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불타오르는 크고 검은 두 눈은 매우 아름다우며, 그 창백한 두 눈은 약간 누르스름한 기색이 비치는 갸름한 얼굴에 특히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두 눈과 매혹적인 입술의 윤곽에는 자기 형이 한때 무서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사랑이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 같은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410

커튼이 열리면서 바로…… 그루셴까가 기쁨에 넘친 듯 활짝 미소를 지으며 탁자를 향해 다가왔다. 알료샤는 마치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료샤는 그녀를 응시한 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녀다, 그 끔찍한 여자. 이반 형이 30분 전에 〈짐승〉이라고 불렀던 그 여자다. 그 여자가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게 보이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닌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른 아름다운 여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여자가 아닌가! 사실 그녀는 매우,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으며 많은 사내들의 정열을 자극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러시아적 미인이었다. 그녀는 상당히 큰 키였으나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보다는(그녀는 매우 키가 컸다) 약간 작은 편이었다. 몸매도 풍만한 데다가 몸 동작도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고, 목소리도 어떤 달착지근한 향기를 뿜어내듯 여성스러웠다. 그녀는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처럼 의기양양하고 힘있게 걷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히 걸어서 다가왔다. 마룻바닥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화사한 검은 비단 옷을 사각거리며 안락의자에 사뿐히 걸터앉아 거품처럼 하얗고 토실토실한 목과 넓은 어깨를 검은 모직 숄로 얌전히 감쌌다. 그녀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으며 얼굴은 자신의 나이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 얼굴은 매우 흰 편이었고 뺨에는 연분홍빛 홍조가 돌고 있었다. 얼굴형이 너무 넓은 게 아닌가 싶고 아래턱은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윗입술은 얇았으나 약간 튀어나온 아랫입술은 두 배 가량 두꺼워 마치 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놀라우리만치 매혹적인 검은 머리칼, 짙은 검은색 눈썹, 속눈썹이 긴 아름답고 푸른 눈 등은 혼잡한 군중 속을 거니는 아무리 무심하고 부주의한 남자라 할지라도 일단 마주치기만 하면, 갑자기 그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서서 오랫동안 그 얼굴을 못 잊을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421

그녀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즐거운 표정이었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확신에 가득 차서 조바심내는 어린애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벙글거리며〉 바로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알료샤는 그녀의 시선이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고 느꼈다. 그녀에게는 알료샤로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저 천성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양이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매는 풍만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숄 밑으로는 넓고 풍만한 양 어깨와 아름다움의 절정에 다다른 젊은 처녀다운 볼록한 젖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몸은 분명히 비율이 약간 과장되긴 했지만 밀로의 비너스 상의 형태를 그려 나가는 듯했다. 그걸 예감할 수 있었다. 러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루셴까를 보면서 그 싱싱하고 젊음이 넘치는 아름다움도 서른 살이 되면 조화를 잃어 뚱뚱해지고 얼굴은 살이 쪄 축 늘어지며 눈가와 이마에는 얼마 안 되어 주름살이 가득하고 얼굴빛은 윤기가 사라져 어쩌면 불그죽죽해질지도 모르는, 한마디로 말해서 러시아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찰나적인 아름다움, 무상한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드시 예언할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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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거스리는 홀트의 자기 집 부엌 창문 앞에 서서 해가 막 떠오르는 뒤뜰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해는 풍차 꼭대기에 닿았다가 나무기둥 위 강철 날개와 꼬리날개를 따라 움직이며 점점 붉어졌다. 잠시 후 거스리는 담배를 끄고 이층으로 올라가 문이 닫힌 손님방을 지나쳤다. 닫힌 문 뒤 어두운 방 안 침대에는 그녀가 자고 있었다. 혹은 깨어 있었다. 거스리는 복도를 지나 남자아이 두 명이 있는 부엌 위쪽 방으로 갔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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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책 중독자다. 나는 많이, 아주 많이 걷는다. 나에게 산책은 다리 근육을 사용해서 이족 보행을 일정 시간 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나에게 산책은 예식이다. 산책에 걸맞은 옷을 입고, 신중하게 그날 날씨를 살피고, 가장쾌적한 산책로를 선택한다. 그리고 집을 나가, 꽃그늘과 이웃집 개와 과묵한 이웃과 버려진 마네킹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돌아온다. - P284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산책은 쇠퇴해가는 나의 심장과 폐를 활성화한다. 산책은 나의 허리를 뱃살로부터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안구를 노트북과 휴대폰 스크린으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마음을 스트레스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심신을 쇠락으로부터 구원한다. 동물원의 사자가 우리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라는데, 산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 P285

나에게 산책은 생업이다. 얼핏 보면, 빈 시간을 죽이려고 산책 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나는 산책을 통해 일상의 필연적 피로를 씻는다. 그뿐이랴. 산책 중에 떠오르는 망상은 메모가 되고, 메모는 글이 되고, 글은 책이 된다. 그렇다고 글감을 얻기 위해 산책하는 것은 아니다. 글감은산책 중에 그저 발생한다. 산책하면 단지 기분이 좋다. - P285

나에게 산책은 네트워킹이다. 술자리와 골프와 동창회와 조기축구회를 즐기지 않는 중년에게 산책은 거의 유일한 정기 네트워킹이다. 걸으면서 나보다 앞선 산책자들과 뒤에 올 산책자들을 생각하며 상상의 네트워크를 맺는다. 나는 특히 산책을 즐기다가 죽은 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를 생각한다. 1956년 12월 25일, 발저는 홀로 산책하다가 눈 위에 쓰러져 죽었다. - P285

발저는 산책을 이렇게 찬양한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로 아름답고, 좋고, 간단하다. 신발만 제대로 갖춰 신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차가 없다. 신발은 있다.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라 신고 평지를 산책한다. 오르막길은 하나의 과제처럼 여겨지므로되도록 피한다. 모든 것에 눈이 내려앉은 날 산책은 얼마나 황홀하던가. 발저는 그러한 황홀함 속에서 죽었다. - P287

산책할 시간에 차라리 회식을 하고, 골프를 치고, 출마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홀로 산책하면 외롭지않냐고? 산책은 세상과 멀어지는 일이 아니냐고? 그렇지않다. 산책은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하기 위한 거의 모든것이다. 발저는 말한다. "활기를 찾고 살아 있는 세상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없으면 나는 한마디도 쓸 수가 없고, 아주작은 시도, 운문이든 산문이든 창작할 수 없습니다. 산책을 못 하면, 나는 죽은 것이고, 무척 사랑하는 내 직업도사라집니다. 산책하는 일과 글로 남길 만한 것을 수집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습니다." - P287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 P288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것은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출장이다. 나는 업무 수행을 위한 출장을 즐기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과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난 아닌데? 나는 그냥 태어났다. 여건이 되면 민족중흥에 이바지할 수도 있겠지만, 민족중흥에 방해나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난 산책하러 태어났다. 산책을 마치면 죽을 것이다. - P288

그렇다고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일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런저런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일을 하러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 별거 아닌, 혹은 별거일 수도 있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성취는 내가 산책하는 도중에 발생한다. - P289

산책하러 나갈 때 누가 뭘 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산책하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줘. 곡괭이 하나만 사다 줘. 손도끼 하나만 사다 줘. 텍사스 전기톱 하나만 사다 줘. 어차피 나가는 김인데. 나는 이런 요구가 싫다. 물론 그런 물건들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 부여되면 산책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라 출장이다. 애써 내 산책의 소중함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다. 그냥 텍사스 전기톱을 사다 준 뒤, 나만의 신성한 산책을 위해 재차 나가는거다. 신성한 산책을 하는 중이라고 해서 걷기만 한다는것은 아니다. 길가의 상점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물건을사기도 한다. 그것은 미리 계획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발길을 옮기다가 관심이 생겨서 하는 일일 뿐이다. - P289

인생에 정해진 목적은 없어도 단기적 목표는 있다.
산책에 목적은 없어도 동선과 좌표는 있다. 내가 가장 즐겨 가는 곳 중 하나는 인근의 독립서점이다. 자, 나온 김에 오늘도 독립서점 쪽으로 걸어가볼까. 그렇다고 해서 특정책을 구입하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는 그냥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한다. 독립서점에는 그냥 간다. 그냥 가서 과묵하고 유식한 점장이 큐레이팅한 서가를 돌아보다 보면종종 책을 사게 된다. 그곳에는 재밌는 책이 많으니까. - P291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건 아니다.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 P291

행복하고 싶어! 많이들 이렇게 노래하지만, 나는 행복조차도 ‘추구’하고 싶지 않다. 추구해서 간신히 행복을 얻으면, 어쩐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는 대신에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 억지로가려고 하면 더 안 오는 일. 잠이 안 와요, 라는 표현에서드러나듯 우리가 잠에게 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억지로 잠들려고 할수록 잠이 달아나지 않던가. 행복도 그런게 아닐까. 나는 자네에게 가지 않을 테니, 자네가 오도록하게. 행복이여, 자네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도록 하게, 셔터가 무심코 눌려 찍힌 멋진 사진처럼. - P292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내가 너무 지나친 궁핍에 내몰린다면,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너무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다면, 타인의 인정을 얻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시험에 9수를한다면, 시험 합격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 P292

재산은 필요하지만, 재산 축적 자체가 삶의 목적이될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자유로운 삶은 많은재산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군중이나 실력자들 밑에서 노예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 P293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 P293

『아우스터리츠』에서 작가 W. G. 제발트는 벽에 붙어있는 나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방들은 살아 있는 동안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생식이란 과업을 가능하면 빨리 완수하는 것만 생각한다고 알폰소가 말했지요. … 녀석들은 자기들이 잘못 날아왔음을 아는 것 같아요. 녀석들이 죽음의 경련으로 경직된 미세한 발톱으로 매달린 채 목숨이 끝날 때까지 불행의 장소에 달라붙어 있으면, 공기의 흐름이 그들을 떼어내어 먼지 쌓인 구석으로 날려 보내지요. 내 방에서 죽어가는 그런 나방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종종 이 혼돈의 시간에 그들은 어떤 불안과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자문하곤 하지요. - P9

인간은 생식이란 과업 이상을 꿈꾸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번식에 그치지 않고 번식 이상의 의미를 찾으면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현재에 만족하지않고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인간의 선의를 발명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 P9

의미와 희망과 선의를 좇으면서 동시에 학살과 전쟁과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만들어온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대를 이어 생멸을 거듭해온 인간이란 종(種)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혼돈의 시간에 그들은 어떤 기쁨과 불안과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자문해보곤 한다. - P9

희망은 답이 아니다.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이미 탈진 상태인 이들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희망은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필요한 위안이 되어야 한다. - P10

인간의 선의는 답이 아니다.
선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인간의 선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간의 선의는 선의 없이도 살아갈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주어지는 선물이 되어야 한다.
의미는 답이 아니다.
의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텅 비어버린 이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역설하는 게 무슨 소용이있을까. 의미는 의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끔 떠올릴 수 있는 깃발이 되어야 한다. - P10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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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끄람스꼬이의 작품 중에는 「관조자」라는 제목의 뛰어난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에는 겨울 숲이 그려져 있고, 그 숲 사이로 난 숲길에는 낡은 농부복에 짚신을 신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이는, 깊디깊은 고독 속에서 길을 잃은 농부가 서 있는데 마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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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병사는 기껏해야 2~3일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온갖 고통은 그가 죽을 때까지의 이 기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직은 몸이 마비 상태라 그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 시간만 있으면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고래고래 단말마의 비명을 지를 것이다. [……]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 본문 중에서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0793 - P5

우리는 지금 전방에서 9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어제 전방에서 이곳으로 교대되어 온 것이다. 지금 우리는 흰 콩에다 쇠고기를 잔뜩 먹어 배가 부르다. 만족스럽다. 심지어 어제저녁에는 다들 반합에 음식을 가득 담아 먹었다. 게다가 소시지와 빵은 2인분씩 나오기까지 했다. 이런 일이 실로 얼마 만이던가.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은 취사병이 직접 음식을 나누어 준다. 그는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숟가락으로 오라고 불러서는 반합에 음식을 가득 채워 준다. 마치 그는 어떻게 하면 취사차의 음식을 다 비울 수 있을까 하고 전전긍긍하는 것 같다. 차덴과 뮐러는 어디선가 세숫대야를 몇 개 구해 와서는 여분의 음식을 넘칠 정도로 가득 담아 왔다. 차덴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음식을 탐하기 때문이고, 뮐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만일을 위해서다. 차덴은 그렇게 꾸역꾸역 먹어 대는데도 그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두들 궁금해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나 지금이나 멸치같이 비쩍 마른 말라깽이이기 때문이다.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0793 - P10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엎드린 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을 뒤집어 보니 그가 죽어 가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된 것을 마치 흡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무척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0793 - P409

군인에게는 소화와 배설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친숙한 영역이다. 군인이 사용하는 말의 4분의 3은 이 영역에서 나온다. 아주 기쁠 때나 아주 화가 났을 때 쓰는 표현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문구가 대부분이다. 다른 방식으로는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집에 돌아간다면 우리 가족이나 우리 선생님은 적이 놀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말이 누구나 쓰는 보편적 언어임은 부인할 수 없다.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0793 - P19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가난하고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즉각 전쟁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이라면 전쟁의 결과에 대해 더 명확히 알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0793 - P24

우리 또래가 어른들보다 더 정직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보다 나은 점은 상투어를 사용하고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능력뿐이다. 처음으로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돌격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포화를 맞으면서 그들에게서 배운 우리의 세계관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들이 아직도 글을 쓰고 떠벌리는 동안 우리는 야전 병원과 죽어 가는 동료들을 보았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최고라고 지껄이는 동안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0793 - P26

케머리히는 고개를 끄덕인다. 손이 밀랍 같아서 나는 그의 두 손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손톱 밑에는 참호에서 묻은 흙이 아직 끼어 있다. 손톱은 독처럼 검푸른색이다. 문득 케머리히가 진작 숨을 멈추고 난 후에도 그의 손톱이 계속 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유령 같은 땅속의 버섯처럼 길게 말이다. 나는 그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손톱이 코르크 마개 뽑이처럼 구불구불 자꾸만 자꾸만 자라나는 모습이. 이와 더불어 뼈만 앙상해지는 두개골 위의 머리털도 비옥한 땅 위의 풀처럼, 바로 그 풀처럼 자라나는 모습이. 그런데 이게 어디 있을 법이라도 한 얘긴가?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0793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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