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의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어루만졌다. 등과 옆구리, 젖가슴과 배, 팔과 다리, 다리 사이를. 그 느낌이—흥분이 좀 가라앉고 나서 알아차렸다—아주 좋았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68
이렇게 혼자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그리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스스로가 놀랍다는 생각도 한참 했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도, 행성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꼈다. 과거의 어떤 순간보다도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익숙한 침대의 우묵한 곳을 찾아냈을 무렵 그는 잠이 들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69
오필리아는 오늘 밤도 어둠 속에서 보내기는 싫었다. 저녁도 제대로 만들어 먹고 싶었다. 오필리아는 팔라레스네 욕실을 사용할 때 느꼈던 반항적인 기분으로 여기저기 불을 켰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73
두려워. 오필리아는 그 한 번의 고요한 비명을, 마치 반쯤 나온 아이를 도로 빨아들이듯 목구멍 뒤로 욱여넣은 비명을 기억해냈다. 이제 그는 기억 속에서 그 두려움의 산에 대한 탐사를 마친 상태이겠지만, 탐사의 과정은 기억나지 않았다. 산은 그곳에, 시야의 끄트머리에 흐릿하고 불길하게, 영원히 불가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88
정말 아름다웠다. 오필리아는 전부터 이런 폭풍을 우주에서 찍은 사진을, 푸른 바다 위의 우아하고 흰 소용돌이 구름을 좋아했다. 하지만 밑에서 봤을 때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은 전혀 몰랐다. 구름 벽들의 다채로운 파란빛과 회색빛과 보랏빛, 금빛이었다가 날이 밝으면서 눈처럼 하얘진 상층부, 그 위의 짙푸른 하늘. 그는 지금의 느낌을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공포가 길항하고 있었다. 그는 발을 어루만지는 시원한 진흙 속에서 몇 걸음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갔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98
죽어 마땅한 사악한 노파 같으니. 오래된 목소리가 꾸짖었다. 그 자신과 맨몸에 대한 발견을 꾸짖었다. 아름다워. 새 목소리가 말했다. 들리는 말은 그게 다였지만, 이제 섬광 같은 환영이 차례차례 눈앞을 스쳐갔다. 검은 비, 바람, 빛을 향해 솟아오르는 키 큰 구름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01
오필리아는 떠내려가는 소들을 쳐다봤다. 물에 빠져 죽어도, 괴물한테 먹혀도, 풀 한 포기 없는 모래톱에 고립돼도 싼 놈들. 인간과 너무 비슷하다는 게 녀석들의 문제다. 도움의 손길을 피해 도망친다, 위험으로 돌진한다. 오필리아는 소똥 밭을 빠져나오며 다시는 저렇게 은혜도 모르는 동물들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잘박잘박 걸어 마을로 돌아갔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03
겨울 작물은 뿌리채소와 덩이줄기 작물의 비중이 늘어났다. 양파는 다시 심는 것이고 당근과 무, 비트, 감자, 참마, 리크는 새로 추가되었다. 뜨거운 여름 해를 견디지 못하는 엽채류와 열기를 싫어하는 콩류도. 콜로니의 모든 보유 종자를 선택지로 두게 된 오필리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심었다. 티나콩, 바크상추, 길고 하얀 스노드롭무, 노랑감자, 카르도니아파스닙. 보유 종자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다른 것들도 조금씩 심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06
몰리는 여자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들을 때려서 말을 듣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07
몰리의 주장들은 참으로 듣기 좋았지만, 이 세계는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누구든 때리는 세계였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07
그리고 이제는 죽은 사람이다. 오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손과 팔에 이어 발과 다리, 마침내는 온몸이 똑같은 공포로, 똑같은 충격으로 덜덜 떨렸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그가 알고 지낼 수도 있었을, 대화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죽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24
천천히, 천천히, 호흡이 진정되었다. 지친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오필리아는 손을 봤다. 손마디는 불그스름하게 부어오르고 정맥이 불거지고 검버섯이 있는 손은 꽃보다 연약해 보였다. 시선이 미끄러지듯이 내려가 직접 만들어 입은, 프린지 장식이 있는 옷에서 멈췄다. 그 옷이 그의 몸보다도 품위 없어 보였다. 오필리아는 일어서서 거칠게 옷을 벗어 공처럼 구긴 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24
같지 않다.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아니, 누군가, 정체불명의 괴동물이—이 세계에 살고,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실제로 인간을 죽였다. 나는 이런 위험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이제 다시는 모를 수가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25
오필리아는 움베르토가 죽었을 때도 자식들이 죽었을 때도 아주 오래 울지는 않았다. 그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는 조금도 울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일 뿐 모두에게 찾아오며,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나 지금 그는 울고 있었다. 떨리는 얼굴과 축축한 눈물, 줄줄대는 콧물과 턱까지 흘러내린 침을 느끼면서—늙은이의 울음은 우아하지 못했다—본 적도 없는, 보게 되길 바라지도 않은 사람들 때문에 울었다. 그토록 먼 길을 와서 죽은, 그가 불청객으로 여긴 사람들 때문에.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34
거울을 봤다. 웬일인지 그동안, 낯선 사람들이 내려오기 전부터 거의 거울을 보지 않았다. 스스로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소스라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거울 속의 형상은 거의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36
오필리아는 거울을 응시했다. 기분은 그대로—거의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부터 거울을 볼 때마다 마주치는 그 눈빛이다. 눈썹은 숱이 줄고 더 세었고, 센 머리는 마구 엉킨 잿빛 덤불 같았다. 하지만 오필리아 내면의 자아는, 비즈와 깃털과 양털과 소털과 꼬투리를 줄에 꿰는 데에 그토록 열중하던, 이런저런 끈을 어디서 묶어야 할지 그토록 확신하던 그 자아는 예전의 낡고 칙칙한 워크셔츠와 치마와 보닛이 아닌 다른 것을 걸친 그가 어떤 모습일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36
품위 없어, 오래된 목소리가 말했다. 놀라워, 새 목소리가 찬동하며 말했다. 몸은 늙고 주름지고 처졌으며 80년 가까이 마모된 흔적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위에 거미줄 같은 패턴으로 걸려 있는 것은 그가 창조한 멋진 색과 질감이었다.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37
공포가 잦아들었다. 밖에서 천둥이 낮게 으르렁거렸고 부슬대던 빗줄기가 굵어졌다. 오필리아는 예전에 폭풍을 앞두고 느꼈던 이상한 기분을, 불길한 예감과 광기, 무모한 행위들을 떠올렸다. 그냥 폭풍일 뿐이야. 끝나고 나면 기분은 다시 괜찮아질 거야.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38
바보, 바보, 바보…… 바보 같은 아이가 자라서 바보 같은 노파가 되었군. 하지만 재미있었다. 몸에 그림 그리기는 재미있었어. 다음에 또 해야지. 안 될 게 뭐람? 어차피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들한테 죽을 운명이라면, 닥치는 대로 재미있게 지내는 편이 낫지. - <잔류 인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4868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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