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여러 명의 MC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이나 여러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히어로 영화는 현대사회의 탈중심 현상을 보여 주는 한 예다. 과거에는 어느 것 하나가 중심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식의 수직적 위계가 있는 사회였다면 지금은 여러 개의 중심이 있는 수평적 구조가 특징이다. 컴퓨터를 예로 들자면 과거에는 하나의 중앙 컴퓨터가 있었다면 지금은 여러 대의 개인용 컴퓨터가 병렬로 연결되어 있는 인터넷 시대인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71
이런 골목길 같은 관계망을 어려운 말로 ‘리좀’이라고 부른다. 리좀rhizome은 감자나 고구마 같은 식물의 뿌리 모양을 지칭하는 말인데, 건축에서는 골목길 망처럼 여러 갈래로 엮여 네트워크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73
<라디오 스타>가 ‘탈중심’의 현대사회를 보여 준다면 <마리텔>은 현대사회의 ‘경계의 모호성’을 보여 준다. 현대사회에서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그 공간이 화장실인지 사무실인지 모호해진다. 우리는 카페에서 친구와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공부를 하기도 한다. 카페는 친구와의 만남의 장소도 되고, 도서관도 되고, 사무실도 될 수 있다.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친구와 채팅을 하면 그 공간은 사무실이면서 동시에 사적 공간도 된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공간이 여러 가지 중복된 기능으로 사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사무실은 사무실, 카페는 카페, 도서관은 도서관으로 확연하게 기능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바일 기기의 발전으로 특정 공간이 어느 하나만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대는 지났다. 따라서 사용자의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휴대폰도 과거에는 버튼과 스크린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스마트폰은 화면이 스크린이 되기도 하고 키보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는 하나가 다중적인 기능을 갖는다. 경계의 모호성은 공간과 기기를 넘어 인간에게까지 확대된다. 점점 남녀의 구분이 없어지고, 노인과 청년의 구분도 사라진다. 적어도 패션상으로는 구분이 잘 안 간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74
과거에는 소유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몇 평’으로 계산되는 공간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86
물리학에서 중력 에너지의 영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줄어든다고 배웠다. 예를 들어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의 2배로 늘어나면 중력의 영향은 4분의 1이 된다는 식이다. 이와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건축 공간에서도 이 중력의 법칙은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공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리가 멀면 그 쓰임새는 줄어든다. 중력의 공식이 공원의 쓰임새에도 적용된다면 다음과 같은 계산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4천 평짜리 공원이 있다고 하자. 그 공원이 한 시간을 걸어가야 하는 4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마치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1천 평짜리 공원과 쓰임새가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250평짜리 공원과 쓰임새가 같으며,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60평 정도의 공원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그러니 아주 작은 마당이라고 하더라도 내 방 앞에 있는 마당은 몇 킬로미터 밖의 수천 평 공원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공원이 우리 가까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91
몇 십만 년의 경험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우리는 주광성 동물이 되었다. 교통기관을 타면 답답한 실내 공간 속 기억 때문에 경험이 단절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장소로 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현재 공간 속에 갇히게 된다. 우리의 도시에는 보행자 중심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일인 주거는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인 이유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더 행복해지려면 도시 전체를 내 집처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보행자 중심의 네트워크가 완성되고 촘촘하게 분포된 매력적인 ‘공짜’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 건축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92
사적 공간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공간이 누군가의 사적 공간이 되면 내가 갈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울 같은 대도시가 이렇게 넓고 고층 건물이 많아져도 사실 내가 가서 정주할 수 있는 공간의 총량은 더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96
자동차, 헤드폰, 장갑, 선글라스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내 공간을 만들려는 장치들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1
제한된 도시 공간에서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맞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황금 비율을 찾아내야 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2
아이들에게 학교, 학원, 집 모두 부모 감시하의 공간인 것이다. 청소년에게는 감시에서 벗어난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학생이 스타벅스에 가듯 10대들은 편의점에 간다. 천 원에 과자 한 봉지를 사면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놀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3
우리나라의 경우 집의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은 신발을 신느냐 벗느냐로 나뉜다. 신을 벗으면 실내, 신으면 외부다. 그런데 툇마루는 신발을 벗었지만 동시에 바깥 공기에 접하는 공간이다. 내부와 외부 두 가지 성격을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당 주변으로 있는 사이 공간인 툇마루와 대청마루 덕분에 마당에 서 있어도 따뜻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현대 도시에서 이 사이 공간의 역할은 발코니가 한다. 발코니에 널린 빨래나 그 위에서 쉬는 사람들의 풍경이 도시의 얼굴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발코니 확장법’ 때문에 발코니가 멸종됐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5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점점 발달할수록 모든 사람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어 간다. 점점 소립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하나의 기계처럼 잘 돌아가는 도시 조직 내에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 도시는 내가 없어도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12
도시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간은 소외되지만 동시에 익명성에 따른 자유를 얻기도 한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반경 10킬로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사이였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를 당하고 뉴스거리가 될 수 있다. 반면 지금의 도시민들은 어디를 가든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느끼는 그런 편안함이 일상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군중 속의 외로움’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는 ‘군중 속의 자유’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 갔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주부가 문을 잠그고 외출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집에 있으나 없으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변인들이 간섭하지 않는 자유를 가졌다는 뜻이다. 그게 우리의 도시 생활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12
현대사회의 공간적 특징은 "변화하는 미디어가 자연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18
사람은 본능적으로 오락적 자극을 찾는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자연 공터에서 잠자리나 물방개를 잡으며 뛰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TV 시청은 저녁 6시에 나오는 만화영화 보는 게 고작이었다. 세월이 흘러 공터는 줄고 대신 영상 매체의 볼거리는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모니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변화하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우리 뇌를 자극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인데 문제는 이런 영상 매체로 자극을 받다 보면 우리는 점점 더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4
이처럼 자연에 대한 욕구, 외부 자극,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스마트폰이 주는 자유가 합쳐져서 최근 들어 사람들이 점점 더 골목길 상권을 찾게 되는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5
지금처럼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강북 골목길은 사람이 정주하는 공간이었다. 동네 주민의 거실이라고 할 만큼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콩나물 다듬고 할머니들이 담소 나누는 장소였고,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공간이었다. 골목길은 무엇보다도 ‘자연이 있는 외부 공간’이다. 하늘이 보이고, 1년 365일 24시간 달라지는 자연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6
마당이 있고 집 옆에는 골목길이 있던 단독주택에서 복도와 계단실이 있는 아파트로 급격히 변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골목길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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