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서, 사회에서 볼 때 백만 명인 거야. 서부 전선도 독일 병사의 시각에서 보니까 ‘서부 전선’인 거잖나. 그게 인식론의 문제야.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이 거기서 나오지.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64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일례로 우리는 내가 아플 때 남이 그걸 아는 줄 알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은 자기 아픔을 거기다 투영한 것뿐이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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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의 d자가 disease잖나. 이미 병이 된 거야. 때 되면 앓는 인플루엔자처럼, 그냥 함께 살아가는 거라네. 백신도 인간이 개발한 화학 치료제가 아니야. 인체에서 생긴 면역체를 가지고 만드는 거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54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결국 그런 얘기잖아. 우리가 사랑하고 일하는 것도 다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일관된 프로그래밍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자, 맹자, 노자도 다 국가와 인류 존속을 위한 프로그램 선전원들이지(웃음). 나라에 충성을 바쳐라, 부모에게 효도하라. 허허. 코로나 바이러스도 결국 인구 조절이라잖나. 고령화로 늘어난 노인 인구 조절이라고. 그런데 거기서 또 놀라운 신비가 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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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하이엠.(✽ L’chaïm.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삶을 위하여(to life)’이다. 삶이란 항상 행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삶 그 자체가 거룩하고 축복의 대상이기에 유대인들은 건배할 때 무언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축복한다고 한다.) 삶을 위하여.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80

햇빛 속에서 숨 쉬듯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베개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내 손가락에서 경련이 일어난다.

아주 쉬울 텐데.

보드라운 면, 폭신한 깃털. 구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주 쉬울 텐데.

병실이 어두워진다. 햇살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구별되지 않는다. 베개도 아버지의 눈도.

내 어깨가 늘어진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쉰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92

아버지가 나한테 끝내게 도와달라고 했어.

해 질 무렵 유칼립투스와 카레 향이 나는 길에서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일까? 처음으로 문장에서 멜로디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버지가나한테끝내게도와달라고했어.

안은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나는 바싹 쫓아간다. 어찌나 다가갔는지 그녀의 오른쪽 어깨뼈 밑, 파란색 스웨터 실 사이에 갇혀 버둥거리는 조그만 벌레가 보일 정도이다. 안이 갑자기 멈춰 선다. 나는 그녀를 안을 뻔했다.

연한 장밋빛 햇살을 받아 그녀의 얼굴이 훨씬 부드러워 보인다. 아주 가까운 데에서 물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잘한 거야. 나한테 말한 거."

안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는 단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도와줄게."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98

차가운 청진기가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일반개업 의사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지었다. 의사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았다.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의사는 체온을 내리기 위해 이부프로펜을 처방했다. 의사는 휴식, 또 휴식, 무조건 휴식을 취하라고 당부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104

"아시겠지만 프랑스에서는 뱅상 욍베르(✽ 뱅상은 2000년 자가용으로 귀가하던 중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 9개월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시각, 미각, 후각을 모두 잃고 말도 할 수 없는 채로 머리와 오른손만 겨우 움직이는 전신마비 상태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결국 사고일 3년째 되는 날, 어머니와 의사의 협조로 안락사를 선택했다. 뱅상은 자신이 의료집착행위의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소생술로 인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안락사 이외의 다른 선택은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의료집착행위만 없어지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는 상당수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목적 없이 생명만 연장하기보다는 치료 중단을 통해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시켜야 하며, 이러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고 적극적으로 권장할 사안이라는 것이다.)와 샹탈 세비르(✽✽ 전직 교사였던 샹탈은 8년 동안 코 주위가 부풀어 오르면서 얼굴이 비틀어지는 악성종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온갖 약물을 복용하며 치료를 계속했지만, 고통은 가라앉지 않고 증세는 더욱 악화되면서 의료진조차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손을 놓고 말았다. 결국 샹탈은 더 이상의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며 법원에 안락사를 허락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샹탈은 법원의 기각 판결이 내려지고 이틀 뒤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으며 정확한 사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이후로 많이 까다로워졌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에 대해 말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106

엘리안은 레오네티 법과 수정안(✽✽✽ ‘죽고 싶다, 죽여달라’라는 뱅상의 처절한 외침이 프랑스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켜 2005년 레오네티 법안을 탄생시켰다. 이 법이 치료를 중단하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를 불러왔다. 그러나 죽음을 곧바로 야기하고자 독극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허용되지 않는다.)을 설명하면서 그 뒤로 의사들과 환자들은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덧붙였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107

「소일렌트 그린(✽ 「Soylent Green」, 1973년에 제작된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영화. 지구 환경 파괴로 식량 생산이 중단된 미래가 배경이다. 유일한 식량인 ‘소일렌트 그린’이라는 물질을 생산하는 회사와 그 회사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기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소일렌트 그린의 주원료가 ‘사람’이라는 반전이 있다.)」. 오래전에 본 영화, 그동안 한 번도 이 영화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문득 몇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지어낸 것들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선명하다. 끔찍한 미래, 환경 파괴로 천연자원이 고갈된 세상, 생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하얀 클리닉으로 들어가는 에드워드 G. 로빈슨. 그가 창구 앞에 줄을 서 있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듣고 싶은 음악을 고르고, 아이 침대처럼 좁은 침대에 길게 누워 흰 가운 차림의 남자와 여자가 내미는 물약을 마시고, 전원교향곡을 들으며 마침내 평온하게 잠든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129

아버지가 마른기침을 한다.

아버지의 눈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아버지는 준비가 되었다.

사랑하는 내 딸들, 사랑하는 내 손주들…….

아버지는 유연한 몸짓으로 왼팔을 든다.

……오늘 내가 내리는 결정을 너희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마치 선거 유세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인생을 만끽하면서 살았다. 요컨대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특권을 누렸다…….

나는 웃지 않으려고 뺨 안쪽의 살을 깨문다.

……그리고 내 인생이 종말에 이른 지금 나는 너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 그리고 너희들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바란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아버지가 머뭇거린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녹음이 되고 있어서 나는 어떤 식으로도 아버지의 말을 유도하거나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이상이다.

아버지는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작은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나 어땠니?"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189

「풀 메탈 자켓」(✽ 「 Full Metal Jacket」, 1987년에 제작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전쟁 영화. 베트남전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담았다.)에 등장하는 교관이 흥얼거리는, 누구나 다 아는 노랫가락에 따라 젊은 신병들이 합창한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202

Pourquoi donc a-t-il fallu que j’cède(나는 왜 들어줘야 했을까)

Pourquoi donc a-t-il fallu que j’cède(나는 왜 들어줘야 했을까)

내 손목에서 장바구니가 앞뒤로 흔들린다.

Quand mon père a demandé que j’l’aide(아버지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

Quand mon père a demandé que j’l’aide(아버지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

나는 이제 멈출 수가 없다. 채소 가게, 생선 가게, 빵 가게.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드디어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간다. 세르주가 있다.

세워총, 쉬어.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203

"「잊혀진 사람들」(✽ 「Los Olvidados」, 1950년 제작된 에스파냐의 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1900~1983)의 영화. 도시 빈민가에 사는 아이들의 원초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220

"I’m singin’ in the rain!(나는 지금 빗속에서 노래를 불러!)(✽✽✽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변하는 할리우드 영화계의 혼란을 경쾌하게 풍자한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의 테마곡 가사.) 빵! 빵!"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220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 잔인한 폭력 묘사와 강간 장면으로 오랫동안 영국에서 상영 금지를 당한 영화이다. 영화 속 주인공 알렉스는 범죄를 저지르면서 진 켈리의 「Singin’ In The Rain」을 부른다.)에 등장하는 알렉스 역의 말콤 맥도웰이 남자를 꼼짝 못하게 하고는 진 켈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남자의 아내를 강간하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아버지는 웃음이 터졌다.

아버지가 빈 접시를 가리킨다.

"튀김을 더 먹고 싶은데."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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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내를 보고 싶어 했다. 우리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이따 우리가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올게요.

네 어머니가 어지간하면.

아버지는 용케 미소를 짓는다. 거의 웃는 얼굴이 될 정도로.

어머니는 파킨슨병에 이어 수년 전부터 심한 우울증까지 앓고 있다.

우리가 산책을 나가자, 밖에서 점심을 먹자, 어디 구경하러 가자, 하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어지간하면.

어머니가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웃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28

아버지가 산소를 공급받고 있다.

아버지는 잠들어 있다.

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혈색이 없다.

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뜬다. 초점이 없는 두 눈.

나를 알아봤는지 확신이 없다.

아버지가 콧구멍에 연결된 가는 호스들을 빼려고 머리를 흔든다.

나는 호스들을 다시 끼워 넣는다.

아버지가 호스들을 뽑아버리려고 왼손을 든다.

내가 아버지의 팔을 잡는다. 아버지는 저항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힘이 없다.

아버지의 살이 차갑다. 이스키아에서 태운 구릿빛 피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43

나는 냉장고를 연다.

내 눈높이인 칸에 아버지가 먹다 남긴 샌드위치가 있다.

계속 냉장고에 놔둘 수 없다. 고약한 냄새를 풍길 것이고, 곰팡이가 슬 것이다. 상한 연어에서 지독한 냄새가 날 것이다.

이제는 버려야 한다.

휴지통의 페달을 밟는다. 뚜껑이 올라온다.

나는 얇은 비닐을 통해 아버지가 깨물어 먹은 자국을 본다. 갈색 빵에 반달 자국이 뚜렷이 나 있다.

팔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쓰레기가 들어 있는 휴지통.

버릴 수가 없다.

내 발이 페달을 떠나고 뚜껑이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탕, 둔탁한 소리가 텅 빈 아파트 안에 울린다.

나는 샌드위치를 손에 든 채로 한동안 꼼짝하지 못한다.

냉동실에 넣어둘까? 이 상태는 유지될 것이다.

샌드위치를 납작하게 눌러서 바닐라 아이스크림 통 위에 올려놓는다.

이제 됐다.



새벽 3시, 고요한 밤.

전자레인지와 오븐에 있는 시간 표시등의 희미한 오렌지 불빛이 주방을 밝혀준다.

냉동실을 열고, 샌드위치를 꺼낸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덩어리를 휴지통에 넣는다.

나는 휴지통 뚜껑에서 손을 뗀다. 뚜껑이 소리 없이 천천히 닫힌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46

우리는 아버지의 산소마스크를 벗겼다.

나는 아버지 뺨에 입을 맞춘다. 따갑다.

아버지는 대개 얼굴이 매끄러웠지만 휴가 중에는 이따금 면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때면 무성한 금빛 털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았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49

7월 14일. 매해 아버지의 생일과 함께 여름 바캉스가 시작되었다. 파스칼은 늘 그 날짜에 생일 선물을 했다. 오래전 동생은 하얀 도자기 밀크 포트를 선물했고, 나는 발자크의 라 플레이아드(✽✽ 1931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펴내기 시작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전 컬렉션으로 ,전 세계 유명 작가의 소설・철학서를 다루고 있다. 라 플레이아드 총서는 선정 기준부터 편집, 제작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신뢰를 받는 컬렉션으로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모든 프랑스 문인의 꿈이다. 특히 생전에 이 꿈을 이루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판 『인간희극』 총서를 선물했다. 그 열두 권은 사라졌지만, 밀크 포트는 부모님의 냉장고 안쪽 칸에 아직 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54

탁. 밤송이가 벌어지면서 튀어나온 밤 한 개가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밤을 주웠다. 매끈거리고 반들거린다. 발톱 모양의 하얀 반점이 있다.

나는 밤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엘뵈프에서 살던 집의 정원에는 나무가 많았다. 밤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소꿉동무 마리옹과 나는 초록색 밤송이가 잔뜩 달린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서 손가락을 찔려가며 밤송이를 까고 생으로 먹었다. 떫은맛이 나는 생밤을 으드득으드득 씹어 먹다 목구멍에 걸려서 우리는 서로 등을 쳐주었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56

아버지가 왼손으로 내 팔을 잡았는데 힘을 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나는 얼어붙었다. 아버지는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좀 더 크게 반복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59

나는 밖으로 나간다. 해, 공기, 햇빛. 내 뺨에 축축한 것이 묻어 있는 걸 느낀다. 입맞춤할 때의 자국처럼 약간 묻은 아버지의 침. - <다 잘된 거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2570460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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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 형태는 들락날락이 비정형이고 랜덤해. 일종의 카오스지. 소용돌이야. 사람의 인체는 모든 게 정돈되어 있는데, 귀와 배꼽만 정돈이 안 돼 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54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56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조지만 학술 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59

인터뷰는 그래선 안 되네. 인터뷰는 대담對談이 아니라 상담相談이야.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지. 정확한 맥을 잡아 우물이 샘솟게 하는 거지. 그게 나 혼자 할 수 없는 inter의 신비라네. 자네가 나의 마지막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왔으니, 이어령과 김지수의 틈새에서 자네의 눈으로 보며 독창적으로 쓰게나.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60

"그렇지. 그게 수학의 신비고 유언의 신비라네. 그냥 가르쳐주면 안 풀어. 못 풀어. 나눌 수 없는 열일곱 마리를 준 후, 나머지 한 마리의 퍼즐은 남은 자들이 더해서 풀게 한 거지. 쉽게는 못 풀어. 생각을 해야 풀 수 있다네. 스승은 수학이란 무엇인가를 유언을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했어. 수학은 체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개념의 세계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1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5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6

"존재의 정상이잖아.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야.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 분수는 하늘로 올라가 꿈틀거리다,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짓점. 그 절정이 정오였어. 정오가 그런 거야. 시인 이상의 『날개』에도 정오의 사이렌이 울려. 그 순간 주인공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꾸나’라고 속삭이지.

정오가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긴다네.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지. 나는 알았던 거야.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77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암이라는 질병 그 자체보다 암에 대한 인간들의 의식이 문제라고 썼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81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 거지.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82

병원에 들락날락하는 시간에, 글 한 자라도 더 쓰고 죽자. 그것이 평생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고 외쳐왔던 내 삶의 최후진술 아니겠는가. 종교인들이 죽음 앞에서 의연하듯 말일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85

"자네는 나에게 ‘진리’를 원하고 ‘정수’를 원하지. 그러나 역사는 많이 알려진 것만 기억한다네. 진실보다 거짓이 생존할 때가 많아. 진실은 묻히고 덮이기 쉬워. 하이데거가 그랬지. 일상적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고.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눈물은 아닐 테고요."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94

먹는 것에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구약과 신약의 하이라이트야. 우리 삶도 그래. 사는 게 먹는 거지. ‘함께 먹는 공동체’는 끈끈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00

"차이는 있어.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의 신호가 있다네. 파이브 어 클락 섀도five o’clock shadow라고 들어봤나? 샐러리맨들이 오후 다섯시가 되면, 깨끗했던 턱 밑이 파래져. 퇴근 무렵, 면도 자국에서 수염이 자라 그림자가 생기네. 그게 오후 다섯시의 그림자야. 매일 쳇바퀴 돌듯 회사에 나와 하루를 보내다, 문득 정신 차리면 오후 다섯시. 수염 자국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지면 우수가 차오른다네. 오늘 뭘 했지? 내일도 또 이렇겠지. 다시 전철을 타고, 술집에 가고, 이윽고 집에 돌아가 아내를 만나고…… 그게 샐러리맨의 고독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02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야.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였어. 그가 지혜를 따라간 건 운명을 믿었기 때문이라네. 신탁이 아테네에서 가장 똑똑한 자가 소크라테스라고 하니, 궁금해서 길을 나섰지. 그가 살펴보니 아테네 사람들이 다 똑똑한 척을 하는 거야. 자기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물어보면 다 안다고 하거든. 그때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지.

‘아!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게 이 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이야기구나.’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고 봤네.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아는 자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한 사람이었던 거야.

‘너 자신을 알라.’

이것도 신탁에 나오는 말이야. 신의 예언을 대언하는 무녀들의 말이지. 지금 자네는 내게 굉장히 중요한 걸 물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11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12

이게 곧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이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18

인지 범위 바깥의 것, 가령 적외선이나 미립자는 볼 수도 없어. 존재해도 감각적으로 파악을 못 하는 거지. 그게 존재론이야. 있는 줄 알아도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20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24

물질 그 자체가 언어가 아니라 차이의 의미가 언어란 말일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37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네.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세계야. 이걸 이해해야 우리는 혼돈 없이 세계를 보고 분쟁 없이 대화할 수 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38

"생명체 전체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는 거지. 그럴수록 경계를 알아야 해.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가 인간중심주의로 말하고 있는지, 탈인간중심주의로 말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가늠해야 한다네. 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아까 말한 자연계(피지스), 법계(노모스), 기호계(세미오시스)처럼 범주를 구분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기호 안에서도 정확한 개념을 토대로 사고해야 하고.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자연계, 법계에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여도 기호계까지는 못 넘어와. 기호계야말로 놀라운 세계라네. 기호계에서 문학이 나오고 예술이 나오고 본격적인 철학이 나오거든."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43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46

"생각이 날개를 달아주거든. 그래비티, 중력에 반대되는 힘, 경력이 생기지. 가벼워지는 힘이야. 그런 세계에서는 사실 ‘사회성’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46

"그렇지. 살아 있는 것은 물결을 타고 흘러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네. 관찰해보면 알아. 하늘을 나는 새를 보게나. 바람 방향으로 가는지 역풍을 타고 가는지. 죽은 물고기는 배 내밀고 떠밀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작은 송사리도 위로 올라간다네. 잉어가 용문 협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게 등용문이야. 폭포수로 올라가지 않아도 모든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원하는 데로 가지. 떠내려간다면 사는 게 아니야.

우리가 이 문명사회에서 그냥 떠밀려갈 것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역류하면서 가고자 하는 물줄기를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네. 다만, 잊지 말게나. 우리가 죽은 물고기가 아니란 걸 말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51

"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삶과 죽음을 설명했네. 소크라테스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육체와 마음과 영혼, 삼원론으로 삶과 죽음을 설명할 참이야."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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