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 엘리만이 어떤 시기에 정말로 살았던 사람인지, 혹시 어느 작가가 문단을 농락하기 위해 혹은 문단에서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낸가명이 아닌지 의심할 수는 있었지만, T.C. 엘리만의 책이라는 강력한 진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혹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덮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을 향해 삶이 거칠고 순결하게 역류해왔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18
문학에 대한, 아마도 삶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놓은 작품은 T.C. 엘리만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 이것이 책의 제목이었고, 우리는 샘물을 마시러 가는 바다소들처럼 그 책으로 돌진했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18
제일 먼저 예언이 있었고, 왕이 있었다. 그리고 예언이 왕에게 말하길, 땅이 너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주리라. 하지만 그 대가로 늙은 사람들의 유해를 내놓아야 했다. 왕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곧바로 자기 왕국의 노인들을 불태워 죽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유해를 자기 왕궁 주변에 뿌렸다. 그 자리에 곧 숲이 우거졌다. 그 음산한 숲을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라고 불렀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19
물론 그 전까지 T.C. 엘리만을 전혀 몰랐다는 말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이름을 들었다. 식민지 시절부터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학생들의 문학 교재로 사용된 『흑인 문학 개설』 속에 그 이름이 있었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0
세네갈은 여자를 유혹할 때 여전히 시가 가장 믿을 만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였다. 여자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4행시를 외우고 혹은 직접 짓던 시절이었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1
다시 말해보자. T.C. 엘리만, 그는 너무 일찍 빛을 발한 재능 있는 작가였다. 어쩌면 천재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재능을 절망을 그리는 데 바쳤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엘리만의 책은 폭력적이고 미개한 암흑의 아프리카라는 식민주의적인 관점을 더욱 강화했다. 오래전부터 너무 많은 아픔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게 될 아프리카 대륙은 그 품에서 태어난 작가들이 좀 더 긍정적인 모습으로 자기를 그려주길 바랄 권리가 있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3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다른 문학사(어쩌면 진정한 문학사)에 속했다. 시간의 통로에서 길을 잃어버린 책들의 역사, 저주받은 책들이 아니라 그저 잊힌 책들, 그 주검과 해골과 고독이 간수 없는 감옥의 바닥에 흩어져 있는 책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얼어붙은 길들 위에 방향 표지석을 세우는 책들의 역사.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4
검색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의 첫 대목이었다. 마치 칠십 년 전 책이 전부 사라질 때 오직 그 대목만이 구조되어 살아남은 듯했다. 제일 먼저 예언이 있었고, 왕이 있었다. 그리고 예언이 왕에게 말하길, 땅이 너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주리라. 하지만 그 대가로 늙은 사람들의 유해를 내놓아야 했다. 이하 생략.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5
엘리만은 문학의 깊은 밤에 단 한 번 성냥을 그어 밝힌 불길이었다. 나는 서서히 엘리만과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잊었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7
어차피 삶은 ‘그럴 수-있다peut-être’ 속의 연결선에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단어를 만드는 가느다란 선 위를 걷고 있지. 내 무게 때문에 선이 끊어진다면 할 수 없지 어쩌겠어. 뭐가 살아남고 뭐가 죽었는지는 그때 가서 보는 수밖에.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7
어쨌든 나는 나를 포함하여 입 거친 인간들이 게토라고 부르는 파리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문단에서 어느 정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내 책을 읽지 않았고 이후에도 절대 읽지 않을 사람들이 〈르몽드 아프리카〉의 짤막한 기사 덕분에 내가 n번째로 등장한 유망주 작가임을 알게 된 것이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29
그때였다. 시가 D.가 부부4의 소매를 걷기 위해 팔을 움직이느라 몇 초 동안 옷의 틈새로 가슴이 보였다. 어두운 터널 끝에서 혹은 대기실 복도 끝에서 어른대듯, 그렇게 시가 D.의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가 D.는 자신의 유방에 대해 기념비적인 구절들을, 에로틱한 글들만 모아놓은 가장 뜨거운 선집에 들어갈 만한 찬사의 시를 썼다. 다시 말해 나는 후세 문학에 전해질 가슴을 보고 있었다. 많은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시가 D.의 가슴을 보았고, 둥글게 솟아오른 그 가슴에 대해 굳건한 환상을 품었다. 나 역시 품었던 환상이 되살아났다. 시가 D.가 팔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가슴은 비밀로 되돌아갔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33
시가 D.의 젖가슴 앞에서 내 두 손은 우스꽝스러우리만큼 무해하고 작았다. 내 손은 욕망이 불가능한 손, 퇴화된 날개였다. 혀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시적인 유두가 이미 내 혀를 납으로 봉인해버렸다. 망했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39
난 거의 찾을 뻔했지. 가까이 다가갔어. 하지만 너무 험한 굽잇길이었고 멀기도 했고 때론 목숨이 위태로웠지. T.C. 엘리만을 찾다보면 갑자기 발밑에 침묵의 절벽이 열리거든. 마치 하늘이 거꾸로 놓인 듯하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아. 내 앞에 그런 구덩이가 열렸고…… 난 비틀거렸어. 추락했는데…… 그때……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50
아마도 우리가 이 책을 공유하게 될 거야. 우리의 만남은 좀 엉뚱했지. 신기한 지름길로 왔달까. 어쨌든 이리로, 그래, 이 책으로 왔어. 아마 우연일 테지. 운명일 수도 있고. 하지만 우연과 운명이 꼭 반대되는 건 아니야. 우연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운명일 뿐이거든. 보이지 않는 잉크로 이미 적혀 있는 운명.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54
사람들은 책이라면 꼭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디에간, 뭔가에 대해 말하는 건 보잘것없거나 시시하거나 진부한 책들뿐이야. 위대한 책은 주제도 없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아. 단지 무언가를 말하려고 혹은 발견하려고 애쓰지. 그 단지가 이미 전부야. 그 무언가가 이미 전부이고.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5096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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