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록의 표현을 빌자면 "구불구불한 길은 사람을 결코 지치게 하지 않는다. 길마다 성격이 있고 영혼이 있다. 이 길에서 저 길로 걸어 다니다 보면 많은 사람과 함께 여행하거나 여러 친구와 어울리는 기분이 든다." - <천천히, 스미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4990114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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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지음) 중에서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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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술 담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술 담배를 하면 손의 감각이 약해지고 붕어빵틀의 미세한 진동과 열기를 정확하게 느낄 수 없다고 했다. 붕어빵틀이 무슨 휴대전화도 아니고 무슨 진동이 있어요. 불기가 틀을 때리고 틀 속에 든 붕어빵이 익으면서 공명하는 진동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아버지 요즘 시 쓰세요? 무슨 소리냐? 아녜요. 기내식으로 감귤 주스가 나왔다. 하늘에서 마시는 감귤 주스라니, 새로운 세계였다. 감귤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망상을 하다보니 금방 칸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 P52

둥글고, 화려했다. 카쯔오부시가 나긋나긋한 춤을 천천히 추며 전아하게 녹아내렸다.
뜨거웠다. 바삭바삭한 겉 부분이 순식간에 녹고, 진하고 따뜻한 것들이 왈칵 뿜어져나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순식간에 혓바닥과 입안이 촉촉해졌다. 간신히 입을 벌리자 모락모락 좋은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다시 입을 다물자 뜨거운 반죽들이 입천장을 향해 질주했다. 하아, 하아. 입을 여러번 여닫고 나서야 평정을 되찾았다. 우리나라 풀빵에서 찾을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반죽을 일부러 덜 익히는 풀빵이 존재하다니.
그 순간 문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 P56

문어의 기습을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 뭐지? 탱탱하고 쫄깃한데 생각보다 컸다. 이걸 씹어도 될까? 설마 문어일까? 이는 ‘먹어도 됩니다!’ 하고 소리쳤다. 혀가 ‘이거 문어 같아요!’라고 보고했다. 뇌가 용단을 내렸다. ‘그래, 씹어라!’ 이가 용감하게 명령을 수행하자 문어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맛이 이 사이로 파고들었고 혀가 잽싸게 육즙을 핥았다. 여전히 따뜻한 반죽이 입안을 지배하고 있는 틈 사이로 문어의 맛이 깊고 넓게 퍼졌다. 단지 문어의 한 조각, 긴 다리의 아주 짧은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세상의 모든 문어를대표하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 P57

붕어빵이 붓글씨라면 타꼬야끼는 유화였다. 붕어빵이 된장찌개라면 타꼬야끼는 해물탕이었다. 반죽과 앙금으로만 만들어지는 붕어빵이 단순한 매력으로 입안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면 타꼬야끼는 다양한 재료의 융합으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 P58

타꼬야끼의 황금비율, 재료부터 시작해서 굽는 시간과 동작까지, 철저히 준비된 타꼬야끼의 이데아. 나는 비로소 동굴 감옥에서 해방되어 그림자 대신 진리를 보게 되었다. 그리스에도 타꼬야끼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소크라테스와플라톤이 사이좋게 세알씩 나눠 먹었겠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옆에서 군침만 삼키고. 아,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죽었지, 참.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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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in November


Love, the world
Suddenly turns, turns colour. The streetlight
Splits through the rat’s-tail
Pods of the laburnum at nine in the morning.
It is the Arctic,

This little black
Circle, with its tawn silk grasses—babies’ hair.
There is a green in the air,
Soft, delectable.
It cushions me lovingly.

I am flushed and warm.
I think I may be enormous,
I am so stupidly happy,
My Wellingtons
Squelching and squelching through the beautiful red.

This is my property.
Two times a day
I pace it, sniffing
The barbarous holly with its viridian Scallops, pure iron,

And the wall of old corpses.
I love them.
I love them like history.
The apples are golden,
Imagine it—

My seventy trees
Holding their gold-ruddy balls
In a thick grey death-soup,
Their million
Gold leaves metal and breathless.

O love, O celibate.
Nobody but me
Walks the waist-high wet.
The irreplaceable
Golds bleed and deepen, the mouths of Thermopylae.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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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편지


사랑이여, 세상은
갑자기 색깔을 바꾸고, 바꾼다. 가로등 불빛이
아침 아홉 시 금사슬나무
쥐의 꼬리 같은 열매 깍지들을 쪼갠다.
북극이다,

이 작고 검은
원, 황갈색의 비단 풀들을 지녔지— 아기들의 머리카락.
공기 속에는 녹색이 있다,
부드럽고, 기분 좋은.
그건 나를 쿠션처럼 사랑스럽게 받쳐준다.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따뜻해진다.
내가 굉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무 바보같이 행복하다,
내 웰링턴 장화
아름다운 빨간색으로 철벅철벅 소리를 내며 걷는.

이것은 내 소유지다.
하루에 두 번
그곳을 천천히 걷는다,
청록색 가리비 같은
잔인한 호랑가시나무, 순수한 철,

그리고 오래된 시체들의 벽 냄새를 맡으며.
나는 그것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것들을 역사처럼 사랑한다.
사과들은 황금색이다,
상상해보라 ─

나의 칠십 그루 나무들
걸쭉한 회색 죽음의 수프 속에서
황금의 불그스름한 공들을 달고 서 있고,
그 백만 개의
황금 잎들은 금속제이고 숨을 쉬지 않는다.

오 사랑이여, 오 독신주의자여.
나 말고는 아무도
허리 높이까지 젖도록 걷지 않는다.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황금들이 피를 흘리며 짙어진다, 테르모필레°의 입구들.
° 테르모필레(Thermopylae)는 기원전 480년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에 대패한 그리스의 전쟁터이다.

-알라딘 eBook <에어리얼> (실비아 플라스 지음, 진은영 옮김) 중에서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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