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센트럴파크를 지나 웨스트 100번대를 향해 계속 달렸다. 158번가에 이르러 흰 케이크처럼 길게 늘어선 아파트 중 하나 앞에 차를 세웠다. 윌슨 부인은 왕궁에 귀환한 여왕처럼 당당하게 이웃을 바라보면서, 강아지와 다른 물건을 들고 거만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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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밖에 나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부드러운 황혼 속에서 동쪽 공원을 향해 거닐고 싶었다. 하지만 나가려고 할 때마다 나를 로프로 묶어 의자에 다시 앉히다시피 하는 귀에 거슬리는 엉뚱한 논쟁들에 휘말렸다. 그러나 도시 위에 높이 줄지어 있는 노란 창문들은 어두워지는 거리에서 무심히 고개를 든 사람에게 틀림없이 인간의 비밀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나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끝없이 다양한 인생에 이끌리는 동시에 혐오감을 느끼면서, 나는 집 안에 있는 동시에 집 밖에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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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9 - P65

여름 내 밤마다 이웃집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개츠비의 푸른 정원에서는 속삭임과 샴페인, 그리고 별빛 아래 남자와 여자들이 나방처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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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고, 칵테일의 파도가 바깥 정원까지 이어지자 잡담과 웃음소리, 즉흥적인 풍자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 자리에서 사람을 소개받고도 금방 잊어버리는가 하면, 서로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끼리 신나게 떠들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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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태양으로부터 기울어지면 불빛은 점점 더 환해진다. 이제 오케스트라가 선정적인 칵테일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의 오페라 같은 고음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맹랑한 말 한마디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대화를 나누는 그룹은 한층 신속하게 바뀌고, 새 손님이 도착하면서 빠르게 흩어졌다가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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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츠비의 집을 처음 찾은 날 밤, 나는 정식으로 초대 받은 몇 안 되는 손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대부분은 초대장 없이 그냥 파티에 왔다. 롱아일랜드로 데려다 주는 자동차를 탄 뒤 좌우간에 개츠비 집 문간에서 내린 것이다. 일단 거기서 개츠비를 아는 누군가가 소개해 주면, 그 후에는 놀이 공원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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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들은 개츠비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왔다 가기도 했는데, 그런 단순한 마음이야말로 파티에 지참해야 할 초대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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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개똥지빠귀처럼 푸른 제복을 입은 기사가 주인의 공식 깜짝 초대장을 들고 내 잔디밭으로 건너왔다. 초대장에는 내가 그날 밤 그의 〈보잘것없는 파티〉에 참석해 준다면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일 거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나를 몇 번 본 적이 있으며 오래전부터 나를 만나러 오고 싶었지만 복잡한 사정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그 아래에는 위엄 있는 필체로 〈제이 개츠비〉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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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베이커가 집 안에서 나와 대리석 계단 꼭대기에 섰을 때, 나는 너무나 어색해서 술이나 마셔 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기댄 채 경멸과 흥미가 뒤섞인 눈길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환영을 받든 못 받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려면 우선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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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진짜야. 속지도 있고 모두 다 있어. 혹시 마분지로 만든 멋진 장식용 서적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근데 하나같이 완벽한 진짜더라고. 속지도……. 아! 내 보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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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아 서둘러 서가에 꽂았다. 한 권이라도 없어지면 서재가 전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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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도 즐거웠다. 핑거볼만 한 잔에 담긴 샴페인을 두 잔 들이켰더니, 눈앞의 광경이 뭔가 중요하고, 단순하고, 심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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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못 알아들은 듯 그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바로 개츠비예요.」 그가 불쑥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실례했습니다.」

「아는 줄 알았죠, 친구. 내가 집주인 노릇을 제대로 못 한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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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다 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 미소는 영원히 변치 않을, 평생 네다섯 번이나 볼까 싶은 아주 보기 드문 미소였다. 영원한 세계를 잠시 보았거나 보는 듯한 미소,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온 정신을 다해 집중하겠다는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만큼 당신을 이해하며, 당신이 믿고 싶어 하는 만큼 당신 자신을 믿어 주며, 당신이 전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인상을 정확히 받았다고 확인해 주는 그런 미소였다. 정확히 바로 그때 그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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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보기 좋게 팽팽했고, 짧은 머리는 매일 손질하는 것처럼 단정했다. 그에게 사악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가 술을 안 마시기 때문에 다른 손님과 구별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유쾌한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그는 점점 더 빈틈없어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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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그 미소는 그가 늘 바라던 대로 내가 마지막 손님으로 남아 주어 무척 기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잘 가요, 친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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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빵대는 경적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나는 돌아서서 잔디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웨이퍼 과자 같은 달빛이 개츠비의 저택을 비추며 전처럼 멋진 밤을 만들었고, 아직까지 빛나는 정원의 말소리나 웃음소리보다 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갑자기 창문과 큰 문에서 공허감이 밀려드는 듯했고, 현관에 서서 정중히 작별 인사를 하려 손을 흔드는 집주인의 모습이 아주 고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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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썼던 글을 읽어 보면서, 지난 몇 주간 띄엄띄엄 일어난 그 사흘 밤의 사건들이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건들은 번잡한 여름에 일어난 보통 일이었을 따름이고, 한참 뒤까지도 나는 아주 개인적인 일에 더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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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날씨가 좋으면 매디슨 가를 따라, 유서 깊은 머리 힐 호텔을 지나, 33번가 너머의 펜실베이니아 역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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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활기 있고 멋진 밤의 분위기, 쉬지 않고 명멸하는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호기심 어린 눈에 주는 만족감이 좋아졌다. 나는 5번가로 걸어 올라가서 군중 속에서 낭만적인 여자들을 골라 몇 분 동안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즐겼다. 아무도 모르고, 반대하지도 않을 일이었다. 가끔은 마음속으로 후미진 뒷골목 모퉁이에 있는 아파트까지 여자들을 따라가서는 그녀들이 뒤돌아서 내게 미소 지은 뒤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매력적인 대도시의 황혼 속에서 나는 가끔 고독했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서도 고독을 느꼈다. 쇼윈도 앞을 서성이며 식당에서 외로이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가난한 젊은 사무원들, 인생과 밤의 가장 강렬한 순간을 낭비하고 있는 어스름 속의 그 젊은 사무원들에게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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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9 - P99

조던 베이커는 영리하고 약삭빠른 남자들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녀는 어떤 규범에서 벗어날 생각을 전혀 못 하는 남자들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 것 같다. 그녀는 구제불능일 만큼 정직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견디지 못했고, 원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면 세상을 향해 그 차갑고 오만한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단단하고 멋진 신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줄곧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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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기본적인 미덕 가운데 적어도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고 믿는데, 내게도 그런 미덕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정직한 사람 중에 나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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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적이 있다.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짙은 크림색에, 니켈 장식으로 반짝이고, 무지무지하게 긴 차체 안에는 모자 상자와 음식 상자, 공구 상자가 여기저기 뽐내듯 놓여 있고, 미로처럼 복잡한 앞 유리들이 태양을 여러 개로 반사하고 있었다. 여러 겹의 유리창 뒤, 온실 같은 초록색 가죽 시트에 앉아 우리는 시내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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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9 - P109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너무나 진부한 상투어들이라 머리에 터번을 두른 〈인형〉이 바늘땀마다 톱밥을 흘리며 불로뉴의 숲을 가로질러 호랑이를 쫓는 모습만이 떠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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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9 - P112

거대한 다리 위, 햇빛이 대들보 사이를 지나 달리는 자동차 위에서 계속 반짝였고, 강 건너로는 뉴욕 시가 흰 각설탕 덩어리처럼 솟아 있었다. 모두가 〈냄새 안 나는 돈〉으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소망으로 세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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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황금 모자를 써라, 그녀를 감동시킬 수만 있다면.
높이 뛸 수 있다면, 또한 그녀를 위해 뛰어 보아라.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연인이여,
황금 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이여,
내 반드시 그대를 차지하고 말리라!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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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9 - P7

지금보다 쉽게 상처받던 젊은 시절, 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충고를 나는 지금까지도 마음 깊이 되새기고 있다.

「혹여 남을 비난하고 싶어지면 말이다, 이 세상 사람 전부가 너처럼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걸 기억해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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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 책의 제목이 된 개츠비란 인물만은 예외다. 개츠비는 내가 대놓고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의 성격이란 것이 성공적인 제스처의 연속이라면, 그에게는 뭔가 멋진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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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북미 대륙에서 가장 특이한 동네 중 하나라 할 만한 곳에 집을 얻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그 집은 뉴욕 시에서 정동쪽으로 뻗은, 떠들썩하고 길쭉한 섬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섬에는 신기한 자연 현상이라 할 만큼 기이하게 생긴 두 지역이 있었다. 거대한 달걀 모양의 두 지역은 뉴욕 시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겉모습이 아주 똑같았다. 만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서반구에서 가장 많이 개발된, 거대한 롱아일랜드 해협의 앞마당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이 두 지역은 정확히 타원형은 아니었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서로 접한 양 끝 면이 납작했다. 모양이 너무나 비슷해서 그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들도 번번이 헷갈릴 게 분명했다. 새가 아닌 인간이 보기에는 모양과 크기만 빼곤 모든 게 다르다는 것이 더 흥미로운 현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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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집은 달걀 모양 지역에서 정확히 끝에 있었고, 롱아일랜드 해협에서 대략 5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1만 2천이나 1만 5천 달러를 줘야 한 철 빌릴 수 있는 거대한 두 저택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오른쪽 집은 누가 봐도 엄청나게 큰 저택이었다. 실은 노르망디 시청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한쪽에는 가는 수염 같은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새로 세운 탑과 대리석 수영장, 40에이커[6]가 넘는 잔디밭과 정원이 딸려 있었다. 바로 개츠비의 대저택이었다. 아니, 아직 개츠비가 누구인지 몰랐으니 개츠비라는 신사가 사는 저택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사는 집이 걸림돌인 셈이었지만 워낙 작아서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바다와 이웃집 잔디밭을 일부 조망할 수 있었고, 백만장자들 가까이 산다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한 달에 단돈 80달러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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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만인 좁은 만의 건너편에서는 이스트에그의 새하얗고 궁전 같은 호화 저택들이 해변을 따라 반짝였다. 사실 그해 여름의 이야기는 내가 톰 뷰캐넌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그곳으로 차를 몰고 가던 그날 저녁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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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9 - P16

우리는 천장이 높은 복도를 지나, 양 끝에 달린 프랑스식 창문들에 의해 집에 가까스로 붙어 있는 밝은 장밋빛 방으로 들어갔다. 창들은 살짝 열려 있었고, 웃자라 집 안으로 살짝 들어온 것 같은 신선한 바깥 잔디와 대비되어 하얗게 반짝였다. 방 안으로 불어온 미풍이 커튼 한쪽 끝은 안으로, 다른 끝은 밖으로 빛바랜 깃발처럼 펄럭이며 설탕 입힌 웨딩 케이크 같은 천장 쪽으로 말아올렸다. 그러고는 바다 위로 부는 바람처럼 와인색 카펫 위에 물결을 일으키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한애경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9 - P20

그 소파에는 젊은 여자 둘이 단단히 묶어 둔 열기구를 탄 것처럼 둥실 떠 있었다. 여자들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열기구를 타고 집 안을 잠시 둘러보다 이제 막 내린 것처럼 드레스 자락에 잔물결이 일며 팔랑거렸다. 나는 커튼이 펄럭이는 소리와 벽에 걸린 그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또렷이 들으며 잠시 서 있었다. 톰 뷰캐넌이 쾅 하고 뒤창을 닫아 방에 갇힌 바람이 가라앉자, 커튼과 카펫, 두 젊은 여자도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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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아방가르드 운동 중 하나인 다다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비록 단명했지만(1916년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야간 행사로 시작되어 1922년 트리스탄 차라의 희곡 「가스가 들어찬 마음 Le Coeur à gaz」에 대한 격렬한 항의로 사실상 끝나 버렸다) 그 정신은 저 멀리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48

후고 발은 시대의 인물이었고 그의 일생은 20세기의 첫 25년 동안 유럽 사회가 보여 준 열정과 모순을 고스란히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니체의 저작을 열심히 읽었고, 표현주의 극단의 무대 매니저 겸 희곡 작가였고, 좌파 언론인이었으며, 보드빌 피아니스트였고, 시인 겸 소설가였으며, 바쿠닌, 독일 지식인들, 초기 기독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각각 다룬 연구서를 펴냈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생애의 이런저런 시기에 당대의 거의 모든 정치적・예술적 관심사에 손을 댄 듯하다. 이토록 많은 활동을 했지만 발의 태도와 관심은 평생 일관되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그의 일생은 근본적 진리, 혹은 절대적 리얼리티 속에 자신의 존재를 뿌리내리려는 지속적인 열정과 시도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술가 기질이 넘쳐서 철학자는 될 수 없었고, 철학자 기질이 넘쳐서 예술가는 될 수 없었다. 세상의 운명에도 관심이 많아 개인의 구원에만 몰두할 수 없었고, 너무나 내성적이어서 실천적인 행동주의자는 되지 못했다. 후고 발은 이런 내적・외적 욕구에 답변해 줄 해결안을 얻기 위해 투쟁했다. 아무리 깊은 고독에 빠져 있어도 자신을 사회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아주 힘들게 획득하는 사람이었다. 정체성을 고정하는 법이 없었고, 도덕적 성실성이 너무나 철저해 그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주 무모하고 이상적인 제스처도 스스럼없이 취하는 사람이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0

『시간으로부터의 탈주』의 프롤로그에서 발은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여 주는 문화적 검시(檢屍)를 해 보인다. 〈1913년의 세계와 사회는 이렇게 보였다. 생활은 완전히 제약을 받았고 족쇄가 채워졌다. (……)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러했다. 현재의 사태에 종지부를 찍을, 강력하면서도 신선한 힘이 과연 있는가?〉 1917년 칸딘스키 관련 강연에서 그는 그러한 생각을 좀 더 긴급하게 말한다. 〈천 년 된 문화가 붕괴하고 있다. 기둥도 대들보도 기반도 더는 없다. 모두 무너져 버렸다. (……) 세계의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느낌은 우리에게 새롭지 않다. 그것은 제1차 대전 당시 유럽의 지적 분위기와 근대적 감수성의 기반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줄 따름이다. 그러나 발이 프롤로그에서 추가로 말한 내용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철학은 예술가에게 지배당하는 듯 보인다. 새로운 충동은 예술가에게서 나오는 듯 보인다. 예술가는 재탄생의 예언자인 듯하다.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이름을 말할 때, 우리는 화가가 아니라 사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장인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천국의 창조자를 뜻하는 것이다.〉 완전한 재생의 꿈은 황량한 비관론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발은 재생의 꿈과 비관론의 양립에서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한다. 둘 다 동일한 접근 방식의 한 부분인 것이다. 가장 힘든 시기에 발을 지탱해 준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다. 그의 초기 극단 작업(〈오로지 연극만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칸딘스키에게서 영향을 받은 예술론(〈모든 예술적 수단과 힘의 통합〉), 그리고 취리히에서의 다다 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믿음은 굳건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2

〈완벽한 회의가 완벽한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 어떤 대상이나 대의에 대한 믿음이 끝장나면 그 대상이나 대의는 카오스로 돌아가고 그리하여 공동의 재산이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처럼 강력하게 생산된 카오스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변화된 믿음의 바탕 위에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에 앞서 총체적인 철수가 가능한 것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3

〈이 소리 시에서 우리는 언론이 남용하고 부패시킨 언어를 완전히 포기한다. 우리는 단어의 내밀한 연금술로 돌아가야 한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3

그는 1921년에 쓴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자, 심미주의자, 수도사, 이 셋은 현대 부르주아지 교육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새로운 이상은 이 셋에게서 새로운 요소들을 가져와야 한다.〉 발은 짧은 생애 동안 이 서로 다른 관점들을 종합하려고 애썼다. 오늘날 우리가 그를 중요한 문학인으로 여기는 까닭은, 그가 새로운 해결안을 발견했다기보다 당대의 문제들을 아주 명료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과감히 맞선 그의 지적인 용기는 휴고 발을 당대의 모범 지식인으로 만들어 준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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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 환자와 언어들』은 이러한 변환들의 나열이 아니다. 이런 변환들이 책의 핵심을 차지하고 어떻게 보면 책의 목적을 규정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책의 실체는 다른 곳에 있다. 이처럼 언어에 몰두하는 울프슨의 일상생활과 인간의 조건을 보여 주는 것이 책의 실체이다. 뉴욕에 살고 뉴욕의 거리를 헤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렇게나 직접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책은 무척 드물다. 세부 사항을 관찰하는 울프슨의 눈은 지독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정밀하며, 그가 파악한 세밀한 뉘앙스는 아주 철저하면서도 권위 있게 제시된다. 가령 42번가 공공 도서관 열람실의 감옥 같은 분위기, 고등학교 무도회의 긴장감, 타임스 스퀘어의 매춘부, 도시 공원의 벤치에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 등이 엄청나게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객관화의 기이한 움직임이 계속 벌어지고, 울프슨 산문이 지닌 매력은 상당 부분 이러한 거리 두기의 결과이다. 거리 두기의 행위는 일종의 미끼가 되어 우리를 울프슨 산문으로 끌어당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40

루이스 울프슨은 조현병 환자이다. 그는 1931년생이고 뉴욕에 산다.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그의 책을 일종의 3인칭 자서전 혹은 현재의 회고록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자신의 질병을 기록하면서 아주 기이한 기록 방식을 고안해 냈다. 울프슨은 자신을 〈조현병을 앓는 언어학도〉, 〈정신적으로 병든 학생〉, 〈치매에 걸린 관용구 학생〉 등으로 부르면서 건조한 임상 보고서와 창의성 풍부한 소설의 특징을 두루 갖춘 서술 문체를 사용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정신 착란이나 〈광기〉의 흔적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문장은 명석하고 직설적이고 객관적이다. 우리는 저자의 강박증이 이룬 미로를 방황하면서 저자의 심정을 느끼게 되고, 그와 동일시하게 되고, 키릴로프*와 몰로이**의 괴팍함과 고통을 알아보게 된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37

루이스 울프슨이 쓴 『조현병 환자와 언어들Le Schizo et les langues』 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소설은 정말 황당무계하고 기존 소설과 전혀 다르다. 문학의 주변부에서 집필된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 소설의 위치는 문학이 아니라 언어의 주변부인 듯싶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프랑스어로 쓴 이 소설은 미국 책이라는 인식 없이 읽으면 별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밝혀질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은 번역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 버린다. 이 소설은 두 언어의 중간 지대를 배회하는데, 이 위태로운 현존으로부터 소설을 구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은 〈외국어로 집필하기를 선택한 작가의 소설〉 정도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작가는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그것은 아주 엄청난 필요의 결과였고 소설 쓰기는 곧 생존의 행위였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37

울프슨이 먹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탐식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책무를 배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입을 자신을 살려 주는 언어(말씀)를 발견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먹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는 것은 하나의 타협이다. 이미 부정 타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 세계에 존재하면서 언어를 발견하려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45

누군가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치료법을 처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문제를 직접 대면하도록 자신을 몰아붙이며,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나갈 가능성을 내면에서 희미하게 감지하는 것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46

루이스 울프슨은 문학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그를 공정하게 대접해 주자면 우리는 그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런 방식을 취할 때에만 우리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바꾸어 놓을 진귀한 작품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47

저는 지금 글쓰기, 특히 이야기하기 수단으로서의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상상 속 이야기들 말입니다. 확실히 그건 이상한 삶입니다. 몇 시간, 몇 날, 몇 해를 홀로 방에 틀어박혀 펜을 들고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종이 위에 글을 적으려고 분투하는 삶이니까요.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고 싶은 걸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입니다. 그래야만 하니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05

하지만 저는 예술의 가치가 바로 무용함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는 우리를 이 행성에 거주하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차별화하는 동시에 근본적으로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해 줍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06

우리는 나이를 먹지만 변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면서 지적 수준이 점차 높아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계속해서 어릴 적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남아 다음 이야기, 그다음 이야기, 그다음 이야기를 갈망합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08

인간에겐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이야기가 음식만큼 절실히 필요하며,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제공되건 ─ 종이에 인쇄되건 텔레비전 화면으로 전달되건 ─ 이야기 없는 삶은 상상 불가능합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08

그렇지만 저는 소설의 현 상태, 그리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봅니다. 책에 관련해서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늘, 언제나 독자는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소설은 특별한 힘을 지니며, 제 견해로는, 그래서 소설이라는 형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동등하게 기여한 협업의 결과물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 대화를 나눠 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2006년 10월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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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자면 먼저 먹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글을 쓰지 않으면 먹지 않으려 한다. 먹지 못하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지 못한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16

함순의 한 에세이에는 공간과 시간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보이지 않는 우회〉를 계획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함순은 19세기 소설의 기본 구성 원칙인 역사적 시간을 우회해 버린다. 그는 주인공이 굶주림을 상대로 극단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굶주림을 면하는 시기는 일주일에 이르지만, 소설에서는 한두 문장으로 처리된다. 내면의 지속적 흐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연대기적 시간은 생략된다. 임의적인 시작과 끝을 지닌 이 장편소설은 서술자의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변덕을 충실하게 기록한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생각이 아주 신비롭게 일어나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어져 나가다 느닷없이 사라지고, 그러면 또 다른 생각이 생겨나서 뒤를 받치는 것이다. 떠오를 수 있는 모든 생각이 떠오르도록 허용된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17

내가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도 없으며 마음의 미친 듯한 변덕을 계속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했다. (……)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으며 또 내 마음은 보이지 않는 힘들의 싸움터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모든 세부 사항을 의식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0

나는 아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일정 기간 굶주림을 견뎌 내자 뇌수가 머리에서 조용히 빠져나가 나를 텅 빈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머리는 가볍게 부유했고 더는 그 무게를 내 어깨에 느끼지 못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0

그리하여 그의 단식은 모순이 된다. 단식을 계속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이 오면 단식은 저절로 끝나게 된다. 따라서 단식을 계속하자면 살아 있어야 하지만 죽음 일보 직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생을 끝장내겠다는 생각은 그 끝장이 늘 주위에 어른거리는 가능성으로 남도록 하기 위해 완강히 거부된다. 그의 단식은 목적을 제시하지도, 구원의 약속을 제공하지도 않기 때문에, 단식의 모순은 미해결의 장으로 남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그것은 절망의 이미지를 남긴다. 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과 자기 파괴적인 열정에 의해 생성된다. 절망에 빠진 영혼은 자신을 파괴하려 하고, 절망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지 못하고 더욱더 깊숙이 절망으로 가라앉는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2

자기모멸이 궁극적으로 자기 정화의 역할을 하는 종교 예술(가령 17세기의 명상 시들)과는 다르게, 굶주림은 구원의 변증법을 흉내만 낼 뿐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2

잠시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밑바닥이 없는 이 조밀한 어둠의 실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은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어둠처럼 보였다. 그 존재가 나를 짓누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나지막이 노래 부르면서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침대 위에서 가볍게 몸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어둠이 내 두뇌를 사로잡았고 나에게 한시의 평화도 주지 않았다. 내가 어둠 속으로 용해되어 아예 어둠이 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5

나는 굶주림이라는 즐거운 정신 이상 상태에 도달했다. 고통에서 해방되어 텅 빈 상태였고 내 생각은 더 이상 견제당하지 않았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5

아니다. 그 단어는 실제로 정신적인 어떤 것, 어떤 감정, 혹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나는 정신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6

그는 여자를 위해 아주 어감이 좋은 이름을 지어내는데, 오로지 그 이름으로만 여자를 부른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7

도덕의 영역에서 선과 악이 상대적 개념이라면, 언어의 영역에서는 거짓말과 진실이 상대적 개념이다. 언어는 사회적 규약이고 우리가 믿어 주는 한 위력을 발휘한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27

단지 예술이란 예술 자체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의 직접적 표출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예술이란 굶주림의 예술, 혹은 결핍・필연・욕망의 예술인 것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30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으로 예술의 형태가 없어지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리라는 겁니다. 그 새로운 형태는 혼란을 인정하면서도 그 혼란이 대단한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그런 타입이 될 겁니다. (……) 혼란을 수용하는 형태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에게 부여된 과업입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31

결국 굶주림의 예술은 실존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방법이고, 이때 죽음이란 바로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죽음이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구원의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삶이다. 느닷없이 부조리하게 삶이 끝나는 것, 그게 죽음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33

문학은 본질적으로 교란을 일으키는 힘이며 〈공포와 전율〉 속에서 마주친 현존으로서 인생의 진실과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학은 연속되는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일련의 일탈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게 될 책은 통상 집필 당시의 문학 사상에 역행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3533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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