 더 많이 할수록 점점 더 적게 하는 꼴이 된다. 그들의 삶에는 삶이 부족하다. 자신과 자신 사이에 유리벽이 존재한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유리벽을 따라 걷는다. 피로는 그들의 용모와 손과 말에서 드러나 보인다. 그들에게 피로는 일종의 향수이며 불가능한 욕망과도 같다. 그들은 페르스발처럼, 어머니를 떠난 이 젊은 남자처럼, 들판과 강을, 강과 숲을, 산과 들판을 오간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4

장사와 피의 대가와 영예로운 전쟁이 맹위를 떨치던 그런 시대에, 음유시인들은 한 여인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자신들의 노래가 솟구치게 한다. 청명한 하늘에 푸른 불꽃이 치솟게 한다. 출구 없는 세상에 그들은 출구를 만들어낸다. 세상 모든 언어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이름의 문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6

당신은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펼친다.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깊은 독서에 빠진다. 그 시커먼 불길 속으로, 가시투성이 꽃 속으로 들어간다. 〈이피게네이아〉이다. 무수한 굴곡과 에움길과 갈팡댐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여덟 폭 피륙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빛을 발하는 광막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비단결처럼 청명한 하늘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8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 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 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29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 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가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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