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여러 명의 MC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이나 여러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히어로 영화는 현대사회의 탈중심 현상을 보여 주는 한 예다. 과거에는 어느 것 하나가 중심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식의 수직적 위계가 있는 사회였다면 지금은 여러 개의 중심이 있는 수평적 구조가 특징이다. 컴퓨터를 예로 들자면 과거에는 하나의 중앙 컴퓨터가 있었다면 지금은 여러 대의 개인용 컴퓨터가 병렬로 연결되어 있는 인터넷 시대인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71

이런 골목길 같은 관계망을 어려운 말로 ‘리좀’이라고 부른다. 리좀rhizome은 감자나 고구마 같은 식물의 뿌리 모양을 지칭하는 말인데, 건축에서는 골목길 망처럼 여러 갈래로 엮여 네트워크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73

<라디오 스타>가 ‘탈중심’의 현대사회를 보여 준다면 <마리텔>은 현대사회의 ‘경계의 모호성’을 보여 준다. 현대사회에서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그 공간이 화장실인지 사무실인지 모호해진다. 우리는 카페에서 친구와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공부를 하기도 한다. 카페는 친구와의 만남의 장소도 되고, 도서관도 되고, 사무실도 될 수 있다.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친구와 채팅을 하면 그 공간은 사무실이면서 동시에 사적 공간도 된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공간이 여러 가지 중복된 기능으로 사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사무실은 사무실, 카페는 카페, 도서관은 도서관으로 확연하게 기능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바일 기기의 발전으로 특정 공간이 어느 하나만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대는 지났다. 따라서 사용자의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휴대폰도 과거에는 버튼과 스크린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스마트폰은 화면이 스크린이 되기도 하고 키보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는 하나가 다중적인 기능을 갖는다. 경계의 모호성은 공간과 기기를 넘어 인간에게까지 확대된다. 점점 남녀의 구분이 없어지고, 노인과 청년의 구분도 사라진다. 적어도 패션상으로는 구분이 잘 안 간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74

과거에는 소유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몇 평’으로 계산되는 공간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86

물리학에서 중력 에너지의 영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줄어든다고 배웠다. 예를 들어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의 2배로 늘어나면 중력의 영향은 4분의 1이 된다는 식이다. 이와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건축 공간에서도 이 중력의 법칙은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공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리가 멀면 그 쓰임새는 줄어든다. 중력의 공식이 공원의 쓰임새에도 적용된다면 다음과 같은 계산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4천 평짜리 공원이 있다고 하자. 그 공원이 한 시간을 걸어가야 하는 4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마치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1천 평짜리 공원과 쓰임새가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250평짜리 공원과 쓰임새가 같으며,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60평 정도의 공원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그러니 아주 작은 마당이라고 하더라도 내 방 앞에 있는 마당은 몇 킬로미터 밖의 수천 평 공원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공원이 우리 가까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91

몇 십만 년의 경험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우리는 주광성 동물이 되었다. 교통기관을 타면 답답한 실내 공간 속 기억 때문에 경험이 단절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장소로 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현재 공간 속에 갇히게 된다. 우리의 도시에는 보행자 중심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일인 주거는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인 이유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더 행복해지려면 도시 전체를 내 집처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보행자 중심의 네트워크가 완성되고 촘촘하게 분포된 매력적인 ‘공짜’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 건축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92

사적 공간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공간이 누군가의 사적 공간이 되면 내가 갈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울 같은 대도시가 이렇게 넓고 고층 건물이 많아져도 사실 내가 가서 정주할 수 있는 공간의 총량은 더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96

자동차, 헤드폰, 장갑, 선글라스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내 공간을 만들려는 장치들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1

제한된 도시 공간에서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맞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황금 비율을 찾아내야 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2

아이들에게 학교, 학원, 집 모두 부모 감시하의 공간인 것이다. 청소년에게는 감시에서 벗어난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학생이 스타벅스에 가듯 10대들은 편의점에 간다. 천 원에 과자 한 봉지를 사면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놀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3

우리나라의 경우 집의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은 신발을 신느냐 벗느냐로 나뉜다. 신을 벗으면 실내, 신으면 외부다. 그런데 툇마루는 신발을 벗었지만 동시에 바깥 공기에 접하는 공간이다. 내부와 외부 두 가지 성격을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당 주변으로 있는 사이 공간인 툇마루와 대청마루 덕분에 마당에 서 있어도 따뜻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현대 도시에서 이 사이 공간의 역할은 발코니가 한다. 발코니에 널린 빨래나 그 위에서 쉬는 사람들의 풍경이 도시의 얼굴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발코니 확장법’ 때문에 발코니가 멸종됐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05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점점 발달할수록 모든 사람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어 간다. 점점 소립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하나의 기계처럼 잘 돌아가는 도시 조직 내에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 도시는 내가 없어도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12

도시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간은 소외되지만 동시에 익명성에 따른 자유를 얻기도 한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반경 10킬로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사이였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를 당하고 뉴스거리가 될 수 있다. 반면 지금의 도시민들은 어디를 가든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느끼는 그런 편안함이 일상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군중 속의 외로움’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는 ‘군중 속의 자유’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 갔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주부가 문을 잠그고 외출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집에 있으나 없으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변인들이 간섭하지 않는 자유를 가졌다는 뜻이다. 그게 우리의 도시 생활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12

현대사회의 공간적 특징은 "변화하는 미디어가 자연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18

사람은 본능적으로 오락적 자극을 찾는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자연 공터에서 잠자리나 물방개를 잡으며 뛰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TV 시청은 저녁 6시에 나오는 만화영화 보는 게 고작이었다. 세월이 흘러 공터는 줄고 대신 영상 매체의 볼거리는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모니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변화하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우리 뇌를 자극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인데 문제는 이런 영상 매체로 자극을 받다 보면 우리는 점점 더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4

이처럼 자연에 대한 욕구, 외부 자극,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스마트폰이 주는 자유가 합쳐져서 최근 들어 사람들이 점점 더 골목길 상권을 찾게 되는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5

지금처럼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강북 골목길은 사람이 정주하는 공간이었다. 동네 주민의 거실이라고 할 만큼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콩나물 다듬고 할머니들이 담소 나누는 장소였고,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공간이었다. 골목길은 무엇보다도 ‘자연이 있는 외부 공간’이다. 하늘이 보이고, 1년 365일 24시간 달라지는 자연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6

마당이 있고 집 옆에는 골목길이 있던 단독주택에서 복도와 계단실이 있는 아파트로 급격히 변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골목길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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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는 사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변하고 시시각각 다른 태양빛이 들지만 거실에는 변화가 없다. 변함없는 벽지와 항상 똑같은 형광등 조명뿐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유일하게 화면이 변하는 TV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게임에 빠진다. 우리 아이들의 생활에는 외부 공간이 없다. 그 말은 자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1년 열두 달, 12년 동안 실내 공간에서만 지낸다고 생각해 보라. 항상 똑같은 교실에 갇혀 지내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35

이들은 공평과 평등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똑같은 공간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학교 건축물을 양산하고 있다. 평등과 전체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숭고하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평등을 획일화를 통해 이루려 한다. 평등은 다양성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49

마당이 주는 자연의 변화가 내 해석이 필요한 요리하기 전의 재료라면 TV 속 이야기는 가공식품과도 같다. 가공식품이 있으면 내가 요리할 가능성이 없어진다. 우리에게 밀가루와 버터가 주어지면 각자 다른 빵을 만들지만, 만들어진 빵이 주어지면 먹고 살만 찐다. 지금 우리의 주거 공간은 인스턴트식품 같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53

아이들은 ‘시간’만 있으면 ‘공간’을 찾아서 ‘장소’로 만든다. 아이들은 천재 건축가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공간을 찾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 주변에는 점점 의미 있는 장소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주자. 그래야 아이들에게 이 도시가 더 좋은 공간이 될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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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이야기지." 가후쿠는 말했다. "‘아아, 서글프다. 무슨 수가 없을까. 나는 이제 마흔일곱이야. 예순에 죽는다 해도 앞으로 십삼 년이나 더 살아야 해. 너무 길어. 그 십삼 년을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뭘 하면서 하루하루를 메꿔나가지?’ 그 당시 사람들은 대개 예순 살에 죽었어. 바냐 아저씨는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는지도 모르지."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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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는 벌써 십이 년째 그 사브를 몰았고, 주행거리는 십만 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캔버스 지붕도 점점 추레해져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는 틈새로 물이 새지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새 차를 살 마음이 없었다. 지금까지 큰 말썽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이 차에 개인적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차 지붕을 열고 운전하는 게 좋았다. 겨울에는 두툼한 코트에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여름에는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핸들을 잡았다. 기어를 올리고 내리는 것을 즐기며 도쿄 시내를 이동하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이며 전깃줄에 앉은 새들을 관찰했다. 그런 일들은 이제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부였다. 가후쿠는 사브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레이스 전에 말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꼼꼼하게 점검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13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 뚱뚱하지는 않지만 어깨가 넓고 몸이 탄탄해 보였다. 목덜미 오른쪽에 큼직한 올리브만한 보라색 타원형 반점이 있었지만 본인은 그게 남들 눈에 띄는 것에 딱히 저항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는 걸리적거리지 않게 뒤로 묶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오바가 말했듯이 몹시 퉁명스러운 인상이었다. 뺨에는 여드름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눈은 크고 눈동자가 또렷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의심 많은 듯한 빛을 띠었다. 눈이 큰 만큼 그 색깔도 짙어 보였다. 두 귀는 넓고 커서 마치 산간벽지에 세워둔 수신기 같았다. 5월에 입기에는 좀 두툼하다 싶은 남성용 헤링본 재킷에 갈색 면바지를 입고 검정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었다. 재킷 안에는 흰색 긴소매 티셔츠, 가슴은 상당히 큰 편이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14

가는 길에 가후쿠는 항상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조수석에서 거기에 맞춰 대사를 읊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겨 번안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였다. 그는 바냐 아저씨 역을 맡았다. 대사는 전부 완벽하게 암기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날마다 따라 욀 필요가 있었다. 오랜 습관이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0

가후쿠는 그녀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그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강하게 마음을 빼앗겼고, 아내가 죽을 때까지(그때 그는 마흔아홉 살이었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혼생활 동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2

그가 떠난 뒤, 가후쿠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그와 악수한 손바닥을 펴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다카쓰키의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그 손이, 그 손가락이 아내의 벗은 몸을 쓰다듬었다, 고 가후쿠는 생각했다. 시간을 들여, 구석구석. 가후쿠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나는 무얼 하려는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됐건 그는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5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카쓰키는 분명 후자였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7

그날 밤은 아오야마의 작은 바에서 술을 마셨다. 네즈 미술관 뒷골목의 눈에 띄지 않는 가게였다. 마흔 안팎의 말수 적은 남자가 항상 바텐더로 있고, 구석 장식장 위에서는 비쩍 마른 회색 고양이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이 바에 붙어사는 근처 길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오래된 재즈 레코드가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갔다. 그런 분위기가 맘에 들어 전에도 둘이서 몇 번 찾아갔던 가게였다. 그들이 만날 때는 왜 그런지 비가 내릴 때가 많았는데, 그날도 가랑비가 흩뿌렸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0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가후쿠는 말했다. "내가 그녀를—적어도 중요한 일부를—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 그건 아마도 영원히 이해되지 못한 채 끝나겠지.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작고 단단한 금고처럼.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1

"내가 아는 한, 가후쿠 씨 부인은 정말로 멋진 여자였어요. 물론 내가 안다고 해봐야 가후쿠 씨가 아는 것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그런 멋진 사람과 이십 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걸 가후쿠 씨는 뭐가 어찌됐건 감사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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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민의 60퍼센트는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 산다. 그중에서도 대형 건설사의 대형 아파트 단지를 선호한다. 많은 청년들이 창업보다는 대기업이나 공무원 같은 대형 조직을 선호한다. 우리 의식에는 도전이나 모험보다는 큰 단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거나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한다. 심지어 우리는 중국집에 가서도 짜장면으로 통일하려고 한다. 누구 하나가 볶음밥을 시키면 ‘좀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한다. 원래 사람마다 다른 걸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좀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보면 다르다고 느끼지 않고 틀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표현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의식 속에 ‘다른 것=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아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현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24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교도소 혹은 연병장과 막사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12년 동안 생활한 아이들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실로 구성된 대형 교사에서 12년 동안 키워지는 아이들을 보면 닭장 안에 갇혀 지내는 양계장 닭이 떠오른다. 남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실에서 자라난 사람은 똑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할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25

학교 외에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또 다른 시스템으로 전화기, 자동차, 비행기가 있다. 이 네 가지 발명이 새로운 근대사회를 만들었다. 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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