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게 내리는 4월의 비가 3월의 가물었던 땅 속으로 깊이 파들어갔다. 그 비는 꽃을 피우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대지의 모든 나뭇가지를 촉촉이 적셨고, 서풍은 감미로운 입김으로 숲과 들판의 연약한 싹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눈을 뜬 채 밤을 지새운 작은 새들은 저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연이 그들의 본능을 일깨웠던 것이다. - <캔터베리 이야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7618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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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인 율라 비스Eula Biss는 저서 《면역에 관하여》에서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라고 썼다. ‘내 몸은 내 것’이라며 백신을 거부하든 ‘나부터 살고 보자’며 접종 새치기를 하든, 면역을 ‘사적 계좌’로만 보는 건 마찬가지다. ‘공동 신탁’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예컨대 현재 접종 선택권조차 없는 16세 이하 영유아와 청소년, 건강상의 이유로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이 방패가 되어야 한다. 백신 접종은 발코니에서 냄비를 두드리며 의료진을 응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연대 행위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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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양극화는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고, 정치적 양극화가 심한 곳에서는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책에 대한 반대 진영의 반발도 컸다. 봉쇄 조치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단순히 음모론이나 개인의 자유라는 키워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팬데믹으로 세상이 혼란해진 게 아니라, 이미 혼란스러운 세상이 팬데믹이라는 창을 통해 조금 더 뚜렷이 드러났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75

스위스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거의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부의 권한은 각종 법으로 까다롭게 제한돼 있다. 국민투표는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고, 이 때문에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바이러스 억제 조치를 여론에 맡겨도 되는 걸까. 다수의 의견은 늘 옳은가. 팬데믹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도 개인의 권리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일까. 그렇다면 대체 연대란 무엇일까. 철저히 다수결의원리로 작동하는 국민투표와 포퓰리즘의 차이는 뭘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협상, 경제적 지원, 시민 의식 등 모든 방면의 협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이나 정치적 입장에 충실한 개인들의 투표 결과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것인 양 신성시돼선 안 된다(스위스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78

백신은 ‘뉴 노멀’이 아니라 현재 서구 사회가 번성하는 기반이 된 과학과 합리주의의 상징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백신을 만들어낸 곳에서 21세기에 안티 백신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78

두 세기쯤 전인 1798년, 영국의 시골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당시 만연했던 천연두에 대해 연구하던 중 소에게 주목했다. 소에게 일어나는 비슷한 병인 우두牛痘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그는 실험을 한다. 8살 소년에게 우두 고름을 접종하고 6주 뒤 천연두 고름을 접종한 결과,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우두 바이러스에 대항하며 생긴 면역이 나중에 들어온 천연두 바이러스에 맞서 작동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예방접종, 종두법의 탄생이었다. 이 기법은 당시 제너가 우두를 불렀던 이름인 ‘바리올라이 바키나이Variolae Vaccinae’로 널리 알려졌다. 라틴어 소(vacca, 바카)가 예방접종에 제 이름을 남기게 된 사연이다. 예방접종을 뜻하는 현대 스페인어(vacuna, 바쿠나)와 영어(vaccine, 백신)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82

백신의 중요성, 안전성, 효율성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나라로 한국이 꼽힌다(함께 꼽힌 나라들은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필리핀이다). 논문은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안아키’를 언급한다. ‘안아키’가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의 줄임말이며, 어린 시절의 예방접종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단체라는 설명도 들어가 있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85

집단면역은 여러 이유로 백신 접종을 못(안) 받거나, 받아도 항체를 못 만드는 사람까지 보호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인구의 일정 비율 이상이 면역되어야 하는데 그 비율은 질병마다 다르다. 홍역은 95퍼센트, 소아마비는 80퍼센트, 계절 독감은 30~40퍼센트다. 코로나19의 경우 여전히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초기엔 전문가들이 인구의 70~80퍼센트가 집단면역에 필요한 수치라고 판단했으나 델타 변이 확산 이후 이 가설도 무너졌다. 백신 접종률이 70퍼센트를 웃도는 국가에서도 여전히 감염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서다. 접종률이 70퍼센트를 넘어도 감염이 통제되지 않는 상황은 백신 반대론자들의 ‘백신 무용론’에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했다. 한편으로는 높은 접종률을 바탕으로 일상으로 복귀를 하되 여전히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이 필요하다는 ‘위드 코로나’ 논의를 확장시켰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89

약자를 희생시켜 얻은 집단면역으로 특권층을 보호한 셈이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은 먼저 접종을 받는 게 특권이다. 선진국이, 왕족이, 정치인이 새치기를 한다. 거울처럼 반대되는 상황이지만 접종이 ‘힘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은 같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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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진짜 인간을 뺀 거야. 인간은 변덕스럽고 어디로 튈지 몰라. 보편성이 없어. 사실 모든 생물이 다 그래. 개구리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데 생명 아닌 것은 안 그래.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지. 과학으로 일반화하려면 그 대상이 정물이어야 하는 거야. 생명이 없어야 하는 거지. 나비 관찰할 때 보라고. 날아다니는 나비를 관찰할 수 있나? 죽여서 포르말린 적셔 핀으로 꽂고 보잖아. 과학은 인간이 살지 않는 달나라, 인간이 살지 않는 우주를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거야. 거기에는 인간이 없어. 그러니까 인간을 표준으로 하지 않는 것이 과학이야. 인간을 배제해야 성립되는 것이 과학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89

"과학은 유니버설, 우주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까. 만물의 척도를 인간으로 하면 비과학이 돼버려. 왜? 우주 공간에는 인간이 없으니까. 인간을 배제해야 통하는 게 과학이야. 그래서 과학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걸 인정 안 해.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표준은 가짜야.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제멋대로가 되거든. 사람은 몹시 제멋대로야. 어디로 튈지 모르지. 개는 훌륭하고 벼룩은 나쁘고 까마귀는 흉악하고 꽃은 아름다워! 그런 저마다의 개별적인 주관이 과학의 시야에서는 이물질이야. 인간을 없애야 과학이 선명해져. 그게 수학이라네. 수학은 인간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 그래서 구구단은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는 거야. 6×7=42는 인간의 바깥에서 이미 정해진 논리야. 그래서 한국에서도 통하고 영국에서도 통하고 달나라에서도 통해. 수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실제 경험과 관계없어. 어쩌면 신에 가까운 거지. 그런데 말이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91

"문학예술은 그렇지 않아.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네. 동물을 이야기해도 인간이 돼. 『이솝우화』처럼. 과학과 예술이 대립하는 이유는 분명해. 과학은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가정하고, 예술은 모든 것을 ‘인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네. 물론 예술 중에서도 추상예술이 있지. 그런데 그 또한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거야. 인간의 시각 경험으로 미술이, 청각 경험으로 음악이, 언어 경험으로 문학이 탄생한다네. 인간의 경험, 그 자체는 추상이 될 수 없거든."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91

"양자역학의 세계는 보는 자에 따라 달라져. 존재하지 않는데 누군가 보면 또 나타나지.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야. 물리 세계에서 모든 것은 입자와 웨이브로 나뉘는데, 양자의 세계로 들어오면 똑같아지거든. 웨이브가 입자고 입자가 웨이브야. 양자 컴퓨터가 그렇잖아. 보통의 컴퓨터는 0아니면 1이지. 그런데 양자는 0이면서 동시에 1이야. 죽으면서도 동시에 삶이라는 거야. 아인슈타인도 몰랐던 거야. 양자역학에서 보면 우주의 블랙홀도 인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아. 양자역학 연구자들이 노자, 장자 같은 동양철학의 세계로 빨려들어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걸세."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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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칸트가 바로 그 세 가지 영역을 질서 있게 정리했어. 진실(眞)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선악(善)의 윤리 문제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아름다움(美)에 관한 것은 『판단이성비판』에서 다뤘지. 그게 모여서 서양의 세 가지 기준인 진선미眞善美가 된 거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3531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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