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넘게 구축되어 온 아파트 중심의 도시가 불편하다면, 모두 똑같이 생긴 공간에서 살며 서로 비교하고 돈으로 평가하는 삶터가 피로하다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처럼 아파트 담장을 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좀 더 다양한 선택지와 다듬어진 길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값만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계산법은 너무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개인들의 삶과 취향을 중심에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집의 선택지가 다양해진다면 어떨까.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9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은 "건물을 만드는 것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공간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표준화된 방 개수와 매매 가격만 따지는 아파트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획일화된 아파트 대신 너다운 집과 나다운 집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너무 쉽게 비교하고 평가하고 좌절하는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10

어찌 보면 한국인의 유별난 카페 사랑도 결국 집에서 파생된 공간 문화다. 한국인은 공간을 소비하기 위해 카페로 간다. 카페는 이른바 ‘공유형 거실’이자 ‘모두의 거실’로 기능한다. 방의 집합체인 집과 달리 카페는 답답하지 않은 공간이다. 상업 공간이라 천장고가 높고, 통창도 많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식물도 많다. 볕 좋은 날에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인기다.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날씨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팬데믹 시대에는 함께 쓰는 카페가 위험해졌다. 집이 갑갑해지면 카페에 가던 한국인의 생활 패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16

하지만 그렇게 둘러본 늙은 삶터는 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관통하는 이슈는 두 가지, 재개발 또는 재생이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고, 도시의 생명을 연장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같다. 허물고 아파트를 새로 짓거나(재개발),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하는(재생) 식이다. 여기서 재생은 공공에서 주도한 ‘벽화 칠하기’ 재생이 아닌, 상권이 개발되면서 민간에서 주도한 동네 리모델링을 뜻한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2

집은 어느 날 우리에게 왔다. 마치 처음 만난 순간 이 사람과 결혼하겠구나 싶었다는 영화 대사 같아 정말 쓰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다. 서울에서 시골 찾기를1년 넘게 했지만 마땅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휴대전화 사진 폴더에 "서울에 많고 많은 집 중에 왜 우리 집은 없냐!"와 같은 타령을 얹은 술병 사진이 쭉쭉 늘던 어느 날이었다. 알고 지내던 목수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가 ‘집 찾아3만 리’를 꽤 오래 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이였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28

프랑스 태생의 스위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숱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고서도, 말년에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에4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나의 궁전’이라 부르면서 말이다.2017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전시를 열었을 때 실제 사이즈로 구현해 놓은4평 오두막이 전시장에 놓여 있었다. 바다를 볼 수 있게 큰 창을 냈지만 실내는 매우 작았다. 집 밖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기에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지만,4평 오두막은 분명 우리에게 물었다. 정말 우리한테 필요한 삶터의 면적은 얼마일까.20평대 다음은30평대, 그다음은40평대 순으로 아파트 공급 면적에 따라 단계적으로 늘려가는 것이 순리인 양, 성공한 삶인 양 사는 것은 아닐까. 정말 내게 맞는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이 클수록 더 많은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 물건들은 정말 필요한 걸까.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당이었고, 한옥은 마당 품은 옛 나무집으로 여겨졌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1

하지만 서촌은 볕이 참 따스했다. 안온한 동네였다.2010년 서울시의 한옥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서촌은 무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길이 있는 동네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작은 광장처럼 트인 공간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체부동 너른 마당’이라 불렀다. 집은 마당 끄트머리에 있었다. 너른 마당은 스페인 어느 소도시에서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걷다 만난 소칼로(광장) 같았다.
골목길에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 서울로 온 것만 같은 분위기랄까. 너른 마당에는 어느 집에선가 널어놓은 고추가 볕에 바짝 말려지고 있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사람 길이라 조용하고 편했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2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공유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걷는 것을 운동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출퇴근만으로도 하루에1만 보는 거뜬히 채워진다. 물론 아주 가끔씩 차가 필요할 때는 공유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다. 언젠가 서울을 떠나 대중교통이 불편한 시골로 가게 된다면 그때 차를 살 생각이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4

타인의 시선을 섞어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뚜벅이의 삶을 중심에 놓기로 했다. 아는 목수가 집의 존재를 알린 지 일주일 만에 우리는 집주인과 직거래하여 집을 샀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옛 동네의 무너져 내리고 있는 한옥이 우리 집이 됐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35

오로지 편의만을 좇느라 잊었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치코는 추운 겨울 따끈한 찐빵을 먹기 위해 초여름부터 팥을 심었다. 팥 꼬투리를 일일이 따 수확한 뒤 팥알을 까서 잘 말리는 게 중요하다. 찐빵에 들어갈 팥소를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다. 팥을 삶을 때 설탕을 너무 빨리 넣으면 아무리 삶아도 팥이 무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눌러 으깨질 참에 설탕을 넣어야 맛있고 달달한 팥소를 만들 수 있다. 편의점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찐빵은 실로 어려운 음식이라는 것, 팥을 수확하고 팥소를 만들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담담히 보여준다. 작은 팥알이 여물어 팥소가 되고 찐빵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며 지금까지 애쓰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 같아 위로를 받곤 했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40

환상의 팀플레이를 기억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다. 진택이 끈질기게 입고 또 입어 구멍이 여럿 난 팬티 두 장. 나는 낡디낡아 특히 구멍이 많은 것을 선별해 ‘낭(걸)인 팬티’라 이름 붙이고 가보로 보관하기 위해 고이 간직하고 있다. 볼 때마다 잠깐 아련하고 아주 오래 웃기다. 말로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이 모습이 잘 전달이 안 된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비주얼을 가졌기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을 잘 전달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얼마나 입으면 팬티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거지?’ 싶어 절로 집중하게 만들기에 복잡한 세상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한다. 무엇보다 매사에 ‘개썅마이웨이’ 정신으로 당당하게 살며, 최대한 서로 웃기며 즐겁게 살자는 정신까지 담은 훌륭한 가보다. 물론 오늘도 진택은 이 가보를 호시탐탐 버리려고 애쓰고 있지만. 나는 총력을 다해 아주 잘 감춰뒀고 평생 꺼내 보며 아련하게 오래 웃을 참이다. 큭큭.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파트가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삶터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아파트 밖 동네는 방치됐다. 어렵게 어렵게 내 집을 새로 지을 수 있어도 낙후한 동네 인프라를 바꾸긴 힘들었다. 단지 안의 안락한 생활은 집단으로 뭉친 개인들이 투자한 결과였고, 단지 밖의 험난한 삶은 집단이 되지 못한 개인들이 발버둥 치다 포기한 결과였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신인’이었다. 아직 젖내 나는 풋내기 간부, 성공 가도에 들어선 전문직 종사자였다. 그들 대부분이 프티 부르주아 출신이었지만 그 가치관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질투와 절망 섞인 감정으로 그랑 부르주아가 누리는 안락함과 사치, 그 완벽함을 곁눈질했다. 유산은 기대할 수 없었다. 제롬과 실비의 친구들을 통틀어 단 한 명만이 부유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는데 프랑스 북부의 나사(羅絲) 도매상으로 실속 있는 자산가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0

그들 그룹을 진지하게 분석해 보면 서로 다른 성향과 숨은 불화를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꼼꼼하고 깐깐한 사회 분석가라면 반목과 상호 간의 소외, 잠재된 증오를 벌써 밝혀냈을 것이다. 가끔 뜻하지 않은 충돌, 숨어 있던 상처의 말들, 은근하던 불화의 기운이 서로에 대한 반목의 불씨를 타오르게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름답던 우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2

마치 처음 알았다는 듯 매우 놀라워하며, 자신들이 후하다고 믿고 있던 아무개가 사실은 쩨쩨하기 이를 데 없고, 또 다른 누구누구는 냉정한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히고는 했다. 패가 갈리고 절교가 잇따랐다.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굴면서 사악한 쾌락을 맛보기도 했다. 등을 돌린 상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도 하고, 냉담과 함께 멀어질 대로 멀어진 거리가 그대로 지속되기도 했다. 서로를 외면하고 끊임없이 피할 만한 구실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다가 결국에는 사과와 용서, 따뜻한 화해를 했다. 뭐라 해도 그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2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함께 잊는 것, 기분전환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술을 좋아해서 많이, 자주, 함께 마셨다. 도누 거리의 해리스 뉴욕바라든가 팔레`–`루아얄의 카페들, 발자르, 리프, 그리고 몇 군데를 들락거렸다. 뮌헨 맥주, 기네스, 진, 아주 뜨겁거나 아주 차가운 펀치, 과일주를 좋아했다. 가끔 저녁 시간을 온통 술을 마시며 보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이어 붙인 테이블 두 개에 끼어 앉아 자기가 누리고 싶은 삶에 대해, 앞으로 쓸 책에 대해,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 보았거나 앞으로 볼 영화에 대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정치 상황에 대해, 앞으로의 휴가에 대해, 과거의 휴가에 대해, 시골로의 바람 쐬러 가기나 브루게,12) 앙베르,13) 바젤14)로의 짧은 여행에 대해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가끔 집단 망상에 빠져 거기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암묵적 공모로 끊임없이 허우적거리고는 했다. 그러다 결국 현실감각을 완전히 잃고 마는 것이었다. 이때쯤이면 무리 중 누군가 손을 슬그머니 올렸다. 웨이터가 빈 그릇을 치우고 다른 요리를 내오면 대화는 점점 늘어져서 나중에는 자신들이 방금 마신 것, 그들의 취기, 갈증,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로만 이어졌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3

그들은 자유에 탐닉했다. 세상 전체가 손안에 있는 듯했다. 그들이 느끼는 갈증의 리듬에 충실했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열정은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걷고, 달음질치고, 춤추며, 노래할 수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3

그들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담배를 끊겠다든가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 또는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4

모두 열 명 정도였다. 뜰로 난 창에 불 켜진 좁은 아파트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까끌까끌한 벨벳 소파가 알코브 안쪽에 놓여 있었다. 2인용 소파에 세 명이 끼어 앉아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앞에 두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와 풋스툴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밤새도록 먹고 마셨다. 넘치도록 풍부했지만, 음식들의 조합은 기괴했다. 사실, 엄격히 따지면, 요리법은 형편없었다. 구운 고기와 새고기에 소스가 하나도 곁들여지지 않았다. 채소라면, 튀긴 감자 아니면 삶은 감자였다. 월말에는 파스타 또는 올리브나 안초비를 곁들인 리조토를 먹었다. 다른 요리법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복잡한 요리법은 멜론 포르토, 바나나 플람베,16) 크림오이 정도였다. 몇 년이 흘러서야 음식에 예술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요리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무엇보다 즐겨 먹던 음식들이 실은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날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5

무엇보다 영화가 있었다. 분명히, 영화는 그들의 감수성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모델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나이로 보나 받은 교육으로 보나 그들은 영화 1세대에 속했다. 이들에게 영화는 예술 이상으로 하나의 진리였다. 그들은 늘 영화를 보았고 어정쩡한 형태로 아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영화의 걸작과 신화를 꿰뚫어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와 함께 성장했다고 느꼈으며, 그들 이전의 누구보다도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6

그들은 영화광이었다. 영화는 첫째로 꼽는 열정이었다. 거의 매일 밤 영화에 빠져들었다. 화면을 사랑했다. 장면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우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끌어당기고, 매혹적이고, 사로잡는 면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공간과 시간, 움직임을 새로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뉴욕 거리의 소용돌이와 열대 지방의 나른함, 술집의 폭력이 재미있었다. 그들은 무턱대고 에이젠슈타인이나, 브뉘엘, 안토니오니, 아니면 카르네, 비더, 알드리치, 히치콕 같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둔한 마니아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절충주의자도 아니었다. 비평 능력을 상실한 이 유치한 축들은 스카이블루를 하늘색으로 표현했다고, 시드 채리스가 입은 밝은 빨강 원피스가 로버트 테일러의 짙은 빨간색 소파와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고 극찬하는 이들이었다. 실비와 제롬, 그 친구들은 취향이 분명했다. 소위 진지하다는 영화를 특별히 경계했다. 이러한 그들의 분류는 이 타이틀을 달지 않은 필름들을 더 돋보이게 했다. (어쨌든 그들이 옳긴 옳았다. 「마리앙바드」, 쓰레기 같은 영화!) 서부극, 스릴러, 미국 코미디물에 대해서는 지나친 호의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신기한 모험물에 열광했는데 내용의 비약과 화려한 화면, 설명 불가능하리만치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과장된 영화들이었다. 이런 영화들 중에 「롤라」, 「운명의 기로」, 「마법에 빠진 사람들」, 「바람에 쓴 편지」 같은 것은 이들의 기억 속에 늘 남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7

그들과 친구들은 이렇게 살았다. 작고 뒤죽박죽인 아파트였지만, 산책과 영화, 함께하는 우정 어린 식사, 멋진 계획들이 있어 달콤했다. 그들은 불행하지 않았다. 찰나적이고 아스라한 삶의 행복들이 일상에 빛을 주었다. 어떤 날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포도주병을 비우고, 안주를 씹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떤 밤에는 잠들지 못하고 베개에 편히 기대 반쯤 누운 상태로 재떨이를 사이에 둔 채,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날은 몇 시간이고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며 산책을 했다. 쇼윈도 앞에서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거침없이 돌아다니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시간도 이제는 그들에게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춥고 맑은 어느 날, 옷을 두툼히 입고 저물녘 길가에서 친구 집을 향해 여유 있게 걸으면 그만이었다. 그럴 때면, 담뱃불을 붙이거나, 군밤 한 봉지를 사고, 역 입구의 인파를 뚫고 빠져나오는 사소한 행동들이 고갈되지 않는 행복의 확실한 증거처럼 보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9

그들은 바보였다. 아, 얼마나 수없이 되뇌었던가. 자신들이 바보 같다고, 틀렸다고, 악착같이 달려들고, 기어오르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신을 덜 차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날들, 게으름 피우며 눈뜨는 아침, 침대 한쪽에 추리소설과 공상과학 소설책을 쌓아놓고 뒹구는 아침나절, 한밤중에 센 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 문득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자유의 느낌, 지방으로 설문 조사를 나설 때마다 드는 휴가 기분을 사랑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4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5

그들 사이에 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었다. 매번 부딪히게 되는 일종의 범퍼 같았다. 가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색함, 옹졸함, 얄팍함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적이나 사상누각에 세운 어리석은 꿈 외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9

사회의 서열 관계를 증오하기로 작정했다. 기적으로라도 해결책은 세상이나 역사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들의 삶이 가장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쉽게 넘겨 버렸다. 근근이 살아갔다. 돈을 쉽게 써버렸다. 사흘 일해 번 돈을 여섯 시간 만에 써버리기도 했다. 자주 꾸러 다녔다. 형편없는 감자튀김을 먹고,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를 나눠 피웠다. 지하철 표 한 장을 찾으려 두 시간 동안 뒤지기도 하고, 꾀죄죄한 셔츠를 입는가 하면, 못쓰게 된 음반을 듣고,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했다. 한 달 넘게 침대 시트를 갈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1

미래, 앞을 내다볼 수 없음이 자신과 자신들 세대를 가장 잘 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 분명한 가치관을 지녔으리라 짐작했다. 자신들이 스페인 내전이나 레지스탕스 시대에 스무 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 그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당시의 문제들, 답해야 한다는 압박이 훨씬 심했을지라도, 당시에 맞닥뜨려야만 했을 문제들이 더 분명해 보였다. 자신들은 함정이 놓인 문제에 둘러싸였을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전의 그들이 아무 배경 없는 프티 부르주아 출신에 개성 없는 그저 그런 학생 신분으로, 세상에 대해 편협하고 피상적인 생각만을 했다면, 이제 사회에 점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교양인이란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얻게 된 하나의 깨달음, 엄밀히 단 하나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그려보기 어려웠을 자신들의 장래 모습,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으로 자신들의 변신에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3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인 편안한 바를 찾아내서 새벽 1시까지 위스키와 브랜디, 진 토닉을 앞에 두고 저버린 사랑, 욕망, 여행, 거부와 열정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레퍼토리가 똑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처음의 공감에서 그저 그런 관계, 점점 뜸해지는 전화 통화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드물기는 해도 우연한 만남, 서로의 필요에 의한 만남으로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정이 자라나기도 했다. 이처럼 해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우정은 서서히 공고해져 갔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5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엑스프레스》의 지지자였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 지성, 유머, 젊음이 언제 어디서나 적절하게 표현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엑스프레스》가 그 역할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 이유는 가장 쉬운 방법일 뿐 아니라, 그들이 잡지에 퍼붓는 경멸 역시 자기 합리화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격렬한 반응은 그만큼 그 잡지에 예속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투덜대며 잡지를 뒤적였으며 비난을 하고 멀리 집어 던져버렸다. 때로는 잡지의 형편없음에 대해 끝없는 경탄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엑스프레스》를 읽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거기에 젖어 살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왠지 난 요즈음/ 먼 길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오는 것 같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 늘 밖으로만 뛰쳐나가려 했을까/ 무슨 대단한 꿈을 이루겠다고/ 그렇게 멀리 떠나려고만 했을까/ 그런데 지금은/ 오랜 타향살이에 지쳐 돌아오는/ 나그네처럼/ 어느 해질녘 빈 배낭 하나 둘러메고/ 고향역에 내리고 있는 것 같네/ 마침내 고향집 거울 앞에 와/ 비로소 나를 만나고 있는 것 같네.
이 시는 채희문 선생님의 시 〈빈 배낭〉이다. - <울다가 웃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0109 - P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