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내 주변에는 언제나 식물이 있었다. 식물은 별다른 능력이 없는 나에게 밥벌이가 되어주기도 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친구이자 애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 흔들리는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다가 내 삶을 지지해주는 벗이었다가 아픈 나를 달래주는 약이 되어주기도 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14
논문 발표와 함께 우리가 찾아낸 그 식물은 ‘섬진달래’라는 우리 이름을 얻었다.• 전에 없던 식물의 분포 여부는 논문 발표를 통해 국제적 효력이 생긴다. 우리 산의 봄을 알리는 진달래는 분홍색 꽃이 주로 한 송이씩 피지만 섬진달래는 흰색 꽃이 소복이 모여서 다발처럼 핀다. 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해안가의 바닷바람을 오랜 시간 견뎌낸 탓에 키는 작은 편이고, 염분에 맞서느라 잎은 다소 두껍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정원 소재나 관상용 식물로 안성맞춤이라 충분히 산업화할 수 있는 식물이다. 일본은 관상용 식물의 품종 개발 분야에서 엄청난 강국인데, 2012년 이 식물을 국가의 보호식물로 지정했다. 일본 혼슈 지역에 약 200여 개체만이 분포하고, 일본 밖 어디에도 없는 그들의 고유식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22
꽃 핀 백서향이 내 앞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상서로운 향기가 난다’는 뜻의 ‘서향’•에 ‘하얀 꽃이 핀다’는 의미의 접두어가 붙은, 그 이름부터 이미 하얗게 향기로운 식물.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29
학명의 첫 번째 단어인 속명 ‘Eranthis’는 ‘꽃’을 뜻하는 그리스어 ‘anthis’ 앞에 ‘봄’이라는 의미의 ‘Er’가 붙은 단어이다. 땅이 온전한 해빙을 허락하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우고 서둘러 열매를 맺는 부지런함은 그들의 생존 무기가 되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35
그들을 살피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변산바람꽃이 주변의 이야기를 넌지시 해준다. ‘Eranthis’는 우리말로 ‘너도바람꽃속’으로, 여기에 속하는 식물은 전 세계에 10여 종 정도 되며 그중 자신과 너도바람꽃만 우리나라에서 자란다고, 우리 둘이 남매지간이라면 그 사촌쯤 되는 바람꽃속 식물도 있다며 아네모네Anemone 이야기를 꺼낸다. 꽃집이나 화단의 아네모네는 알고 우리 이름 ‘바람꽃’을 모른다면 한반도 도처에 사는 바람꽃 식물들이 서운해할지도 모른다고, 바람꽃과 꿩의바람꽃과 홀아비바람꽃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바람꽃 종류를 줄줄이 호명한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37
꽃을 틔우고 꿀을 빚고 열매의 육즙을 채워 씨앗을 지키는 식물의 생애. 그것을 기록하는 나의 생애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다.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 아름다운 행성’을 오늘도 내일도 내내 조화롭게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여장을 푼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39
내가 나를 조금 높이 평가할 때가 있다. 산과 들의 수많은 식물을 약초와 독초로 척척 구별할 때, 딱 보면 먹을 수 있는 풀인지 아닌지를 알 때, 그들 가운데 특히 맛있는 풀을 골라낼 때가 그렇다. 식물이 저마다 자연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방식을 헤아리고 그들의 삶을 살뜰히 챙기는 내 모습을 볼 때 돌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는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40
얼레지처럼 백합과 여러해살이풀인 풀솜대를 민간에서는 ‘지장나물’이라고 부른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46
양구를 비롯하여 인제, 화천 등지의 산촌에서는 는쟁이냉이로 물김치와 장아찌를 담가 먹고, 경상북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는쟁이냉이가 자랄 수 있는 봉화군에는 옛 조리법을 그대로 이어 산갓물김치를 담그는 고택이 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49
마타리와 대나물과 곤드레(고려엉겅퀴)가 뒤섞인 묵나물밥, 곰취와 삼나물(눈개승마)과 명이나물(산마늘)과 잔대로 담근 각종 장아찌, 수리취와 서덜취와 비비추와 다래순을 각각의 나물성에 따라 양념을 달리하여 버무린 나물무침, 참나물과 참당귀와 어수리와 파드득나물 쌈채류… 할머니들의 밥상은 훌륭한 산나물 학습장이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50
철쭉. 한자로 ‘머뭇거릴 척躑’에 ‘머뭇거릴 촉躅’이 변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약간의 독성이 있는 철쭉을 뜯어 먹은 양들이 똑바로 걷지 못하고 비틀대는 모습을 본 중국의 유목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항간에서는 꽃이 발걸음을 붙잡는다고 해서 척촉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만큼 꽃이 무척 예쁜 식물이다. 예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고, 뭐랄까 차분한 색감 때문에 다소 우아한 분위기가 있고, 잎을 다 내밀고 느긋하게 피어서인지 여유로움이 근사하게 배어나는 꽃나무가 철쭉이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53
로도덴드론은 특히 서양인이 사랑하는 나무인데 예로부터 정원을 아름답게 해서 그렇다. ‘장미처럼 꽃이 예쁘다’는 의미의 ‘Rhodo’에 ‘나무’를 뜻하는 ‘dendron’을 합쳐 지은 속명이 ‘로도덴드론’이다. 나무 한 그루가 한 정원을 책임질 정도로 아름다운, 이 정원은 이 나무가 다했네, 할 때의 주인공이 바로 로도덴드론이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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