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들을 탐사하는 데 할애된 이 소설은 떠오르는 대로 순간의 단상을 적어둔 여러 개의 내 메모들에서 탄생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4
특별한 사람들의 별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지어내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경험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보고서를 쓴다는 것이 이 소설을 쓸 때의 작의라면 작의였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4
제목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일 뿐이고, 사랑이 그 안에서 제 목숨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사랑의 생애’라고 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4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6
사랑이 사람이 빠지거나 잠길 수 있는 것인 양 물화시켜 말하는 이런 수사는 사랑의 불가항력적 성격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에 빠진 사람은 무력하다는 인식이 이 문장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6
‘나는’ ……에 빠졌다. 그러므로 거기서 빠져나오기도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성격의 사랑을 거부하려는 무의식이 이 희미한 주어, ‘나’를 고수하게 한다. 빠진 사람이 나이므로 빠져나올 사람도 나라는 생각은 돌연히 들이닥친 사랑의 사건 앞에서 주체가 겪는 당황과 불안과 무기력을 몰아내기 위해, 혹은 회피하기 위해 구사하는 일종의 기교 같은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기교는 거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빠질 사랑의 웅덩이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이치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
숙주는 기생체가 욕망하고 주문하는 것을 욕망하고 주문한다. 자기 욕망이고 자기 주문인 것처럼 욕망하고 주문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
다른 존재가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존재를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사랑은 문득 당신 속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당신은 도리 없이 사랑을 품은 자가 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8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9
그러나 아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사람이 사랑한다는 이 생각은, 사랑에 제한을 두어 특별하고 고귀한 자리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실제 삶과는 관련 없는 허구적인 것으로 밀쳐놓는 역할을 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0
손상은 그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목적이나 계산을 향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럴 때만 손상이 이루어지니까.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목적이나 계산을 조준하고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 공격이니까.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3
그런데 삼 년 전에 헤어진, 짧은 머리의 크고 검은 눈을 가진 여자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때와는 달리 경멸 대신 연민을, 삼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뒤늦게 제대로, 갑자기 떠올리게 된 것은 어쩐 일인가. 삼 년이 지난 마당에 그녀의 마지막 표정이 왜 갑자기 경멸에서 연민으로 바뀌었는가. 이 뒤집기에 무슨 뜻이 있는가. 어떤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가. 아니, 삼 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 그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의 디테일과 함께 문득 다시 떠오른 것은 왜인가, 하는 질문은 불가피하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4
그날, 사랑할 자격 운운하면서, 그가 겸손을 앞세워 오만을 부렸다는 말은 이미 했다. 그리고 그녀에 의해 그 오만이 폭로되는 순간 그가 움찔했다는 것도. 그러나 그는 곧 그 순간의 순간적인 당황을 이겨냈고,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을 자기에 대한 경멸로 규정함으로써, 경멸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술을 동원할 수 있었고, 겸손을 앞세운 오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짐작할 만한 상황이다. 그런 그가 왜 새삼스럽게 삼 년 전 그녀의 표정에서 연민을 찾아낸 것일까. 무슨 필요가 그런 현상을 만들어낸 것일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사랑을 자격의 문제로 둠으로써 오만을 유지하는 것이 왜 이제 불가능해졌을까. 자기가 얼마나 경멸받을 만한 사람인지 이해하는 대신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 이 전환은 왜 필요했고, 어떻게 가능했을까.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5
경멸과 연민 역시 그러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공유한 이 감정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옮겨 가는 것이 용이하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4
그의 자리에서는 그녀의 오른쪽 뺨이 조금 보였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있어서 귓바퀴가 드러나 보였다. 부드럽고 둥근 타원의 고리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는데, 귓바퀴 안쪽의 굴곡진 모양이 하트 모양을 연상시키는 게 이상해서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가끔 눈을 돌려 그 귓바퀴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낯익음이 눈길을 끌어당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귓바퀴에서 하트 모양을 떠올린 것이 처음이어서 좀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6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웃음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낯선 것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22
매혹은 불편한 경험이다. 매혹당하기 위해서는 전에 알던 사람을 모르는 사람으로 바꾸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끌리지 않고 사랑할 수 없다면, 그리고 모르는 상대에게만 끌리는 것이 맞는다면,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미 아는 상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25
‘모른다’는 ‘인식하지 못한다’로 바꿔 말할 수 있으므로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된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몰라서는 곤란하다. 무지가 사랑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연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25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 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앞으로 알아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잘 알던(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 숙주 안에 깃들어 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26
하트 모양을 한, 다육식물의 말랑한 잎과 같은 귀와 생글거리는 웃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거나 호수의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자주 그랬고 끊임없이 그랬다. 그처럼 막연하고 불확실한 것들,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것들이 그녀였고, 그러므로 그의 속에 가득 찬 것은 그녀였다. 어렴풋한 것이 어떤 것보다 또렷하고 실체 없는 것이 무엇보다 생생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28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이 꾸어지는 것을 겪을 뿐이다.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건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물론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떤 사람, 즉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30
그러니까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심하게 외로움을 느낀다면, 허전하고 안타깝다면, 그것이 증거이다.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사랑에 들렸다는 증거이다. 허락 없이 덮친 사람을 겪고 있다는 증거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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