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사체는 그녀에게 바친 진혼의 꽃다발.
솔직히 기뻤다. 다만 그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목표를 이룬 그를 침묵과 함께 축복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정상이 아닌 이 살인범을 제멋대로 굴게 두고 싶지 않다.
본성이 고개를 내민 듯 느껴졌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 자신의 솔직한 사랑 방식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뜻이 같은 동료와 사냥감. 전부 기요하루고, 어느 쪽이든 매력적이었다. 마음이 끌렸다.
억지로 답을 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볼까? 아니면 목숨을 건 사냥을 시작할까?
마음이 고요하게 흔들렸다.

-알라딘 eBook <머더스> (나가우라 교 지음, 문지원 옮김) 중에서 - P465

이 작품은 ‘법이 심판하지 못한 자들을 단죄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문장만 보면 선악 대결 구도로 이어지는 히어로물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법이 심판하지 못한 자’일뿐, 일방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그저 제각각 자아를 표출할 뿐입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집념과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인물들. 살인자에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 주인공인 점도 매력적이고 착한 인물 하나 등장하지 않는 점도 참신합니다.

-알라딘 eBook <머더스> (나가우라 교 지음, 문지원 옮김) 중에서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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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의 작품과 삶을 보면 존경하는 두 명의 예술가가 떠오른다. 한 사람은 마이어와 비슷하게 거리 사진을 찍은 헬렌 레빗이고, 또 한 사람은 청소부로 일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다가 사망한 후에야 작품이 알려지면서 아웃사이더 예술가로 불리게 된 헨리 다거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10

누군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그녀의 존재감을 느낀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12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찍은 사람들과 풍경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한다. 마이어는 탁월한 시선과 완벽한 기술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그녀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담았고, 평생 그 일에 몰두했다. 음악가의 수업을 빗대어 말하자면 이론상 우리도 마이어가 보았던 세상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13

사진은 세상을 바라보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필수 수단이 되었다. 1951년 미국으로 돌아온 마이어는 브라우니 카메라 대신 보다 정교한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진가로서 시선이 깊어지고 기술도 성숙해졌다. 코닥걸은 성장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22

롤라이플렉스는 정밀함과 신뢰성, 편리성 등으로
전문가와 아마추어 사진가 모두가 좋아하던 독일제 카메라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23

하지만 가장 생기 넘치고 독창적인 작품은 뉴욕의 거리 사진이다. 마이어는 뉴욕 거리에서 도시의 모습과 생활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 도시 특유의 문화를 찍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24

평생을 미혼의 보모로 살았지만 몹시 지적이었던 마이어는 늘 특권, 젠더, 인종, 정치, 죽음 등의 주제에 민감했다. 그녀가 찍은 행인들과 삶이 망가진 사람들, 5번가와 바우어리 거리, 모더니스트가 지은 예술적인 건물들과 빈민가 공동 주택, 그리고 공원, 배, 지하철이 드리운 그림자 사진에는 한 여성의 기민한 정서와 쉴 새 없이 관찰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25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이어는 1956년 시카고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보모, 관리인, 가정부 등으로 여러 집에서 일하며 1990년대까지 거주했다. 마이어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하일랜드 파크였다. 1956년부터 마이어는 그곳에서 낸시와 애브론 겐스버그의 아이들 존, 레인, 매튜를 돌봤다. 겐스버그 자녀들이 자라자 마이어는 윌멧 지역에 있는 월터와 마저리 레이몬드의 집에서 1967년부터 1973년까지 그들의 딸 잉거의 보모가 되었다. 1975년에는 유명 방송인 필 도나휴의 집에서도 잠시 일했다. 마이어는 이후에도 여러
집에서 보모로 일했다. 좀 더 나이가 든 후에는 장애인과 노인을 간병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0

항상 방심하지 않고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 그녀의 직업이었다면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고 사람과 공간을 관찰하는 일은 특별하고도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1

색상도 화려해졌고 노출도 많아졌지만 마이어는 늘 수수한 옷을 고수했다. 큰 키에 마른 체형이었던 마이어는 주로 헐렁한 남자 셔츠, 구식 블라우스, 단순한 디자인의 중간 길이 치마를 입었다. 소매는 걷어올렸고 스타킹은 돌돌 말아 내려 신었다. 끈을 묶는 튼튼한 신발을 자주 신다 보니 이웃집
꼬마들에게 군인 장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마이어가 보모로 일하던 당시 아이였던 사람들과 마이어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마이어의 옷차림을 수녀, 소비에트 연방의 공장 노동자, 여자 교도관, 레즈비언이라고 표현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2

시대에 뒤떨어진 옷차림을 고수하던 마이어는 장신구나 화장도 하지 않았는데 모자만은 여러 개를 번갈아가며 썼다. 모자를 쓰지 않을 때는 머리를 뒤로 넘겨 핀으로 고정시켰다. 늘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 다니거나 엔진이 달린 소형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운전면허는 없었다. 어쨌든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온 듯한 마이어의 차림새와 외모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3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옷차림과 행동은 그녀의 말과 표현에도 드러났다.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직설적이며 무뚝뚝한 성격 탓에 가까이하기 꺼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의 억양은 상당히 독특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3

1950년대 시카고 대학교의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리스먼은 자신의 저서 《고독한 군중》에서 미국인을 ‘타자 지향적’이라고 규정한다. 전쟁 후, 인간관계와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는 문화를 가진 교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내부 지향적’ 개인들은 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본능을 따르고 관습에 도전한다고 말했다. 마이어처럼 호기심이 많고 단호한, 예상 밖의 유형은 내부 지향적 인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5

마이어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곤 했다. 정기적으로 영화도 보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시카고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마이어가 그곳에 자주 갔음을 알 수 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6

마이어는 늘 남성들을 경계했고 남성들이 지나치게 가까이 오면 어김없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녀가 보살폈던 아이들은 마이어가 남성들의 공격적이고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반복적으로 주의를 주었다고 말한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7

사진을 찍는 작업은 고립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과 세상과의 유대감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의 복잡함과 내밀함이 불편했던 마이어에게 사진은 어쩌면 더욱 생산적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편안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9

마이어도 그랬다.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들과 사람들을 붙잡아두려는 노력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전에 존재했던 것’을 붙잡는 것이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40

마이어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작업했지만 25년 이상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는 롤라이플렉스였다. 전문가용 2안 반사식으로 6×6cm의 정사각형 사진을 만들어내는 이 카메라는 마이어의 시각을 형성하고 사진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대 롤라이플렉스는 ‘명성을 얻은 사진가들이 언제나 사용하는 카메라, 여러분을 최고의 사진가 반열에 올려줄 카메라’라는 광고와 함께 정밀한 광학, 직관적인 조작 등으로 전문가와 아마추어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인기를 얻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50

동시대에 나온 더 작은 크기의 35mm 카메라들과 달리 중형인 롤라이플렉스는 카메라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찍는 방식이 아니라 목에 걸거나 팔에 매달아 가슴과 허리 중간쯤 몸의 중심에 놓고 찍는다. 뷰파인더는 피사체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여 아래로 내려다보는 방식이다. 찍고자 하는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집중해야 한다. 1초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명상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50

롤라이플렉스에는 20세기 중반 사진가들을 매료시킨 또 다른 기능들이 있다. 35mm 네거티브 필름에 비해 필름 크기가 더 커서 더욱 세부적이고 정밀한 묘사가 가능했다. 마이어가 사용했던 12초 타이머 기능은 보다 계획적인 사진을 찍기에 용이했다. 게다가 뷰파인더를 내려다보고 찍기 때문에 피사체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거나 눈이 직접 마주쳐서 발생하는 마찰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51

하지만 롤라이플렉스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면은 정사각형 결과물이다. 주제와 구성을 활기차고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 정사각형 특유의 틀에 박힌 이미지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수평 방식의 35mm 필름은 역동적인 피사체나 이야기들을 보다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정사각형 모양은 막혀 있고 제한적이며 자칫 정적으로 보이기 쉽다. 우아하지만 네모반듯한 공간을 어떻게 잘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진가에게 구체적인 시각과 노련한 기술을 요구한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52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수행이다. 사진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색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이며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세상과 가장 깊이 공감하는 매력적인 행위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55

어린이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여성이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모습, 거리 위 풍경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이어의 사진은 여성에게 특히 마이어의 표현대로라면 ‘특정 연령대 여성’에게 초점을 둔 사진들이 꽤 있다. 마이어의 사진 속 여성들은 중년에서 노년의 여성들이었다. 마이어는 그 여성들 바로 뒤에서 혹은 비스듬하게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마이어는 욕구, 성격, 계급, 연령 등을 알려주는 단서로 몸매, 화장, 헤어스타일, 망사 달린 모자, 털, 여우꼬리, 값비싼
신발 혹은 너덜거리는 신발 등 시각적 지표들을 관찰하며 하나씩 점검해 나갔던 것 같다. 또한 자신과 그들 모두 가진 선택권과 그들에겐 없고 자신에게만 있는 선택권에 대해서도 생각했던 것 같다. 개중에는 경계의 눈초리로 불편해하거나 예기치 않은 감시에 불쾌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는 사진들도 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58

마이어가 초창기에 찍은 뉴욕의 거리 사진들은 나중에 찍은 시카고 풍경보다 더 밝고 낭만적이다. 1952년 A. J. 리블링은 <뉴요커>에서 시카고를 ‘가진 자들과 가지지 않은 자들’을 경제적으로 지리적으로 구분하는 도시라고 말했다. 마이어는 나무가 무성한 교외와 도시 사이의 경계를 주목했다. 그 차이는 도시의 기반 시설에까지 뻗어 있었다. 마이어가 찍은 시카고 거리는 21년간 시카고 시장이었던 리처드 달리의 공격적인 건축 경기 부양책으로 역동적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62

마이어의 사진, 필름, 테이프는 세상을 기록하는 행위가 그녀 삶의 중심임을 말해준다. 다양한 기록 저장 장치와 특히 사진을 통해 마이어는 자신을 인생의 관찰자 위치에 둘 수 있었다. 마이어의 사진에는 모순을 포용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는 동시에 가까워지고,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74

마이어에게 사진은 이미지의 즐거움에 관한 행위이자 개념화 작업이었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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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는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평생 독신이었던 마이어는 보모, 가정부, 간병인 등으로 일하며 남의 집을 전전하였다.
그녀는 큰 키에 마른 체형으로 늘 헐렁한 남자 셔츠, 구식 블라우스 등 단순한 옷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독특한 억양과 직설적이며 무뚝뚝한 성격 탓에 가까이하기를 꺼려했지만, 주변인들은 그녀가 가식 없고 지적인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마이어는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2009년 죽는 순간까지 아무에게도 자신의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말년의 그녀는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었다. 2007년 15만 장의 필름을 보관해둔 5개의 창고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경매에 부쳐졌고, 사진은 역사가 존 말루프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이어의 사진은 2년 후 말루프가 우연히 가치를 발견하기 전까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이 범상치 않다고 느낀 말루프는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고, 놀랍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언론 또한 천재적이나 불운했던 이 무명의 사진가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녀는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속도로 유명해졌다.
현재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뉴욕 타임스>, <보그>, <뉴요커> 등에 소개되었고, 미국 전역은 물론 스웨덴, 영국,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 등 전 세계에 걸쳐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녀의 미스터리한 삶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베를린 영화제,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국제 영화제의 수상작으로 뽑혔고, 2015년에는 오스카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중 가장 깊이있는 작품 235점을 선별해 한 권에 담은 사진집이다. - <비비안마이어 나는카메라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7564480 -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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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라는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기다림은 항상 시간 낭비의 극치이고 완전히 무의미하며 자존심 구기는 짓이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이므로. 근데 그녀는 지금 캠핑 의자에 앉아 세상과 하나 된 느낌이 드는 게, 마치 새로운 운명을 발견한 것만 같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여도 좋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것도 좋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24

좋은 냄새가 난다. 연기와 자유 냄새 같다. 도라는 불가에 마지막으로 앉아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꽃을 바라보는 동안 사람들 모두 질문 하나 하지 않는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바다에서 파도를 바라볼 때와 똑같이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25

식사를 마치고 프란치가 다시 조각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도라와 고테는 불가에 그대로 앉아 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고테의 존재를, 그리고 프란치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차분하게 느낀다. 한데 벼랑 끝에 섰을 때의 현기증 같은 느낌이 아니라 결정체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얼어붙은 풍경처럼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26

그가 나쁜 사람으로 비쳐지는 게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혹은 정말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도라는 깊이 생각해본다. 가치관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현실이 공존할 수 있을까?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31

다행히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그녀가 소지품을 주워 담는 걸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다.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는 전형적인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스토아주의적 태도로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40

문득 도라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게 뭔지 깨닫는다. 거기에 존재하는 사랑은 한없이 깊고 무한해서 이성적인 이해력을 뛰어넘는다. 그 사랑의 이면에는 서로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 불안감 역시 무한하고 한없이 깊어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41

그러나 진화를 통해 의식과 시간감각을 가지고 만물의 무상함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생명체는 이러한 무한한 감정이 없다. 역겹다. 인간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42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며 세상에 새겨져 있고 준비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돌릴 바퀴도, 잡아당길 레버도 없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생각에 도라는 긴장이 살짝 풀리는 걸 느낀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59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고, 또 누가 무엇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치를 반대하든 지지하든, 그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마법 같은 단어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고, 그럼에도 살아 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기 옆집에 한 인간이 쓰러져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73

"내 생각엔 자연 속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아. 우리 모두 여기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우린 그저 모습을 바꿀 뿐이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89

고테의 정원 위에 눈부시게 밝은 빛이 머물고 있다. 나무 꼭대기를 비추고 밤의 어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빛이. 마법에 이끌리듯 담장으로 가서 의자 위에 올라간다. 트레일러 발판 위에 커다란 전조등 하나가 놓여 있다. 작업 공간 전체를 환하게 비출 만큼 밝다. 고테는 암컷 늑대의 등 아랫부분, 뒷다리, 꼬리를 조각하느라 여념이 없다. 팔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상반신이 흔들린다. 늑대를 조각하는 데 완전 빠져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다. 늑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웃으려고 주둥이를 벌린 채 상냥하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듯한 표정으로 도라를 쳐다보고 있다. 고테가 발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07

귀를 쫑긋 세우고 즐거운 얼굴 표정의 암컷 늑대는 수컷에 비해 몸집은 좀 작지만 날씬하고 아름답다. 그제야 도라는 조각상 받침대의 불룩한 부분이 뭔지 알아차린다. 새끼 늑대 한 마리가 암컷 늑대 발치에 웅크리고 있다는 걸.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새끼 늑대는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엄마 늑대를 쳐다보고 있다. 거기 그렇게 엄마 늑대, 아빠 늑대, 새끼 늑대가 함께 모여 있다. 그 셋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19

어머니의 시신을 운구할 때 아무도 울지 않았다. 가족 모두 각자 자기 방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끔찍한 정적이 집 안에 감돌았다. 마치 어머니가 사랑, 안정감,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걸 가져간 거처럼 말이다. 지난날의 잔상들과 밤 이외에 남은 거라곤 없었다. 정원의 새들조차 침묵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23

도라와 로베르트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말도 잘 통하고 아름다운 공동주택도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했다. 그들은 알맹이가 빠진 커다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그 껍데기마저 사라져버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39

결혼 상대로 형편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테는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느 순간 도라는 그와 원래 있던 자리에 남는 게 의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유가 가능하다. 고테의 존재가 도라에게 전달됐고, 그는 자신의 존재를 그녀와 공유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들 사이를 가르는 담장으로 연결되어 공존했던 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40

비가 차츰 잦아든다. 축축이 젖은 얇은 막처럼 안개 같은 게 얼굴과 손에 끼어 있다. 거리에 넘쳐흐르던 빗물도 말라간다. 나무에선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맨 먼저 둥지 밖으로 나온 새들이 다시 노래를 부른다. 어디선가 황새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탁탁 타르르 탁탁. 톰과 슈테펜 집 앞 커다란 물웅덩이 가장자리에 포르투갈 사람 둘이 서서 잡담을 하며 담배를 피우다 도라가 지나가자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고테의 집은 말이 없다.
앞으로 누군가 이 집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금요일마다 창문을 들여다봐야겠군. 환기도 시키고 난방도 켜고 수도꼭지도 열었다 잠그고.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잔손도 많이 들어갈지 모른다. 도라는 집 열쇠를 갖고 있다. 문득 도라가 시선을 옮겨 담장 위를 보니 주황색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 쳐다보고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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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펜 A. 샤버는 1979년 니더라인에서 태어난 인물로, 코미디언이며 카바레 예술가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몇 줄 안 되는 내용은 그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도라는 두 번째 링크를 클릭하여 눈앞에서 실제로 보기도 했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바에서 볼 법한 높은 의자, 자욱한 연기, 남자 메릴린 먼로. 그 사진은 행사를 광고하는 홍보용으로, ‘무한 재미’라는 상호명의 클럽 홈페이지에 실린 것이다. 슈테펜 샤버, 새 프로그램 〈인간에 대하여〉, 2020년 4월 28일 저녁 9시 초연.
오늘이 4월 28일이고 지금 시각이 저녁 9시다. 도라는 스마트폰을 도로 집어넣고 다시 창문을 들여다본다. 웹사이트 화면에 아직도 붉은색으로 비스듬히 찍힌 안내 문구가 남아 있다.
"코로나로 취소."
노래를 끝낸 슈테펜이 홈 바용 의자에 앉아 허공에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가끔 숨을 들이마신다. 그 모습이 마치 뭔가 얘기하려다 지금 이 시기에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차라리 혼자 간직하는 게 더 낫다고 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보이는 그가 고개를 들고 꺼져 있는 평면 텔레비전 속에 청중이 앉아 있는 듯 똑바로 쳐다본다. 아니면 검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2

"모든 걸 다 이해하는 멍청한 놈들은 정리됐어. 생존에 아주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었어. 초인은 하층민이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엉뚱한 이야기가 없으면 좋을 텐데! 웃어봐! 인간말짜인 당신들은 오락용 사격장에 서 있는, 곧 제거될 표적 인형이지. 결국 새로운 시대에 배제되는 존재란 말이지. 역사의 쓰레기차가 수거해 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든 캔 맥주를 마셔봐."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4

"알고 있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야. 70~80년 전이지. 당시 당신들은 ‘초인’이고 ‘군주적 인간’이었지. 금발의 백마가 세계를 제패하러 나섰지. 철학자들은 당신들을 묘사하고 작곡가들은 당신들을 찬양하고 낯선 나라들은 당신들이 무서워 벌벌 떨고 국민들은 당신들을 졸졸 쫓아다녔지. 근데 지금은?" 슈테펜이 눈을 크게 뜬다. "지금 당신들은 캠핑 탁자에 앉아 있어. 당신들 뒤엔 트레일러가 서 있고 앞엔 따뜻한 맥주가 놓여 있지. 당신들은 폴란드산 담배를 피우고 제국 국기에 경례를 하고 당신들 신분증을 손수 만들지. 속옷 차림의 초인들." 그때 뜬금없이 슈테펜이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당신들은 독일을 구하지 못해. 당신들이 구하는 건 편물 산업이지." 그는 점점 더 심하게 발작적으로 웃으며 말을 잇지 못한다. "당신들은 인간말짜야. 그런 생각 든 적 없어? 당신들이 항상 소탕하려는 인간말짜가 바로 당신들이야. 당신들을 좋아하는 사람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어. 당신들은 낮엔 잠만 자고 밤엔 술독에 빠져 지내지. 당신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쓰레기 같은 온갖 헛소리를 믿고 디데이를 위해 감자를 심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3

도라의 책상이 없어지게 될 사무실 개조에 대한 공지는 해고 통보 직후에도 느끼지 못한 불안감에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빠져나온 도라는 통장거래내역을 클릭한다. 실업급여 신청을 하러 관청에도 가지도 않고 주자네와 면담도 나누지 않아서 생필품 외에는 쇼핑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경우 얼마 동안 쓸 돈이 남아 있는지 계산해본다. 집 담보대출금 상환 유예를 신청할 수 있는지, 어떤 조건을 갖춰야 단기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돈이 바닥날 경우를 대비해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올릴 수 있는지, 언제 햇감자를 수확할 수 있는지도 찾아보았다.
검색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도라는 원하는 대로 그 결과를 왜곡하고 바꿀 수 있다. 그녀는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이곳 브라켄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다시 돈을 벌어야 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0

도시고속전철역 승강장엔 사람들이 보란 듯 간격을 두고 서 있거나 혹은 반대로 대놓고 무리지어 있다. 어느 쪽에 서느냐는 말 그대로 정치적 입장 표명이 돼버린다. 그래도 열차는 기분 좋게 비어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1

이제 더는 집 밖을 돌아다닐 수 없는 외출 금지로 생각이 정지되고 감정이 마비돼버린 사람들. 그들이 삶의 의미와 자살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동안에 도라는 브라켄 마을에 자리한 숲을 산책하고 하루 종일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담장 너머에 사는 나치 때문에 불안에 떤다. 코로나로 인해 특권이 재분배된 거다. 베를린으로 잠시 여행만 와도 이런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2

도라는 조금 차분해진 거 같다. 그래도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뭘 하지말아야 할지는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게 인간이 인생에서 알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4

하지만 지금은 빠른 속도로 달리며 느끼는 쾌감을 즐긴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 지평선에 닿아 있는 검은 숲,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감도는 긴장된 공기. 자전거를 타고 가며 맞는 바람에서 여전히 한낮 뜨거웠던 봄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5

사실 도라는 모든 게 아주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눈앞에 놓여 있다. 브라켄 마을 풍경 속에, 적막감 속에, 어둠 속에 숨어서 꼼짝 않고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테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5

지금은 깊이 생각할 때가 아니라 생각을 멈춰야 할 때다. 이 마을 모든 것과 평화롭게 공존할 때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6

들판 위에 뜬 하얀 둥근 달이 자동차, 도로, 나무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도라는 자전거 핸들을 잡은 채 달빛 속으로 솟구쳐 있는 픽업트럭 옆에 서 있다. 사실 멋진 그림이다. 공허한 풍경과 픽업트럭이 미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한발 물러나서 그림 밖으로 나가 이 장면을 조용히 감상하며 그림이 얼마나 훌륭하게 연출되었는지, 또 이 그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들이 차갑게 얼어붙은 순간에 집중된다는 점을 얼마나 많이 들려주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거다. 그러고 나면 몇몇 사람들이 야간 주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또 다른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 그림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다. 그녀는 달빛, 백팩, 자전거 앞 바구니에 묶어둔 털 바구니를 담은 그림의 일부니까. 그러면 그림 앞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서서 도라를 바라보며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8

그때 도라의 눈에 뭔가 다른 게 띈다. 등 부분이 움찔거리더니 어깨가 위로 올라가고 가슴이 잔잔한 호흡으로 인해 살짝 부풀어 오른다. 도라는 차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어깨뼈 사이에 갖다 댄다. 따뜻하니 살아 있다. 너무 안도한 나머지 울음이 터질 거 같다. 의도적 살인, 심각한 상해.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여기 한 남자가 쓰러져 있고 그가 숨을 쉬고 있는 게 기쁠 따름이다. 도라는 남자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다가 뺨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9

눈이 감겨 있다. 그는 엄마를 찾는 갓난아기처럼 보인다. 도라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건조하고 서늘하다. 그가 이렇게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도라는 다른 사람을 이렇게 가깝게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지인들 간에 시도 때도 없이 안고 키스하는 걸 좋아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젠 그런 성격을 바꾸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0

고테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담뱃갑을 꺼내 담배 두 개에 불을 붙여 도라에게 하나를 내민다. 이제껏 담배가 이리 맛있던 적도, 달빛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지금보다 더 멋져 보인 적도 거의 없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2

그사이 담배와 남자의 땀 냄새가 뒤섞인 그의 체취가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는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그 순간 줄곧 이상하다고 느낀 게 뭔지 분명해진다. 그녀가 꿈꾸는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 디테일한 부분 하나. 그녀는 이제 그게 뭔지 깨닫는다. 늘 그렇듯이 고테에게서 심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알코올 냄새는 단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4

거실에 걸려 있는 복제한 명화 그림들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창가의 여인’ ‘발코니의 남자’.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7

"그러려고. 편히 앉아 책 좀 더 읽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인데 멋지구나. 이 사람은 스쿼시 게임을 베르됭 전투처럼 아주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가구나."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7

그는 역사박물관의 시민정신과 휴머니즘 부서에 사는 사람 같다. 어떤 일을 5분 이상 지속하는 능력이 없는 도라 세대에겐 살아 있는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다. 도라는 그런 그가 부럽긴 해도 그의 존재와 맞바꾸고 싶진 않다. 언젠가 그녀는 왜 그러고 싶지 않은지 그 이유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7

도라는 가끔 자신과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뭔지 더는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녀는 왜 이따금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걸까. 그들은 늘 한 팀이었고 늘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함께하는 일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버지와 딸 간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8

편안하게 담배를 함께 피울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사람은 나치와 의사인 것 같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8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흔히 책에 나오는 "갑자기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나버렸다"라는 구절 같은 순간이다. 도라의 눈앞에 아버지가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의 영화가 펼쳐진다. 현관 복도에 있는 옷장 문을 열고 미리 싸놓은, 황동 지퍼가 달린 코냑색의 가죽 가방을 꺼낸다. 그러고는 평상시 가볍게 입고 다니는 양복 상의를 집어 들고 문을 나선다.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텅 빈 자비니 광장을 지나간다. 남자는 개를 데리고 있지 않아도 외출 금지가 적용되지 않는다. 미션을 부여받은 남자는 자동차를 세워둘 장소를 빌려둔 멋진 건물의 주차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잠시 후 그는 냉방이 잘된 재규어를 타고 사운드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음악을 들으며 도시를 내달린다. 그 와중에 창밖으로 도시 풍경이 소리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윽고 아우토반으로 진입한 그가 속도를 높인다. 그와 함께 도라도 누군가가 등에 커다란 손을 대고 앞쪽으로 세게 미는 것 같은 가속이 느껴지는 듯하다. 차 안에 흐르는 바이올린 콘서트 음악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아람 하차투리안*의 음반으로, 도라의 취향에는 다소 자극적이다. 한데 갑자기 고조되는 긴장감 넘치는 점에서 보면 드라이브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 아르메니아의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1

아버지에게 ‘도시’는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생활 형태이고 ‘지방’은 코마나 죽음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확인하려고 여기 와 있는 건 아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3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발아래 땅바닥을, 파릇파릇한 잔디를, 그 잔디 밑 흙을, 상상 불가한 범위의 암반층을, 엄청 큰 지구를 온몸으로 느낀다. 서커스 곰이 공을 돌리는 것처럼 그녀는 걸으면서 지구를 돌리는 느낌이다. 응축된 기다림의 시간, 결국 그 시간이 점점 사라져간다. 도라가 쓸쓸한 Sus-Y사 사무실에 남아 있는 자신의 옛 삶의 잔재를 제거한 게 언제 적 일인가? 그녀는 먼 과거의 에피소드 같은, 한때 신나 보였지만 그사이 의미가 퇴색돼버린 일을 떠올린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가 아닌 현재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8

고테가 움직인다. 도라 앞을 지나가면서 표정 없는 얼굴로 쳐다본다. 개가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그는 요요가 부르는 소리에 순순히 따른다. 의사 세계엔 과장급 의사가 있다. 고테 같은 사람조차 그런 의사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0

고테가 떠났다. 슈테펜이 예측한 대로 누군가가 그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역사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수거차는 아니지만. 어쩌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경험상 도라는 누군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데려가는 건 의사 세계에선 보통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0

사실 도라 역시 그 어떤 정보도 듣고 싶지 않다. 어쨌든, 사실 이 모든 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아버지를 이 일에 끌어들이다니, 정신이 나갔던 건가? 고테는 그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알고 싶지 않다. 그녀는 대화를 끝내고 다시 침대에 들어가 이 일을 잊어버리고 싶다. 미안, 실수였어. 운이 나빴어. 계속해.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6

교아종은 거지같은 용어 중 상급에 해당되는 용어다. 알파벳 모양을 한 어둠의 최고사령관이다. 의학 용어의 다스 베이더로, 항상 ‘수술 불가능’ ‘난치’ ‘진통제’라는 이름의 부관들을 대동하고 다닌다. 도라는 곧장 지름길을 택하기로 마음먹는다. 다스 베이더를 방해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므로.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8

도라의 가슴속에서 심연이 열리는데, 너무 깊어 작은 기포조차 올라오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안에 매몰되어 사라져버릴 수 있을까? 그 후에 무엇이 남을까? 시커먼 구멍?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8

프란치가 새 발톱처럼 생긴 농기구로 땅을 파서 감자꽃 주위의 흙을 잘게 부순 다음 감자 줄기를 움켜쥐고 쭉 잡아당긴다. 그러자 흙 속에서 감자가 주렁주렁 달린 뿌리가 나오는데, 정말이지 외계인 군단처럼 보인다. 아니면 새하얀 핏줄이 엉켜 있는 흙투성이 알둥지 같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14

통통한 파리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앵앵거리며 날아와 주방 창문에 부딪힌다. 식탁에 앉아 생각에 잠긴 도라는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확고해진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파리는 계속 앵앵거리며 유리창에 부딪히고, 몸속에선 작은 기포가 소용돌이치며 스멀스멀 올라오고. 차라리 그녀는 고테와 몸을 바꾸고 싶다. 그럼 그는 그녀가 끝장나길 기다리며 그녀를 위해 장 보러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16

앎과 무지는 서로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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