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부위는 천차만별. 난 내 취향의 책을 골라서, 그 책 중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휙휙 넘기며 읽는다. 어떨 때에는 한 책에서 단 한 장면, 단 한 구절만 맛있을 수도 있고, 기적같이 한 문장 한 문장 전부를 꼭꼭 씹어 먹으며 맛있어할 수도 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0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떼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 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 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 이야기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2

다시 요약하자면, 남들이 무슨 대단하고 있어 보이는 어려운 책을 읽든 신경쓸 필요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게 엄청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렵다. → 고민 말고 바로 『피케티 쉽게 읽기』, 그것도 안 되면 『초딩도 읽는 피케티』 또는 『만화 피케티』를 읽는다. 능력도 안 되는데 『21세기 자본』 원전을 꾸역꾸역 읽은 사람은 노동만 했을 뿐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만 『만화 피케티』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은 그중 몇 대목만큼은 기억하고 써먹을 수 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3

다만 내 취향의 ‘편식 독서’라도 많이 하다보면 점점 그와 연관된 다른 메뉴들도 찾게 되는 것 같다. 음식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0

독서에 관한 책을 쓰다보니 자괴감이 든다. 솔직히 어린 시절과 달리 책이 최우선순위가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여유 시간이 생길 때 뭘 제일 먼저 집어드는지 스스로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1번이 스마트폰, 2번이 티브이. 책은 3번이다. 예열이 필요 없는 순서,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순서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4

이와 달리 책은 수용하는 속도를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다. 내 경우,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6

책은 빈 공간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끊임없이 여백을 보충하게 만든다.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만든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6

즉각적인 반응이 특징인 뉴미디어 시대에 멈추어 생각하게 만드는 독서의 특징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일단 유보하고, 의심하고,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는 지성적 사고의 훈련은 독서에서 출발하는 것이 여전히 정도正道라고 본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7

티브이나 인터넷의 무수한 선택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수시로 서점에 들러 다양한 책을 구입해놓는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고 보기에 너저분할 정도로 표지가 쉽게 눈에 띄게 눕혀놓는다. 서점에서도 서가에 꽂힌 책과 평대에 누워 있는 책의 생명력은 천양지차다. 책은 고이 모셔놓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8

책으로 노는 방법은 읽기 외에도 많다. 책 모임을 꾸려 책 수다 떨기,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책으로 잘난 척하기, 책 수집하기, 책을 테마로 여행하기…… 그런데 그중 끝판왕은 역시 직접 책을 쓰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나는 성공한 덕후인 것이다(으쓱으쓱)!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39

평생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을 편식하며 읽어왔으니 알게 모르게 내가 쓰는 글에도 그 흔적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다. 움베르트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니 무라카미 류의 『69』이니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같이 어깨에 힘 빼고 킬킬대면서 읽게 되는 글이 내 취향의 글들이라 너무 진지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라고 하면 쓸 능력도 없지만 스스로 몸이 뒤틀려서 견디질 못한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0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을 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나는 그래서 책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그게 싫고 인간들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그악스러움을 보는 게 좋다면 굳이 돈 들여서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공짜로 무수한 샘플을 구할 수 있는데. 그건 공기와도 같이 이미 세상에 가득차 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3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해왔다. 직접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들 사이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타인들이 성큼 내게 다가오면 불쑥 겁부터 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책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고통, 욕망을 배워왔다. 판사가 된 이후의 삶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은 실제 삶이 아니다. 재판 기록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삶이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읽고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6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惡의 실체였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8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9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50

래리 뉴턴은 베이츠 교수의 ‘교도소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영문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독창적 글을 많이 남겼다. 오랜 수업 끝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저지른 폭력 행위와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칭찬받고 싶은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어요.(…) 이젠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제 지적 능력이나 뭐 그런 걸로요."9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54

베이츠 교수와의 셰익스피어 수업을 통해 놀라운 지적 성장을 이룬 래리 뉴턴이 한 학술지에 기고한 에세이가 있다. 그중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수많은 죄수들이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죄수가 여러분 옆에 살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에겐 그들이 좋은, 혹은 나쁜 이웃이 되도록 도와줄 힘이 있습니다. 교육만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입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55

‘왜 하필 셰익스피어?’라는 첫 의문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갱스터 생활을 하던 소년수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목한 지점은(내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또래 집단의 압력’이었다. 뉴턴의 셰익스피어 해석이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도 당연하다. 그는 일반인과 다른 지점에서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다양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도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들의 오욕칠정을 풍부하게 담아낸 고전은 거울이다. 그 앞에 서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마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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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중학생 때 탐독하던 한국문학전집이 다루는 세계는 어땠던가. 기지촌 여성들, 각혈하는 노모, 포장마차, 선술집…… 게다가 지역적으로도 한반도 남쪽에 갇혀 있다. 한국 창작자들의 상상력은 휴전선과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섬 안에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단되고, 가난한 나라의 비극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6

대중소설이야말로 고전적인 극의 서사 구조에 충실했다. 범상치 않은 주인공, 비극적인 운명, 쉴 틈 없이 고조되는 위기, 극적인 반전, 카타르시스를 주는 결말. 그리스 연극과도 같다고나 할까. 낭비되는 장면, 낭비되는 대사가 없다. 삼 초만 지루해도 채널이 돌아가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처럼 끊임없이 흥미를 끌 요소를 빼곡히 채워넣고 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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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버지도 당신의 사후에 대해선 충실한 배려를 하지 못하셨다. 건축업으로 모은 재산으로 많은 부동산을 사두신 사실을 당신 혼자만 간직한 채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고2 때부터 집안은 이미 기울기 시작했지만, 1969년 6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론 완전히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모든 재산을 털어 아버지의 빚을 갚고 나니 알거지가 돼버렸다. 우리 칠 남매는 친척집이나 친구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가 사놓으셨던 부동산의 소재지만 알았어도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505 - P23

내 어린 시절을 언급할 때 파고다공원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의 파고다공원은 지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숲이 아주 울창하고 광활한 도심 속 자연 공간이었다. 광활하다는 건 어릴 적 내가 느꼈던 감각일 것이다. 어렸을 때 신나게 개헤엄을 치며 놀았던 방죽에 어른이 되어 가보면 생각보다 작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8505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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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의도 탐욕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면. 독서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에 쉬운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01

『상실의 시대』는 젊음과 많이 닮았다. 아닌 척하지만 나는 특별하다고 굳건히 믿고, 내 욕망에는 정당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젊은 시절에 느끼는 ‘근원적인 상실감과 고독, 세상의 부조리’의 실체는 실은 충족되지 않는 성욕과 본인 미래에 대한 불안일 때가 많다.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 와타나베 역시 폭력적인 세상에 편입되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관조하려 하지만, 그러는 자신도 역시 본의든 본의 아니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야 만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자꾸 변명을 하고 싶어지는 녀석이지 않을까.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07

뭘 잘 모를수록, 자신이 없을수록 설명이 장황하고 거창해지는 법인데 하루키는 반들반들 손때가 묻은 자기 집 가구에 대해 설명하듯 수월하게 핵심만 딱 짚어 묘사한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를 꿈속 같은 상징과 비유로 뒤덮인 세계를 이야기할 때도 그 속에서 십 년은 실제로 산 사람처럼 구체적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기막히도록 술술 쉽게 풀어낸다. 스웨터에서 실 풀어내는 기계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을 때에는 논리적 사고를 하는 좌뇌는 잠시 쉬게 내버려두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남의 꿈 이야기를 듣듯이 멍하니 읽곤 한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09

말하자면 그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수면 상태에서 끝도 없이 지속되는 꿈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다. 다만 그 꿈을 옮기는 필치는 치열하고 꼼꼼하다. 그는 리얼리즘 문체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非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문체를 사십 년간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13

일본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시골에서 로큰롤』은 1959년생 지방도시 소년이던 오쿠다가 록 음악에 빠져 지낸 소년기를 신나게 회상하는 내용이다. 나는 1969년생이니 십 년 차이가 나는데 일본과 우리나라의 발전 격차 때문인지 시대 격차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맞아 맞아, 이땐 이랬지……’ 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읽으며 로큰롤 소년 시절을 회상했었다. 무라카미 류의 유쾌발랄한 소설 『69』에도 온통 60년대 록 음악의 불온한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19

문화의 힘이란 무시무시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몸은 여기 있지만 머리와 가슴은 미국과 영국에 가 있었던 것이다. 문화적 식민주의니 뭐니 할지도 모르지만, 더 매력적이고, 더 자유롭고, 더 가슴이 뛰는 것에 매료되는 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이 결국 돌에 구멍을 내듯 할리우드 영화와 팝 음악이 상징하는 자유에 대한 동경이 〈아, 대한민국〉과 ‘건전가요’의 시대를 끝내게 만든 근본적인 힘일지도 모른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0

한참 팝과 록에 빠져가는데 집에 있는 건 낡은 더블데크 카세트 라디오 하나. 그래서 공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FM을 듣다가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번개같이 녹음했다. 〈황인용의 영팝스〉(특히 전영혁이 나오는 코너)를 매일 들었다. 듣고 싶은 곡이 점점 많아져서 나중에는 다양한 초식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2

그때만 해도 온갖 촌스런 이유를 붙인 금지곡이 많아서 여기저기 찾아 헤매야 했었다. 평창동 사는 부잣집 친구 집에 가서 떨리는 가슴으로 녹음해 오던 금지곡들은 퀸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 스틱스의 《Mr. Roboto》, 핑크플로이드의 《The Wall》 앨범 등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뿐이다. 5공 시절 문화공보부의 금지곡 담당자들은 사실 명곡만 골라내는 대단한 안목의 소유자들이 아니었을까?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2

갈증은 독재정권이 말기에 접어들 때쯤에야 풀리기 시작했다. 1986년 파고다극장에서 열린 들국화 공연에서 느낀 전율은 어느 해외 밴드의 공연 영상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최고는 〈사랑일 뿐이야〉. 존 레넌처럼 가느다란 최성원의 보컬로 서정적으로 시작한 노래는 주찬권의 천둥소리 같은 드럼(정말 레드제플린의 존 보넘을 연상시켰다)과 전인권의 절규가 끝없이 반복되며 끝났다.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와 〈Come Sail Away〉를 원곡보다 더 멋지게 소화하는 그들을 보며 느낀 감동은 남다른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쾌락독서>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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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음이 떨리는 순간 음악은 이미 환한 빛을 발하며 그곳에 있다. 미약한 시작 속에 성취되어 있다. 그다음은 단순하다. 잇따르는 습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음악이 자신에게 오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느린 걸음으로.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이. 황금 말인 음악을 길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그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다. 당신은 건반 위로 숙여진 아이의 등을 바라본다.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 - 울타리 훨씬 저편, 악보 훨씬 저편에 존재하는 - 맞서기 위한,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고된 작업이다. 배운다는 건 무엇일까?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건 무엇일까?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을, 더없이 생생하고 반항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알라딘 eBook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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