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죽이는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관찰하고, 감시하고, 숙고해야 한다, 아주 많이. 그리고 때를 보아 빈틈을 파고든다. 그렇다.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우주가 쪼그라들도록, 쪼그라들다 못해 총부리나 칼끝에 응집되도록 애를 써야 한다. 그게 전부다. 의문을 품지 말 것, 분노에 쓸려 가지 말 것, 매뉴얼을 선택할 것, 조직적으로 행동할 것. 블레이크는 이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워낙 오래전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조차 모른다. 나머지는 나중에, 그냥 저절로 할 수 있게 됐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6
살인, 그건 소명이 아니라 기질이다. 어떤 정신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블레이크는 열한 살이고 이름이 블레이크가 아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7
재미있는 것은 기술적인 손놀림, 반복을 거듭해 물 샐 틈 없이 완벽해진 루틴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8
그날 밤 블레이크는 블레이크를 만들어 낸다. 앤서니 홉킨스가 나오는 「레드 드래곤」을 보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을 읽어 봤는데 마음에 드는 시가 한 편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세상으로 나는 뛰어들었지/무력하게, 벌거벗은 채, 빽빽 울면서/구름 속에 숨은 악마처럼." 게다가 블레이크는 블랙과 레이크, 검은색과 호수의 조합이다. 멋지지 않은가.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0
빅토르 미젤은 매력이 없지 않다. 각진 얼굴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인상이 유해졌다. 숱이 많은 머리칼, 매부리코, 가무잡잡한 피부는 카프카를 닮았다. 마흔을 넘기는 데 성공한, 좀 기운 넘치는 카프카랄까. 키와 체격이 크고, 장시간 앉아서 일하는 직업 탓에 살이 좀 붙긴 했어도 날씬한 편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3
마흔세 살이 되기까지 작가로 십오 년을 살았지만, 문단이라는 좁은 바닥은 차표 없는 사기꾼들이 무능한 승무원들과 짜고 여봐란듯이 일등석을 차지한 우스꽝스러운 열차 같다. 겸손한 천재들은 플랫폼에 있다. 자신이 멸종해 가는 그 족속에 속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앙심을 품지 않았다. 마침내 마음 졸이지 않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3
미젤은 번역으로 먹고산다. 영어, 러시아어, 그리고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배운 폴란드어까지. 블라디미르 오도옙스키, 니콜라이 레스코프, 그 외 일반 대중은 잘 읽지 않는 19세기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다. 아무 일이나 받을 때도 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4
문학을 미성년자를 위한 마이너 예술로 만드는 책들. 그 일은 명망 높거나 힘 있는 출판사들의 문을 열어 주었지만 정작 그 자신의 작품 원고는 그 출판사들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4
미젤은 아이가 없다. 그는 열정에 타격을 입지는 않은 채로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며 실패를 거듭해 왔다. 자주 거리를 두었고, 확신이 없었고,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은 여자를 만난 적도 없다. 어쩌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 싶은 여자들만 만나 온 건지도.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5
이듬해, 그다음 해에도 그는 컨퍼런스에 갔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간 거다. 그때 이후로 — 직업적으로는 심각한 과오지만 — 그는 번역문에 애스콧 경마장이나 크렘 앙글레즈를 묘사하는 짧은 글을 슬쩍 끼워 넣곤 했다. 구레비치 선집에서부터 이 못된 짓이 시작되었다. 산문집 첫 장의 "Почему нужно дать женщинам все права и свободу?(왜 여성이 모든 자유와 권리를 누려야 하는가?)"라는 문장에 "자유는 초콜릿 케이크에 얹은 크렘 앙글레즈가 아니다. 그것은 권리다."라는 문장을 집어넣었다. 이목을 끌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7
그리고 아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번역가의 역할은 "작품의 포로가 된 순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0
그는 파리에 돌아와 글쓰기에 돌입한다. 누가 불러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쓰는 것처럼. 이 글쓰기의 통제 불가능한 메커니즘이 그를 깊은 불안에 빠뜨린다. 제목은 ‘아노말리’, 그의 일곱 번째 책이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행동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어떤 움직임도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그리지도 않은 선들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 만족했다. 우리는 가장 힘이 들지 않는 저항 곡선을 따라 살 뿐인데도 마치 공간을 지배하는 양 건방을 떤다. 한계 중의 한계. 어떤 비상(飛翔)도 우리의 하늘을 펼치지는 못하리."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1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2021년 4월 22일 정오의 일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3
어슴푸레한 새벽빛 속에서 각진 얼굴의 남자가 살그머니 침실 문을 연다. 그의 피곤한 눈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침대에 가서 머문다. 한 여자가 거기 누워서 자고 있다. 삼 초짜리 컷이지만 뤼시 보게르가 보기엔 별로다. 너무 밝고, 너무 산만하고, 너무 정적이다. 촬영 감독이 졸면서 찍은 것 같다. 감마2)와 콘트라스트를 보정하고 배경의 그림을 좀 날려 줘야 한다는 메모를 특수 효과 팀에게 남긴다. 뱅상 카셀의 얼굴 주위로 프레임을 좁히고 살짝 줌 인으로 들어간다. 리듬감이 생기도록 장면 몇 개를 슬로 모션으로 처리한다. 뤼시에겐 일 분으로 충분하다. 됐다. 훨씬 낫다. 디테일에 대한 이런 감각, 이런 영화적 본능 덕분에 그녀는 많은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편집자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4
벽난로 위 커다란 거울에 훅 불면 날아갈 듯 소녀처럼 작고 가녀린 여자의 모습이 비친다. 창백한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칼. 우아한 그리스식 코에 얼룩무늬 뿔테 안경을 걸치면 대학생처럼 보인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5
하지만 그는 이미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뤼시는 그 말을 경계한다. 그 말을 듣기엔 너무 이르다. 그녀가 사랑했던 다른 남자는 그 기만적인 말을 너무 자주, 너무 온당치 않게 사용했다. 그 남자는 그녀를 학대하고 모욕했다. 사라졌다가 돌아왔고, 그러다 또 잠수를 탔다. 그녀는 앙드레에게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그녀의 고운 살결, 날씬한 다리, 창백한 입술, 그 행복의 기약 때문에 그녀를 원하는 남자들이 지겹다고. 사냥하듯 접근해 그녀를 트로피처럼 벽에 걸어 두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지겹다고. 그녀는 충동적 욕망 이상을 누릴 자격이 있고, 누구의 노리개도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고, 그래서 이렇게 그의 곁에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에게서 다정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그녀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를 나이 많고 조용한 구애자 역할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를 원한다. 칼처럼 자르든가, 완전히 항복하든가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완고하고 때로는 잔인하리만치 무정하게 그를 대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점점 커져 가는 마음에 저항하는 데 그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9
강제적인 구석 없이 관계가 천천히, 잔잔하게 흐르기를 바랐다. 남자의 갈망하는 손길은 겁이 난다. 남자들의 폭발하는 욕정을 마주하면 그녀 자신은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앙드레가 지금까지 잘 감춰 온 약점이 명백해진다. 아니다, 앙드레를 편안하게 달래 주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의 압제적인 욕구에 맞춰 주고 싶지 않다. 나이 때문에 상처 입은 나르시시즘일지라도 그녀가 보듬어야 하는 건 싫다. 날 데려가 줘, 날 데려가 줘, 하며 애처롭게 쳐다보는 사육장의 강아지 같은 눈길도 이제 못 봐주겠다. 왜 그는 자기 품에, 침대에 그녀를 옭아매고 있다는 걸 알려 하지 않을까? 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의무감을 갖는 것에 그녀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42
그때 그가 작은 책 한 권을 내민다. 『아노말리』, 빅토르 미젤. 그 이름을 보니 뭔가 생각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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