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이니 당연히 특정인의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고 조합원들의 수평적인 의사 결정과 지속 가능한 활동에 우선적인 가치를 둔다. 조합원 간의 친목 도모 활동도 활발해 이 지역 전통 음악 합창단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부르는 ‘깐트 알란테자누Cante Alentejano’는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알란테주 지역의 무반주 전통 합창이다. 과거에 농사를 지을 때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부르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와인도 만들고 노래도 부르고, 그야말로 노래와 와인을 함께 풍성하게 즐기는 삶이라고 할 만하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120

조합 와인을 살펴보다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 누구나 세계사 시간에 이름을 들어 보았을 법한 그는 흔히 대항해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15세기에 포르투갈에서 인도까지 오갔던 항해가다.
역사 속 탐험가는 이곳 와이너리 안에서 와인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그 시리즈에는 ‘항해의 전조’ ‘출발’ ‘그리움’ ‘영감’ 등 꽤 시적인 이름이 붙어 있다. 스토리텔링에 성공한 케이스랄까. "오늘 저녁엔 비디게이라 와인 중에서 그리움 편을 마셔 볼까?" 하며 와인을 마시면 왠지 좀 더 시적으로 다가온다. 수백 년 전 뱃사람들도 떠나기 전날 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과 와인을 나누었을까? 멀리 떠나 있을 때는 고향에서 가져온 와인을 마시며 그리움을 달랬을지도.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121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 얻으려고 취한 선택지들은 다분히 근시안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는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고유한 특성이 옅어지고, 그러다 보면 공허해지고 싫증난 사람들이 비싼 품을 들여 다시 예전의 것들을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128

"작은 양고기 스튜라는 뜻이야. 엔수파두 드 보레구Ensopado de Borrego라고, 양고기와 감자를 넣어 만드는 스튜 요리가 있거든.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네. 거기서 따서 엔수파디냐Ensopadinha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더 줄여 슈파디냐라고 불렀어."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154

어린 시절에 과학 동화책에서 한 번씩은 봤다시피 혼인 비행은 개미나 벌과 같은 곤충이 짝짓기를 위해 하는 행동이다. 개미의 경우, 공중에서 먼저 수개미가 여왕개미에게 접근해 교미하고 수정이 끝나면 떨어진다. 그렇게 여왕개미는 여러 수개미와 짝짓기를 하게 되고, 그 한 번의 혼인 비행을 통해 저정낭에 정자를 채워 두고는 일생 동안 알을 낳는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176

그러나 지금 내게 리스본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때는 예전에 알베르토가 그랬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는 순간이다. 시골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고양이들, 닭들과 돼지, 양떼, 텃밭의 꽃과 나무들, 그 모든 향기와 고운 결을 곧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고 감사하게 된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07

그러나 이는 어찌 보면 선택 의지와 타이밍의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알비토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알베르토의 가족들을 보면 규모를 갖춘 사업을 하거나 큰돈을 벌지는 못한다. 산업 활동이 미미하니 번듯한 직장도 물론 없다. 멋진 외제차로 드라이브를 즐기거나 거대 기업이 낳은 화려한 문화를 누리지 못한다. 고급 레스토랑, 명품 쇼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다들 오래됐지만 넉넉한 집이 있고, 텃밭과 마당에서 채소와 과일을 손수 수확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매일매일 사랑스런 동물 가족과 어울리는 기쁨도 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하니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유대감은 깊어만 간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신선한 공기와 자연은 또 얼마나 고마운가.
한여름에 해외 유명 여행지로 휴가를 가지는 못하지만 근처 가까운 바닷가로 가족 나들이를 떠난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게으른 휴식을 즐기곤 한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바닷가가 근교에 꽤 많다. 도시가 줄 수 없는 것, 도시에서 누릴 수 없는 것들. 그렇게 지내다 보면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09

알비토 집은 그래서 더 특별하고 사랑스럽다. 이곳에선 시공간이 함께 어울린다. 가족과 이웃, 동네가 함께 추억을 쌓고, 오래된 집은 그 중심에서 모든 것을 품고 세대를 거쳐 함께 이어간다. 집은 자연스레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대대손손 가족사를 쌓아 간다. 그래서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알비토 집은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곳’이란 의미로 묵직하게 울리는 공간이 된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11

사우다드Saudade는 번역하면 그리움이나 보고 싶다는 의미에 가깝고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이런 맥락으로 종종 사용된다. 하지만 여러 포르투갈인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 본 결과,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이다. 어떤 언어든 번역하면 원래의 정서나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그 언어만의 단어가 있는데, 한국어의 ‘한’이 그렇다고 할까. 포르투갈어에서는 사우다드가 바로 그런 단어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19

파두Fado는 운명, 숙명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로, 음악 장르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관광객들은 리스본 파두에 익숙한 경우가 많다. 리스본 파두는 솔로 가수가 나와 기타 연주에 맞춰 부르는, 애수 어린 곡들이 대부분이다. 주로 도시 노동자, 선원, 집시, 창녀 등 소외된 사람들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파두는 20세기 들어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ália Rodrigues, 1920~1999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그녀는 주로 리스본 스타일의 파두를 불렀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21

백과사전에 따르면 한국어 ‘빵’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고, 일본어 단어 ‘パン팡’은 16세기 무렵에 포르투갈어 ‘Pão파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빵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가 포르투갈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쓰는 빵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포르투갈인 셈이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29

바까야우Bacalhau는 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와 그 대구를 요리한 음식을 통칭한다. 대구는 명실공히 포르투갈의 소울 푸드이자 국민 식재료로, 식민지였던 까보 베르드, 앙골라, 브라질 등에서도 많이 먹는다. 대구로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데 집집마다 고유한 요리법이 있어 포르투갈에만 천 가지가 넘는 레시피가 있다고 한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31

포르투갈의 가장 대표적인 디저트는 에그타르트다. 포르투갈어로는 파스텔 드 나따Pastel de nata라고 하는데 포르투갈뿐 아니라 옛 식민지였던 마카오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파스텔Pastel은 파이, 나따Nata는 커스터드 크림을 의미하는데, 말 그대로 바삭바삭한 파이지 안에 우유와 설탕, 계란 노른자를 섞어 만든 크림을 채워서 굽는 디저트다. 재료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달고 부드러워서 호불호가 갈리지 않고 누구나 좋아한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취향에 따라서 시나몬을 뿌려 먹기도 한다. 따뜻할 때 먹어도 맛있고 식어도 웬만하면 맛있다. 따뜻한 커피에도, 우유에도 잘 어울린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34

루이스 드 까몽이스Luís de Camões, 1524~1580는 가히 국민 시인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이탈리아의 단테 급이라면 설명이 될까. 16세기 사람으로 『루지아다스Os Lusíadas』라는 서사시를 남겼다. 포르투갈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시인이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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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토와 이 근처의 친척, 친구들 집을 방문하는 것은 그래서 매번 새롭고 즐겁다. 최소 한 세대, 또는 그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머물렀던 사람들의 손길과 추억이 오롯이 담긴 공간과 소품들을 구경하고 얽힌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리고 이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조그만 텃밭이나 안뜰을 품고 있어 나무와 꽃들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맑은 시골 공기를 마시며 저마다 빛깔을 뽐내는 다양한 식물들을 보고 향기를 맡는 게 얼마나 신선한 자극이 되는지. 개, 고양이, 닭 등 집집마다 다양한 동물들과 인사를 트는 일도 재미있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77

생각해 보면, 내가 한국을 떠나 있을 때에 제일 생각나는 음식도 친정 엄마가 차려 준 아침밥이다. 음식 종류는 다르지만 소박해서 질리지 않고, 건강식이라는 점은 같다. 친정집 아침 밥상은 전형적인 한식인데 잡곡밥과 김 구이, 나물 한 종류, 김치, 그리고 계란찜과 두부조림, 어묵 볶음 등이 번갈아 올라온다. 알베르토가 가장 좋아하는 한식 차림이기도 하다. 구운 김에 밥을 올리고 김치를 한 조각 얹어 싸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단다.
마음에 남고 몸이 기억하는 식사는 다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신선하고 건강한,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그런 한 끼 말이다. -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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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런 지지도 필요 없다. 그래도 스스로를 잘 돌본다. 사람 키보다 더 크고 나이 많은 나무에 둘러싸인 도라는 그저 하찮은 존재로 느껴진다. 그녀는 곤충들이 윙윙대는 소리 때문에 숲의 적막감이 깨지지 않고 한층 더 짙어지는 걸 사랑한다. 살랑거리는 은빛 나뭇잎과 달콤한 향이 나는 솔잎도, 또 분주히 날아다니는 새들도 사랑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71

언제부턴가 그는 산책 나갈 시간이 없었고, 그 때문에 도라는 마음이 아팠는데, 쓰라린 아픔이라기보다는 처음엔 그녀 자신도 거의 못 느끼는 은은한 아픔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기후 보호에 대한 로베르트의 관심이 높아졌고, 그레타 툰베리가 금요 시위를 시작한 이래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텔레비전에 비친 로베르트는 환영을 보듯 둥근 얼굴, 꼭 다문 입술, 땋은 긴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74

로베르트는 바이러스가 지구를 사회의 이동성으로부터 해방하므로 어떤 점에서 보면 축복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때 도라는 그를 떠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어느 날 요헨과 함께 산책 나가는 걸 금지하자,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났다. 서른여섯 살의 그녀와 함께한 모든 것들이 렌터카 한 대에 다 들어갔다. 벨트 전동장치가 달린 자전거 구스타프만 베를린에 남겨두고 와야 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80

도라 주위에서 봄이 살아 움직이며 본연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모든 생물 유기체가 성장하고 만발케 하고, 살아 있는 생명이 최대한의 생산력을 뽐내도록 몰아대고, 봄의 전령들이 재생산을 하도록 돕는다. 그 어떤 존재도 평가받지 않을뿐더러 모든 존재가 이용된다. 죽어가는 생명 또한 활용된다. 세상의 어떤 한 종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이 그 틈을 메운다. 죽음과 탄생은 드라마가 아니라 생명 역학의 고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흥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파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진박새보다 더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82

그녀의 의뢰 업체인 ‘공정무역 의류’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베를린 패션 상표로, 신상 재생 청바지 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문을 닫고 수익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소매상들이 간신히 버텨나가야 하는 시기인 지금, 보통 섬유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고객들이 주문을 동결하고 있다. 그 와중에 ‘공정무역 의류’ 창립자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중요한 모든 경로를 통해 대중의 이목을 끄는 상품을 선보이려는 계획에 매달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85

수십 년 전부터 정치와 미디어 매체는 인간의 가장 저급한 본능—불안, 시기, 이기주의 같은—에 호소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처럼 엄살을 부리며 징징대는 정당을 뽑아도 놀랍지 않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92

그녀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실내에서 자고 있던 요헨이 한숨을 쉰다. 도라는 언제 어디서나 잠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요헨이 부럽다. 가끔 그녀는 잠드는 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잠들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미 실패한 사람이다. 잘 자는 사람은 안전하다. 매일 밤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지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매일 아침 상쾌한 날을 맞이한다면?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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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를 ‘북유럽 스타일’이라 부르곤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을 포함해 내가 봐 온 알비토의 가족, 친구들의 집은 정반대다. 기본적으로 몇십 년의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에 기억과 물건, 온기가 함께 스며 있다. 다양한 옛 스타일과 역사가 날것 그대로. 북유럽식 미니멀리즘과는 정반대의 맥시멀리즘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조금 정신 없을 수도 있고 딱히 세련된 느낌은 아니지만, 난 이런 알비토 스타일이 참 정겹고 따뜻하다.
<느릿느릿 복작복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430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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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도라는 땅에 박은 삽을 다시 빼 들고 힘껏 내리쳐 단단한 뿌리를 두 동강 내버린다. 이어 모래땅에 박힌 뿌리를 파 뒤집는다. 그러고는 삽을 옆으로 내던지고 양손으로 허리를 꽉 누른다. 허리 통증이 몰려온다. 그녀는 잠시 자기 나이를 계산해보는 듯하다—서른여섯. 스물다섯 이후 나이 얘기가 나오면 늘 세어봐야 한다.
깊이 생각하지 마. 계속해. 파 뒤집어놓은 좁은 이랑은 아직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주위를 둘러봐도 살아남을 기회가 없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땅이 넓어도 너무 넓다. 도저히 ‘정원’이라고 부를 만한 모습이 아니다. 주사위 모양의 집 한 채가 들어서 있는 이 풀밭이 정원이라니. 도라가 자란 뮌스터 근교 정원이나 가장 최근까지 살았던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가로수 나무 주위에 만든 미니어처 꽃밭 같은 것이라니.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8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정원도 공원도 들판도 아니다. ‘땅덩이’에 가깝다. 토지 등기부등본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 도라는 등기부등본을 보고 4000제곱미터 땅이 이 집에 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4000제곱미터가 얼마나 넓은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축구장 절반 정도 크기의 땅, 그 위에 오래된 집 한 채가 서 있다. 납작하게 눌린, 황폐해진 휴한지, 오지도 않은 겨울로 희뿌옇다. 텃밭이 있는 낭만적인 시골집 정원으로 애를 써서 변신시켜야 할 처참한 모습이다.
그게 도라의 계획이다. 근방 70킬로미터 내에 아는 사람도 없고 집 안 가구도 없이 지내야 한다면, 최소한 자신이 직접 키운 채소만이라도 갖고 싶다. 그녀가 모든 걸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걸 토마토, 당근, 감자가 날마다 알려줄 테니까. 갑자기 도시 외곽의 주거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보수공사가 필요한 옛 대농장 관리인의 집을 구매한 건 신경질적인 흥분상태에서 저지른 짓이 아니다. 삶의 여정에서 당연한 다음 단계였다. 시골집 정원이 있으면 주말에 베를린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높이 자란 풀밭에 놓인 낡은 의자에 앉아 탄식조로 말할 테지. "세상에, 여기 아주 좋네." 그때까지 누가 친구인지 생각난다면, 언젠가 다시 서로를 방문할 수 있다면.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9

도라가 정원 가꾸는 일을 전혀 몰라도 별문제가 안 된다. 유튜브가 있으니까. 다행히 그녀는 난방계량기를 측정하려면 기계공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걱정이 많은 완벽주의 성격의 로베르트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녀와의 관계를 내던져버리고 세계 종말과 사랑에 빠진 로베르트. 세계 종말은 도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연적으로, 집단 운명을 극복하는 상태가 정점에 다다를 때까지 복종을 요구한다. 한데 도라는 복종하는 데 서툴다. 그녀가 도망친 건 봉쇄령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걸 로베르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정신 나간 사람을 보듯 쳐다보았더랬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0

지빠귀 몇 마리가 날아와 파 뒤집어놓은 흙 속에서 지렁이를 찾는다. 그중 한 마리가 뻔뻔스럽게 삽자루에 앉자 도라가 키우는 요헨데어로헨이라는 이름의 작은 강아지가 고개를 치켜든다. 사실 추운 시골집에서 밤을 보낸 요헨데어로헨은 지친 몸을 봄 햇살에 쬐며 회복 중이었다. 그런 요헨데어로헨이 지금 대도시 동물답게 우아하게 일어나 깃털 달린 촌색시에게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자리로 돌아와 바닥에 배를 대고 눕더니 뒷다리를 벌려 몸통을 삼각형 가오리 모양으로 만든다. 요헨데어로헨이라는 이름은 이 몸통 덕택이다.*
* ‘로헨’은 ‘가오리’라는 뜻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1

가끔 도라는 어디에선가 읽은 문장들에 넋을 잃고 있을 때가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문장들이 벗겨지지 않는 껍데기처럼 마음속에 박혀 영혼에 와닿는다. 이 껍데기는 열역학 제2법칙이다. 이는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항상 무질서가 최고의 가치가 된다는 것, 즉 엔트로피를 의미한다. 이 집 땅덩이에 있든 마을로, 란트크라이스*로 나가든 어디서든 이 말이 떠오른다. 산산이 부서진 도로들, 절반은 무너져 내린 창고들과 마구간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옛 주점들. 휴한지에 쌓인 고물 더미, 숲속에 나뒹구는 터진 쓰레기봉투들. 새 울타리와 새로 페인트칠한 집들이 자리한 정원들은 섬과 같은 곳으로, 거기서 사람들은 엔트로피에 맞서 싸우고 있다. 마치 각 개인의 힘이란 게 몇 제곱미터에 지나지 않는 세계에만 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라는 아직 그런 섬이 없다. 지금 그녀는 창고에서 발견한 녹슨 장비로 무장한 채 뗏목 위에 서서 엔트로피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2

도라는 자신이 관객인지 전혀 몰랐다. 그럼, 배우는 누구일까?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고, 그런 생각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지도 말자. 지금은 새로 생겨난 개념들이 너무 많다.사회적 거리두기. 기하급수적 증가. 지나치게 높은 사망률과 비말 차단 마스크. 몇 주 전부터 도라는 세상을 더는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몇 달 전부터 혹은 몇 년 전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세상을 더는 이해할 수 없는 게 확고해졌다. 아무리 심하게 팔을 흔들어대도 쫓아낼 수 없는 파리 떼처럼 새로 생겨난 개념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그래서 도라는 이 모든 단어들이 이제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마음먹었다. 이 단어들은 어느 낯선 나라의 낯선 언어에서 유래한 거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는 ‘브라켄(Bracken)’이라는 단어를 얻었다. 이 단어 역시 아직 낯설게 느껴진다. 휴한(Brachen)과 판잣집(Baracken)을 합쳐놓은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점점 심해지는 소음 속 공사장 중장비 작업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내일 정리 정돈될 거다. 그러려면 일용직 일꾼 몇 명이 더 필요하다. 기초공사를 하기 전에 여기 이곳을 다시 한번 더 꼼꼼하게 정리 정돈해야 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3

불가능하다고 느끼는데도 계속해나가면 구역질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썩었지만 삼켜야 하는 음식을 접시에 받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코를 틀어막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땅에 삽을 꽂는다. 엔트로피. ‘엔’에 푹 찔러 넣고, ‘트로’에 발로 차 넣은 다음, ‘피’에 또 흙 한 삽을 퍼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4

이사 온 첫째 날 덜덜 떨며 추운 밤을 보낸 그녀는 겨울용 긴 면내의, 두꺼운 스웨터, 안감을 댄 재킷을 걸친 채 집 밖으로 나갔다. 15분이 지난 후, 그녀는 양파 껍질 벗기듯 입은 옷을 하나씩 벗더니 이내 속옷 차림으로 수북이 쌓인 옷 무더기 옆에 서 있었다. 그때부터 아침 날씨가 얼마나 춥든 상관없이 티셔츠만 입고 집 밖으로 나가곤 한다.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서 닭살 돋는 느낌이 기분 좋아서다. 한낮에도 집 안은 서늘하지만 바깥 온도는 거의 20도 가까이 올라간다. 새 거주지인 이곳으로 옮겨 온 이후 밤마다 도라 침대에 들어와 함께 자려고 고집부리는 요헨에겐 엄청 반가운 일이다. 태양 빛을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태양전지처럼, 요헨은 낮엔 가장 강한 햇빛을 찾아 온 정원을 돌아다닌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5

진정한 도전은 좀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아무도 엔트로피에 맞서 싸우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스템의 유산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동독 시절 대농장 관리인이 살던 집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정원에 돌덩이, 고물, 쓰레기를 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땅에 박는 삽에 깨진 벽돌, 녹슨 금속부품, 낡은 플라스틱 양동이, 깨진 병, 신발 한 짝, 녹슨 냄비 같은 게 부딪혔다. 그중에 가지각색의 모래놀이, 작은 자동차 바퀴 같은 어린아이 장난감도 섞여 있고, 심지어 땅 밖으로 솟구쳐 있는 인형도 있다. 도라는 이 물건들을 주워 정원 가장자리에 모아서 흙을 파 뒤집어놓은 이랑을 따라 쭉 늘어놓는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6

로베르트는 항상 그녀의 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나마 그것도 그녀가 CO₂ 문제에 이어 잠재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체의 화신으로 변신하기 전까지 뭐가 됐든 그녀에게 아직 좋아할 만한 점이 남아 있던 시절 얘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17

도라는 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이 시골집을 구입한 이야기를 줄곧 들어왔다. 대부분 별장으로 사용하려고 산 집이었다. 그들은 프로젝트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꿈을 꾸며 별장을 사들였다. 도라가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쳇바퀴에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자마자 바로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한동안 그들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기한 내에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다. 그저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 의미 있던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게 어떤 건지 느껴보기 위해서. 그와 동시에 더 중요한 다음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들의 일은 도착지가 없다는 의미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전도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멈춰 있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쉼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 안에서 열심히 움직인다. 그사이 어느덧 대부분은 이 모든 게 의미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도. 도라는 동료들의 눈빛에서, 불안 가득한 시선에서 그것을 느꼈다. 신입 사원들만 여전히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이 일’은 달성될 수 없다. ‘이 일’은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프로젝트를 나타내고, 또 실제로 다음 프로젝트가 생기는 게 아니라 생기지 않는 게 추측 가능한 가장 큰 재앙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달성 가능하다는 건 현대 삶과 노동 세계에서 기본적으로 하는 거짓말이다. 집단적 자기기만, 이것이 그사이 조용히 터져 나왔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0

도라는 그런 생각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로베르트가 기후보호전문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이미 이따금 지나치다고 생각한 건 기억난다. 그는 정치가들을 심각한 멍청이라고, 동료들을 이기적인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욕하거나 혹은 도라가 쓰레기 분리 시에 실수를 하면 마치 범죄를 저지른 듯 흥분하곤 했다. 그럴 때면 가끔 그가 광적이고 타협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거나 혹은 신중하고 온화한 사람을 광인으로 만드는 일종의 ‘정치적인 청결강박증’을 앓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2

어찌 보면 그녀는 확신이 없다. 물론 기후변화를 중대한 문제로 생각하지만 그녀를 위축시키는 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말 대신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요(How dare you)"라는 말이다. 목표에 대한 온도 차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는 대신 차라리 그들의 생각대로 본질적인 것, 그러니까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에 집중해야 한다. 그건 시민교육을 개선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기반시설, 유동성, 산업 개편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녀는 이런 과제에 직면한 로베르트가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게 이상하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3

도라는 절대적인 진리와 그 진리에 의존하는 권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거부감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며 옥신각신 싸우고 싶지도 않고 어느 한 여론단의 일원이 되고 싶지도 않다. 보통 그녀가 갖는 거부감은 자기방어는 아니다. 그건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간다. 거부감은 일종의 반항심, 즉 관계에 대항하는 내적 투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로베르트에게 언제부터 깊은 우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언급하느냐며 주의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 그는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며 도널드 트럼프의 대안적 사실*을 선호하느냐고 되물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4

도라는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육식을 포기하고 유기농 식품점에서 장을 보았다. 로베르트를 위해 다니던 에이전시마저 옮겼다. Sus-Y사는 지속 가능한 상품과 비영리기관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중견 회사로, 사회생태학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책임감 강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곳이었다. 도라는 통조림 수프나 호화로운 크루즈 여행, 보험상품을 광고하는 대신에 Sus-Y사에서 식물성 소재로 만든 신발, 비닐 봉투 없는 날이나 공정무역 초콜릿 홍보를 위해 아이디어를 개발했다. 그녀는 명함에 ‘시니어 카피라이터’ 대신에 ‘카피’라는 단어 하나만 덩그러니 찍혀 있어도, 예전보다 좀 더 적게 벌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로베르트 기준에서는 이 모든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한참 못 미쳤다. 마침내 도라는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았지만, 그걸 줄 수 없었다. 그는 복종을 원했고 그녀가 가진 저항심을 제압하고 싶어 했다. 또 세계 종말에 충성을 맹세하길 원했던지라 그녀의 은밀한 반항심에, 함께 앞장서서 행진하지 못하는 무능함에 점점 더 격분했다. 그는 그녀가 못마땅했고, 그들은 예전보다 함께 웃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들은 아직 한 팀이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5

그리고 얼마 후 코로나가 들이닥쳤고, 로베르트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아냈다. 이미 1월에 그는 재앙 같은 지진을 감지하는 예민한 지진계의 감수성으로, 코로나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해질 거라고 말한 바 있다. 서구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또다시 중국에서 일어난 문제라고 치부할 때에도, 그는 온라인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정부에 대고 마스크를 공급할 것을 권고했다.
처음엔 동료 기자들이 불길한 예언을 한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예언자 위치에 서게 되고 코로나 전문가가 돼버렸다. 마치 그가 수년 전부터 남몰래 이 바이러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마침내 그 기다림은 끝났고 재앙이 닥쳐왔다. 배에 물이 새는 바람에 마침내 뭔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가 명령을 따르고 모든 의심은 폭동이 돼버리는 상황에서 마침내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뿐인가. 마침내 통제 불능에 빠진 세계에 구속력 있는 규칙도 생기고 망할 놈의 세계화는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사람, 물건, 정보가 국경을 초월하여 돌아다니는 것도 끝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

오래전부터 서양 문화가 이미 쇠퇴하지 않은 거라면 언젠가 쇠퇴할 거라는 예감이 짙게 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예감이 적중하고 팬데믹이 들이닥치고 모든 죄, 탐욕과 착취, 완전 자유분방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형벌이 내려진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

도라는 광범위하게 확산된 이 공포가 로베르트에겐 명예 회복의 기회가 된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세계 종말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베를린의 워킹 데드*.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

그는 모든 텍스트, 이메일, 문자메시지에 대중운동이 되어버린 비밀결사단의 구호 같은 "건강하세요!"라는 상투적인 말을 갖다 붙였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며칠은 아주 좋았다. 도라는 왓츠앱을 사용하여 동료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화상회의를 통해 회의에 참석했다. 사실 그녀가 그리웠던 건 다름 아닌 사무실 냉장고에 가득 든, 일을 마치고 마시는 공짜 유기농 파이어아벤트* 맥주였다. 냉장고는 Sus-Y사가 크뢰허 양조장 예산을 얻은 후 마련한 물건이었다.
* ‘퇴근’이라는 뜻.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

그런데 얼마 후 크로이츠베르크의 그들 집이 점점 좁아졌다.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며 예전부터 재택근무를 해온 로베르트가 하나뿐인 서재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사 들어올 때만 해도 도라는 집이 엄청 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녀 주변의 모든 것이 작아져 있었다. 접촉 제한 조치로 로베르트는 환경보호에 중요한 도시 탐방을, 그러니까 베를린 시를 돌아다니는 일을 하루에 한 시간으로 줄였다. 나머지 시간은 도라, 요헨, 로베르트가 80제곱미터 공간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지냈다. 거실엔 긴 소파용 탁자만 놓여 있어서 도라는 주방에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을 해야 했다. 요헨을 데리고 산책도 자주 나갔다. 기르는 개를 산책시켜야 하는 개 주인의 의무는 이제 특권이 되어버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

산책을 나가면 우울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잠깐 폐소공포증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도라가 요헨을 데리고 하루에 세 번이나 집 밖으로 산책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사실 그는 시민들이 정부의 조치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걸 두고 엄청 화를 냈다. 그녀가 주방 식탁에 앉아 고객의 희망 사항을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바꾸려고 애쓰는 사이, 그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느냐며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그러면서 그는 도라가 동의의 표시로 고개만이라도 끄덕이길 기다렸다. 하지만 도라는 사람들이 멍청한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한데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걸까? 맞은편에서 오는 개를 피해 자기 개를 멀찍이 떨어뜨려놓는 사람들이? 혹은 보란 듯이 심야 가게 앞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

도라는 거래 땐 안목이, 소통 땐 최대한의 솔직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함의 전제 조건은 정확히 모르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규정 자체가 아닌 오로지 ‘생각의 강제’에만 저항심이 든다. 도라는 규정을 따를 수 있다. 다만, 그 규정이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나 중요한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심야 시간 가게 앞에서 열 명의 사람들과 맥주를 마실 필요는 없다.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 사회가 결정한 전략이라면, 그녀는 거기에 동참할 준비가 돼 있다. 물론 이성적인 방법으로, 맨 앞에 앞장서지 않고. 어쩌면 스웨덴식 접근법이 그녀에게 더 적합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스웨덴이 아닌 여기 이곳에 있다. 그녀는 규정을 지키나 생각은 자유롭다. 아무도 그녀에게 심야 가게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을 공공질서를 해치는 매국노라고 생각하게 강요할 순 없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1

어느 날 그녀는 산책 중에 거리 측정기를 착용하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측정기가 ‘삑’ 소리를 내자 그 남자는 팔을 흔들며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녀는 이전에 일어난 그 어떤 일보다 그 소리에 더 경악했다.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이성을 잃는다는 게 가능할까? 그 이야기를 하자 로베르트는 무식하게 그런 것도 잘 모르냐며 질책했다. 위험에 눈 감아버리는 짓이라고. 그는 ‘삑’ 소리 나는 작은 상자를 달고 다니는 남자가 이성적이라고 했다. 도라는 자신이 뭐가 문제인지 이해 못하는 아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2

더욱이 그녀는 집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폐쇄된 놀이터 옆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요헨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휴대폰으로 전자책을 읽으려 애썼다. 그러나 몇 분쯤 읽다 포기하고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생각이, 헤드라인이, 불안이, 그 모든 것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큰 손은 따뜻한 강아지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 주위로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공간이 점점 커져갔다. 도라는 잠시 그 공간 속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4

그 순간 도라의 머릿속에서 온오프 스위치가 바뀌었다. 그녀는 검은 화면을, 그리고 아직 눈앞에 서 있는 로베르트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더는 이 남자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였다. 황당무계한 영화에 빠져 대본도 읽어보지 않고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 그게 아니면, 로베르트가 미치는 것 혹은 그녀 자신이 미쳐버리는 것이었다. 도라는 그 셋 중 아무것도 원치 않았다. 그저 멀리 떠나고만 싶었다. 그녀의 머리가 방금 일어난 일을 더는 따라가지 못했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혹감과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로베르트에게 한동안 다른 곳에서 살겠다고 말하고 짐을 쌌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6

탈출했다. 도라는 ‘상자 밖으로 빠져나온다’라는 말처럼 들리는 이 단어를 좋아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7

그러다 그녀는 브라켄의 대농장 관리인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렌터카를 타고 가다가 흔들거리는 울타리 앞에 멈춰 선 그녀는 이 집이라는 걸 대번에 알았다. 큰 나무들, 황폐한 집터, 회색빛 석고 장식품들. 마을 외곽에 자리한 위치. 6주 후, 그 지역 공증인 사무실에 앉아 매입 계약서에 서명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8

도라는 이제 탁자 위에 두 개의 일거리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거의 실업자나 다름없다. 그 일거리라는 게 틈틈이 작성할 수 있는, 유기농 맥주 제조업자를 위한 얇은 팸플릿과 ‘공정무역 의류’라는 타이틀이 달린, 재생섬유 생산자를 위한 론칭 캠페인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2

도라가 보기에 이웃 관계란 강제 결혼의 한 형태이다. 사람들은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으나 그럴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4

"당신 개가 내 감자밭을 파헤쳐놨소."
실제로 흙이 묻은 짙은 양말을 신고 있는 요헨의 모습에 도라는 마음이 동요한다. 요헨은 생전 땅을 파헤쳐본 적이 없었다. 도라가 지금껏 살았던 곳엔 땅을 파헤칠 만한 장소가 없었다. 대신 나무토막, 보행자 도로, 울타리를 친 놀이터에 자갈길과 화단들, 목줄 착용 의무,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담은 비닐봉지만 있었다. 어쩌면 요헨의 마음 깊은 곳에 일종의 약탈 본능이 잠자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 요헨의 조상 중 다리가 길고 몸체가 유선형인 사냥개라곤 없었는데도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6

"개가 엄청 못생겼군. 안 그렇소?" 그가 침묵 끝에 입을 연다.
그 말을 부인하지 않는다. 퍼그, 프랑스산 불도그, 아마도 치와와 품종의 특징이 요헨의 외모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게 틀림없다. 요헨의 털은 노란색을 띤 흰색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고 체격은 땅딸막하고 다리는 휘었다. 얼굴은 커다란 눈, 늘어진 귀, 툭 튀어나온 아래턱이 특징인데 그 아래턱 때문에, 가능성은 엄청 희박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물어야겠다고 결심하면 물 순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놀랍게도 요헨을 알게 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들은 요헨이 못생긴 게 아니라 우스꽝스럽다고 여기고, 도라는 그런 요헨이 일본 장난감 산업이 고안해낸 것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버튼을 누르면 깜박거리며 움직이고 음악이 나오는 물건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도라는 느닷없이 밀려드는 행복감에 잠깐의 불쾌감을 사라지게 하는 요헨을 사랑한다. 굳이 요헨이 예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7

"반갑소." 고테가 말한다. "난 이 마을 나치요."
광고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줄곧 이런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시골 마을로 이사한 젊은 여자. 그녀는 새로운 주변 환경에 살짝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모든 게 멋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러다 새 이웃 남자를 만난다. "반갑소, 난 이 마을 나치요." 그리고 충격으로얼어붙는다. 차갑게 얼어붙은 장면. 너무 놀라 밀랍 인형처럼 굳어버린, 완전 넋이 나간 여주인공의 얼굴이 서서히 클로즈업된다. 그 순간 그 위로 도라가 개발한 슬로건 ‘새로운 도전—새로운 한기’가 지나간다. 차(茶) 광고. 아니, 드롭스 광고.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50

도라는 냄비에 수돗물을 담아 캠핑 코펠 위에 얹어놓고 끓기를 기다린다. 익히 알고 있듯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그사이 찬장에 몸을 기댄 그녀는 머릿속으로 기다리는 시간을 의미 있게 채울 만한 것을 찾아서 코를 끙끙거리는 테리어처럼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닌다. 창턱에 죽어 있는 파리 떼를 닦아내야 할까? 이메일을 잠깐 체크할까? ‘공정무역 의류’ 론칭 캠페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몇 가지 적어볼까? 아님 텃밭 가꾸는 유튜브 영상이라도 볼까?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55

어떤 사람이 차 한 잔을 들고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소설책에서 줄곧 보는 장면이다. 그렇게 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55

가끔 도라는 삶을 살아가는 데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사람이 축구를 하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재능이 없고, 어쩌면 도라도 그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될지 모른다. 문득 생각나거나 관심이 가는 것과 정반대되는 게 항상 존재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타당성이 허물어지고 모든 아이디어는 저절로 사라진다. 그녀의 회의적인 사고방식은 사방에서 반대에, 부조리에, 논리적 오류에 직면하고, 동참하고 싶은 충동을 도전적인 저항심으로 바꾸어버린다. 그 때문에 한가로울 뿐 아니라, 그녀의 예상대로 오랜 세월 외롭기도 하다. 어쩌면 그녀는 인간 존재의 전반적인 개념에 적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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