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맺힌 슬픔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거부하지 않고 그 느낌이 저를 감싸도록 놔뒀습니다.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처음엔 주저하는 듯하더니 점점 더 강렬하게 솟구쳤습니다. 목구멍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격렬한 통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온몸이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절을 올렸습니다. 얼마 뒤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었습니다. 제 안의 번뇌가 다 씻긴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마침내 눈물이 다 마르자 저는 새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 - P142

그러자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무기력함을 마주하자 기쁨의 문이 다시 열렸던 것입니다. 슬픔 대신 경외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 - P142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입니다. 이 진리는 부처님의 무척 위대한 발견 중 하나입니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발달단계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 - P145

하지만 고통이 자기 안에서 출발한다는 통찰력을 갖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면 아주 겸손해야 합니다. 고통이 저 자신에게서 출발한다고 받아들여 버리면 이제 상황이나 다른 사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비로소 새로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어떤 식으로 다뤄야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요?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 - P146

우리가 집착하며 좀처럼 놓지 못하는 어떤 ‘생각’이 불행감을 초래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대체로 그 자체로 보면 꽤 합리적이고 그럴싸합니다. 누군가가 뭘 ‘했어야 했다’라는 식이죠.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1 - P147

이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생각은 ‘내가 그랬어야 했다’라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내가 달라졌어야 했는데’, ‘내가 더 현명했어야 했는데’, ‘내가 더 열심히 일했어야 했는데’, ‘더 돈이 많았어야, 더 나았어야, 더 날씬했어야, 더 성숙했어야 했는데’. 이 함정에 빠지면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마구 날뛸 때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먼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멀어집니다. 그러고는 말하는 겁니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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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 햇살이 비친다. 썩 좋은 타이밍은 아니지만 금빛 햇살이 데이비드에게 드리운다. 오후 5시 21분, 서쪽에서 3번가의 고층 빌딩 사이로 비치는 이 엄청난 햇살은 생명의 빛, 일시적인 기적이다. 그 기적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정확히 십이 분 동안 지속된다. 그러니 5시 33분이면 끝나리라.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53

순탄한 비행은 모두 비슷하다. 반면 난비행은 각기 나름대로 힘들다. 파리-뉴욕 간 AF006 여객기가 노바스코샤주 남부 상공을 지나던 오후 4시 13분, 푹신한 거대 적란운 벽이 전방에 나타난다. 구름 낀 전선이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비행이 아직 십오 분 남았지만 북쪽과 남쪽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아치형으로 펼쳐진 전선은 이미 최고치인 4만 5000피트 상공까지 올라와 있다. 3만 9000피트 고도에서 비행 중인 보잉 787 여객기는 뉴욕을 향해 하강을 시작해야 했으므로 구름 전선을 피할 도리가 없다. 조종실이 돌연 부산스러워진다. 부조종사가 지도와 기상 레이더를 분석한다. 구름을 동반한 거대한 한랭 전선은 예보에 없었다. 지드 파브로는 이제 놀란 것을 넘어 진지하게 걱정이 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56

어쩌면 조종사들은 죽기 전 인생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순간조차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클은 승객들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단지 이 크고 무겁고 둔중한 보잉 여객기를 구하려고 애쓸 뿐. 그는 암기하고 있는 동작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반사 신경과 이십 년의 경험치에 자신을 맡긴다. 그래도 엉망진창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61

베티의 피부는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의 정원 흙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죽음 속에 굳어진 베티는 개구리의 엑토플라즘6)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66

문학적 소양이 생뚱맞게 여겨지는 경영인들의 세상에서, 그는 그 소양을 상징적 지배의 강력한 도구로 삼았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86

어둠의 텍스트, 거리를 둘 줄 모르고 야유조차 고통스러운 텍스트. "맙소사, 종교적 정신에서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음이 배어 나오는지. 모든 신념은 지성에 비수를 꽂는다. 신자는 죽음을 또 하나의 불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려다 이성을 잃었다. 나는 의심으로 인해 생의 독학자가 되었고, 그리하여 매 순간을 한층 더 즐거이 누릴 수 있었다. 신의 영광을 드러내며 반짝이는 구름 앞에서도 나는 신비감에 빠지지 않았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순간 헤엄을 치려고 용을 쓰겠지만, 아르키메데스에게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물속에 가라앉으면서 어떤 명제도 진리로 통하지 않는 심연을 향해 눈을 뜬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97

그녀는 『아노말리』를 이 작품이 예고한 참사에 비추어 다시 읽어 본다. 그리고 작가명이 빅토르 미젤(Victør Miesel)로 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공집합의 기호로 쓰이는 그리스 문자 ø. 비극적인 재치의 발휘.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97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충분히 깨달을 만큼 오래 산 사람은 없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98

위상학을 연구하는 그 영국 여자가 프린스턴에 온 지도 두 달. 너무 가는 다리와 너무 얌전한 갈색 머리, 너무 긴 코와 너무 까만 눈을 한, 언제나 냉담한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에이드리언을 사로잡고 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19

그는 스무 살에 마르코프 사슬, 켄달 표기법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그는 대기 행렬에 관심이 많다. 특히 리틀의 법칙, 즉 안정적인 시스템 내의 평균 객체 수는 시스템에 유입되는 객체의 양과 객체가 시스템 안에 머무는 시간을 곱한 값과 같다는 법칙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30

에이드리언 밀러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광팬이고, 그 책에 나오는 역사상 두 번째로 강력한 컴퓨터 ‘깊은 생각(Deep Thought)’이 ‘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거대한 물음’에 대해 750만 년의 계산 끝에 ‘42’라는 단순한 답을 내놓았기 때문에 해당 프로토콜 번호는 42가 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33

그렇다, 뤼시가 그를 흔들어 놓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가 스무 살만 젊었어도 그녀에게 아이를 만들자고 했을 텐데. 나이 차 때문에 다 어림없는 일이 되었다. 앙드레의 딸 잔이 조금 있으면 뤼시 나이가 될 판인데 무슨. 얼마 전 농담 삼아 어떤 여자에게 "내 과부가 되어 주겠소?"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과부로 추정되는 그녀는 웃지 않았다. 요즘 그가 만나는 여자들은 왜 하나같이 어린가? 친구들은 그와 함께 늙어 갈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는 여자들은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망친다, 겁이 난다. 다가오는 죽음과 저녁 식사는 같이할 수 있지만 잠자리는 불가능하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7

죽음이 가시권에 들어왔을 때부터, 요컨대 오래전부터 그는 욕망을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뤼시는 누가 봐도 욕망을 주변에 두는 여자였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8

그가 서른 살이라면, 피부가 탄탄하다면(죽음도 주름도 겁내지 않는 불멸의 피부 말이다), 그의 머리가 새까맣고 숱이 많다면, 그렇게 잘난 남자가 옆에 누워 있었어도 뤼시가 아침마다 쌩하니 욕실로 달려갔을까? 가령 저 잘생긴 닐센이라면. 그래, 닐센, 안 될 것 없지. 그는 사랑스러운 뤼시의 몸에 올라탄 눈부신 닐센의 몸뚱이를 얼핏 떠올리고는 부르르 떤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그 답이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9

그래도 때때로 뤼시는 그에게 손을 뻗어 그 육(肉)의 실린더가 단단한지 확인하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그는 그녀 안에 깊이 처박히고, 그 체위로는 키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허리를 세우고 신속하게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날씬한 몸이 땀에 젖었다면 이제 그도 빨리 절정을 맛봐야 한다는 신호다. 앙드레는 해방의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를 거칠게 취하려 든다. 하지만 섹스의 빈도도 그렇고, 속전속결의 리듬도 그렇고, 그와는 무엇 하나 맞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49

그는 갈망했고, 슬펐고, 불안했다. 그래서 차츰 조심성을 잃고 자꾸 눈치 없이 집요하게 굴었다. 하지만 눈치 있는 집요함도 있나? 존재를 부정당하고 육체적으로 좌절한 그는 어디서 새로운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0

뤼시는 완전히 떠났다. 건축가는 ‘다른 데로 옮겨 갔다.’는 표현을 거듭 되뇐다. Sic transit(지나갈 것이다). 앙드레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점을 고려할 때, 바로 옆에 누워 있지만 몇 광년 너머에 있는 여자를 미적지근한 무관심의 그늘 속에서 끝없이 욕망하기보다는 아예 떠나 버린 여자를 매일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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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티코, 이 일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네. 이 일을 끝내고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 그 점이 중요하다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 - P138

이상하게도 그해 내내 가슴속에서 뭔지 모를 슬픔이 맺히더니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요.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이려 애썼습니다. 말을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썩 물러가라고 호통도 쳐보고 외면하고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노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슴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서 제 삶의 즐거움을 앗아갔습니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852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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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이는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관찰하고, 감시하고, 숙고해야 한다, 아주 많이. 그리고 때를 보아 빈틈을 파고든다. 그렇다.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우주가 쪼그라들도록, 쪼그라들다 못해 총부리나 칼끝에 응집되도록 애를 써야 한다. 그게 전부다. 의문을 품지 말 것, 분노에 쓸려 가지 말 것, 매뉴얼을 선택할 것, 조직적으로 행동할 것. 블레이크는 이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워낙 오래전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조차 모른다. 나머지는 나중에, 그냥 저절로 할 수 있게 됐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6

살인, 그건 소명이 아니라 기질이다. 어떤 정신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블레이크는 열한 살이고 이름이 블레이크가 아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7

재미있는 것은 기술적인 손놀림, 반복을 거듭해 물 샐 틈 없이 완벽해진 루틴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8

그날 밤 블레이크는 블레이크를 만들어 낸다. 앤서니 홉킨스가 나오는 「레드 드래곤」을 보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을 읽어 봤는데 마음에 드는 시가 한 편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세상으로 나는 뛰어들었지/무력하게, 벌거벗은 채, 빽빽 울면서/구름 속에 숨은 악마처럼." 게다가 블레이크는 블랙과 레이크, 검은색과 호수의 조합이다. 멋지지 않은가.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10

빅토르 미젤은 매력이 없지 않다. 각진 얼굴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인상이 유해졌다. 숱이 많은 머리칼, 매부리코, 가무잡잡한 피부는 카프카를 닮았다. 마흔을 넘기는 데 성공한, 좀 기운 넘치는 카프카랄까. 키와 체격이 크고, 장시간 앉아서 일하는 직업 탓에 살이 좀 붙긴 했어도 날씬한 편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3

마흔세 살이 되기까지 작가로 십오 년을 살았지만, 문단이라는 좁은 바닥은 차표 없는 사기꾼들이 무능한 승무원들과 짜고 여봐란듯이 일등석을 차지한 우스꽝스러운 열차 같다. 겸손한 천재들은 플랫폼에 있다. 자신이 멸종해 가는 그 족속에 속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앙심을 품지 않았다. 마침내 마음 졸이지 않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3

미젤은 번역으로 먹고산다. 영어, 러시아어, 그리고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배운 폴란드어까지. 블라디미르 오도옙스키, 니콜라이 레스코프, 그 외 일반 대중은 잘 읽지 않는 19세기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다. 아무 일이나 받을 때도 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4

문학을 미성년자를 위한 마이너 예술로 만드는 책들. 그 일은 명망 높거나 힘 있는 출판사들의 문을 열어 주었지만 정작 그 자신의 작품 원고는 그 출판사들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4

미젤은 아이가 없다. 그는 열정에 타격을 입지는 않은 채로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며 실패를 거듭해 왔다. 자주 거리를 두었고, 확신이 없었고,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은 여자를 만난 적도 없다. 어쩌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 싶은 여자들만 만나 온 건지도.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5

이듬해, 그다음 해에도 그는 컨퍼런스에 갔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간 거다. 그때 이후로 — 직업적으로는 심각한 과오지만 — 그는 번역문에 애스콧 경마장이나 크렘 앙글레즈를 묘사하는 짧은 글을 슬쩍 끼워 넣곤 했다. 구레비치 선집에서부터 이 못된 짓이 시작되었다. 산문집 첫 장의 "Почему нужно дать женщинам все права и свободу?(왜 여성이 모든 자유와 권리를 누려야 하는가?)"라는 문장에 "자유는 초콜릿 케이크에 얹은 크렘 앙글레즈가 아니다. 그것은 권리다."라는 문장을 집어넣었다. 이목을 끌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27

그리고 아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번역가의 역할은 "작품의 포로가 된 순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0

그는 파리에 돌아와 글쓰기에 돌입한다. 누가 불러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쓰는 것처럼. 이 글쓰기의 통제 불가능한 메커니즘이 그를 깊은 불안에 빠뜨린다. 제목은 ‘아노말리’, 그의 일곱 번째 책이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행동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어떤 움직임도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그리지도 않은 선들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 만족했다. 우리는 가장 힘이 들지 않는 저항 곡선을 따라 살 뿐인데도 마치 공간을 지배하는 양 건방을 떤다. 한계 중의 한계. 어떤 비상(飛翔)도 우리의 하늘을 펼치지는 못하리."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1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2021년 4월 22일 정오의 일이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3

어슴푸레한 새벽빛 속에서 각진 얼굴의 남자가 살그머니 침실 문을 연다. 그의 피곤한 눈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침대에 가서 머문다. 한 여자가 거기 누워서 자고 있다. 삼 초짜리 컷이지만 뤼시 보게르가 보기엔 별로다. 너무 밝고, 너무 산만하고, 너무 정적이다. 촬영 감독이 졸면서 찍은 것 같다. 감마2)와 콘트라스트를 보정하고 배경의 그림을 좀 날려 줘야 한다는 메모를 특수 효과 팀에게 남긴다. 뱅상 카셀의 얼굴 주위로 프레임을 좁히고 살짝 줌 인으로 들어간다. 리듬감이 생기도록 장면 몇 개를 슬로 모션으로 처리한다. 뤼시에겐 일 분으로 충분하다. 됐다. 훨씬 낫다. 디테일에 대한 이런 감각, 이런 영화적 본능 덕분에 그녀는 많은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편집자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4

벽난로 위 커다란 거울에 훅 불면 날아갈 듯 소녀처럼 작고 가녀린 여자의 모습이 비친다. 창백한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칼. 우아한 그리스식 코에 얼룩무늬 뿔테 안경을 걸치면 대학생처럼 보인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5

하지만 그는 이미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뤼시는 그 말을 경계한다. 그 말을 듣기엔 너무 이르다. 그녀가 사랑했던 다른 남자는 그 기만적인 말을 너무 자주, 너무 온당치 않게 사용했다. 그 남자는 그녀를 학대하고 모욕했다. 사라졌다가 돌아왔고, 그러다 또 잠수를 탔다. 그녀는 앙드레에게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그녀의 고운 살결, 날씬한 다리, 창백한 입술, 그 행복의 기약 때문에 그녀를 원하는 남자들이 지겹다고. 사냥하듯 접근해 그녀를 트로피처럼 벽에 걸어 두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지겹다고. 그녀는 충동적 욕망 이상을 누릴 자격이 있고, 누구의 노리개도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고, 그래서 이렇게 그의 곁에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에게서 다정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그녀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를 나이 많고 조용한 구애자 역할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를 원한다. 칼처럼 자르든가, 완전히 항복하든가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완고하고 때로는 잔인하리만치 무정하게 그를 대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점점 커져 가는 마음에 저항하는 데 그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39

강제적인 구석 없이 관계가 천천히, 잔잔하게 흐르기를 바랐다. 남자의 갈망하는 손길은 겁이 난다. 남자들의 폭발하는 욕정을 마주하면 그녀 자신은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앙드레가 지금까지 잘 감춰 온 약점이 명백해진다. 아니다, 앙드레를 편안하게 달래 주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의 압제적인 욕구에 맞춰 주고 싶지 않다. 나이 때문에 상처 입은 나르시시즘일지라도 그녀가 보듬어야 하는 건 싫다. 날 데려가 줘, 날 데려가 줘, 하며 애처롭게 쳐다보는 사육장의 강아지 같은 눈길도 이제 못 봐주겠다. 왜 그는 자기 품에, 침대에 그녀를 옭아매고 있다는 걸 알려 하지 않을까? 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의무감을 갖는 것에 그녀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42

그때 그가 작은 책 한 권을 내민다. 『아노말리』, 빅토르 미젤. 그 이름을 보니 뭔가 생각난다.

-알라딘 eBook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중에서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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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도통 남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이였다. 누구의 험담을 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삶이 더 재밌을지, 그런 삶을 위해 지금 무얼 시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과 생각을 나누는 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8

그러나 지금의 나는 H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비존재가 되었어도 나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커다랗게 존재하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꿈이 만발하던 시절의 꿈을 나누던 친구. H는 내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봄날 같은 친구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9

지금까지도 ‘현실 친구’들로 남은. 첫 번째 직장에서 만난 K는 엉뚱해서 좋았다. K는 늘 소소한 딴생각을 품으며 사는, 이를테면 ‘소심한 이단아’다. 쉽게 말해 일상이 무료해지는 걸 못 참는다. 회사 나갈 생각. 나가지 못하면 뭐라도 재밌는 걸 해볼 생각. 늘 그런 기발한 궁리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조금만 만나지 않아도 도대체 뭘 생각하며 사는지 궁금해지는 그런 친구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주제도 모르고 큰 꿈만 꾸느라 잔구멍이 많던 내 삶은 K 덕분에 더 소소한 행복과 시시한 아름다움들로 가득 메워졌다. 지금도 우린 회사 때려치우고 뭘 할지를 궁리하다 ‘네가 먼저 안 그만두니까 나도 못 한다’며 서로를 탓하고, 인기 없는 팟캐스트도 3년째 같이 진행하며 ‘우린 재밌는데 왜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가끔 보고 싶다며. 술이나 마시자며.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누굴 훈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저 대화를 나누고 혼자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성하게 하는 그런 친구. J의 백 마디 말속엔 99번의 공감과 한 번의 조심스러운 조언이 있다. 그 조언은 길게는 몇 년씩 내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곤 한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0

무엇보다 J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글 쓰고 싶다는 욕망이다. 담백하면서도 다 읽고 나면 행간의 여백을 오래 헤엄치게 만드는 J의 글은 내 질투심과 존경심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 자극이 마음속 어딘가에 씨앗을 뿌려 나는 지금도 이렇게 밭을 갈듯 글을 갈고 있는 것만 같다.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가는 J처럼 깊고 우아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이렇게 세 명의 여자사람친구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단명하다. 그들이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고 또 다행스럽기 때문이다. 이성사람친구가 있었기에 내가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세상의 영역들이 참 많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물론 애인도 만나봤지만, 사랑하는 사이(정확히 말해 성(性)을 나누는 사이)가 결코 메울 수 없는 ‘이성에 대한 공감’ 영역은 그들이 없었다면 텅 빈 채로 남아 있었을 테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1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은 그 집단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어린 친구’도 ‘이성사람친구’도 더 많이 사귀어야 한다고 믿는다.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굳기 마련이니까. 나와 다른 집단의 친구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일이야말로 딱딱하게 굳어가려는 편견 덩어리를 용해해줄 ‘생각유연제’가 될 터이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2

그래서 이미 오래된 친구인 저들은 내게 대체 불가능의 존재로 남았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내 일상에 그들이 이미 들어와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있어줄 것 같아서. 나만 잘하면.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3

이렇게 지난날을 모아놓고 보니, 매해 뭘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푸념만 하며 살아온 것만 같았다. ‘나이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보편 지향의 삶에 왜 그리 스스로를 욱여넣고 살아왔을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매 나이마다 해야 할 일을 정해두고 그대로 살아내느라 정작 하고 싶은 걸 포기해버리는 패턴이 나이테처럼 폐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정반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았다면 그 나이대에만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놓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도 겪어봤어야 더 삶답지 않았을까.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3

늦었단 핑계로 내버렸던 꿈들을 내 손으로 다시 주워들이며 살고 싶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꿈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큰 빚을 내어 비어가는 동네의 작은 폐가를 샀다. 공유서재로 꾸며 책도 읽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흔다섯 살 즈음이 되면 영화 아카데미에 만학도로 지원해보려 한다. 일단 시나리오 쓰는 법부터 배우기 위해 책 한 권을 샀다. 그냥 살아지기엔 하고픈 게 너무 많은 삶이어왔다.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내년부터 긴 휴직에 들어간다. 더 이상 나이 핑계 대지 않을 거다. 살아지다 사라지고 싶지 않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4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어온다면, 내겐 올해야. 다시 살아가는 기분이거든. 다만 소망이 있다면 내년 이맘때쯤엔 ‘내년’이라고 답할 수 있기를. 늘 그런 삶이기를."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5

제 삶의 모양을 빼닮은 공간으로 차려놓아 그런지, 첫서재를 찾아주는 이들은 대개 저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골라 읽는 책에서, 차림새에서, 앉은 자세와 미지근한 눈빛에서, 떠난 뒷자리에서 그걸 느껴요. 그들 역시 저마다의 서투름을 여기 쌓아두고 돌아서는 듯합니다. 결이 닮은 사람과 정다운 무관심을 주고받고 내 손과 발이 닿는 범위에서 삶을 매만지는 하루. 이런 나날의 반복을 오래 꿈꿔 온 듯한 착각 속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8

다만 글쓰기가 저를 인도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해요. 첫 글에서 썼듯이 저는 익숙함을 걷어내고 진짜 내 모습을 찾기로 어느 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기록하거나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을 매주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썼지요. 생각한 바를 쓰다 보니 쓴 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의 점성이 점차 늘었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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