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평평하나坪 너른 벌 하나 없고
이름은 집터로되垈 사람 살 집 아니로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만 좀 짖어!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58

그날, 금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 구경을 했다. 커다란 스크린에선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말을 타고 사막을 달리며 총을 쏘기도 하고 마차 뒤에서 남녀가 서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영화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을 가진, 미국美國이란 먼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금복은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과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웅장한 소리가 너무 생생하고 두려운 나머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내는 손가락 두 개만 남은 손으로 옆자리에 앉아 떨고 있는 금복의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 금복은 영화에 너무 몰입해 있어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이 사내의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84

철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평대 사람들의 호구책은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59

그야말로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원시적 삶의 형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큰 눈보다는 작은 눈이, 평평한 발보다는 뾰족한 발이 유리해 눈은 점점 작아지고 평평한 발은 우제류偶蹄類의 그것처럼 뾰족해졌으며 질긴 가죽을 씹어 무두질을 하느라 이빨이 한층 더 커지는 한편, 다른 곳보다 일찍 찾아오는 추위를 견디느라 코는 길어지고 얼굴은 더욱 납작해졌다. 그것은 진화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0

평대 사람들의 수직적 삶에 커다란 변화가 닥친 것은 마을에 철도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철도는 수평의 세계였으며 좌우로 뻗어나가는 직선의 세계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0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찾아, 볼거리를 찾아, 기회를 찾아, 건수를 찾아, 신도를 찾아, 짝을 찾아 먼 도시 또는 인근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훗날 평대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때의 갑작스런 인구팽창을 가리켜 ‘평대의 일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1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2

개망초.
그것은 춘희가 금복의 손을 잡고 평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역 주변에 무성하게 피어 있던, 슬픈 듯 날렵하고, 처연한 듯 소박한 꽃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 꽃은 가는 곳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 훗날 그녀가 머물 벽돌공장의 마당 한쪽에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간을 보낼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을 참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3

소위,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거대한 물결은 도시를 타고 넘어 바야흐로 평대에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다리가 짧고 발이 뾰족한 평대 사람들은 외지에서 떠들어온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뒤섞여 따로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그들만의 고유한 에토스도 점차 사라져갔다. 평대 사람들은 더이상 나물을 캐지 않았고 올무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지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네안데르탈인처럼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5

따라서 춘희네는 금복이 운영하는 찻집을 가리키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금복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훗날 춘희네는 ‘坪垈茶房평대다방’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그것은 평대에서 최초로 생긴 다방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7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 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8

춘희는 처음부터 금복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체의 존재에게서 낯선 이물감을 느꼈으며 그것을 더없이 불편하게 여겼다. 더구나 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8

그런 식으로 춘희는 미처 세상과 가까워지기도 전에 점차 혼자만의 세계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9

다방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평대 사람들에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마약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으며 오랫동안 그들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70

두 사람은 그렇게 뜨겁고 아슬아슬하게, 끈적하고 늘큰하게, 두근두근 숨가쁘게, 달아오른 한여름의 대기 속에 들큼한 날숨을 뒤섞으며 거의 반나절이 족히 걸려 남발안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82

그들은 생선장수가 운전하는 노란 사륜차의 짐칸에 실려 평대로 모여들었고 덕분에 평대는 점점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녀의 다방이 더욱 성황을 이룬 것 또한 물론이었다.
드디어 평대의 이차 빅뱅이 시작된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3

코끼리 점보는 자기만의 시간대에서 살아갔다. 그는 일 분에 겨우 스물다섯 번밖에 뛰지 않는 심장을 가지고 느릿느릿 움직였으며 춘희 또한, 그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의 세계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대신에 길 한쪽에 비켜서서 질주하는 자동차를 지켜보는 것처럼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하루살이의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3

文은 본시 침착하고 과묵하며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온갖 물리적 반응과 화학적 변화에 대해 남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뛰어난 장인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 금복이 그에게 벽돌공장을 맡긴 것은 꽤나 적절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금복과 종종 갈등을 일으켰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9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6

더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벽돌공장이 들어서면서 잠시 주춤했던 뜨내기들이 다시 평대로 발길을 돌리는 통에 평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향토사학자들은 이때를 기차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갑작스런 인구유입과 구분해 ‘평대의 이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3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39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3

금복의 바람기는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와의 관계로 시작되었고, 그 이듬해 목사는 소원대로 평대 한복판에 번듯한 예배당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헌금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6

진흙을 만지는 순간, 그녀는 그 축축한 물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운명적인 일체감을 느꼈으며 알싸한 듯 구수한 흙냄새와 손에 와 닿는 차지고 끈끈한 진흙의 촉감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것은 그 옛날 자신이 태어났던 순간의 마구간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52

한편, 춘희는 곧 文이 한없이 고독하고 슬픈 감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그녀는 끝내 文의 슬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 때문에 文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점보와 함께 공유했던 일종의 연대감과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말이 없는 가운데 그렇게 차츰 독특한 부녀관계가 형성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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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의 말라비틀어진 육체는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

이 무렵, 한겨울에 때아닌 꿀벌이 날아들어 평대의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사람들은 뭔가 큰 변괴가 생긴 거라며 두려움에 떨었는데, 뒤이어 한 여자가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는 섬뜩하게도 한쪽 눈이 빠져 달아난 애꾸였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잔주름 하나 없이 백옥처럼 깨끗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어릴 때부터 꿀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

무릇,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소이연이 생육과 번식일진대, 아무리 세상에 드문 박색이라곤 하지만 그녀도 엄연히 X자 두개를 갖고 태어난 암컷임에는 틀림없었으니 그 특별한 수컷의 기물을 마주하고 어찌 기함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

다행히 반편이의 딸은 반편이가 아니었다. 얼핏 보면 반편이하고 닮은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쌍꺼풀 진 커다란 눈, 순진한 듯 허무하고 미련한 듯 무심해 보이는 그 눈만큼은 반편이의 것을 빼박은 듯 닮아 있었다. 그것은 유전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1

춘희의 엄마, 금복의 세계라.
평대에 들어오기 전, 금복은 쌍둥이자매가 운영하던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디론가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스물다섯의 한창 나이였지만 이미 사내라면 신물이 날 만큼 충분히 겪은 후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1

그때부터 그녀를 충동질하고 아무때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게 만드는 그 수상한 바람은, 크고 넓은 것에 무턱으로 매료되는 습관과 더불어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녀가 생선장수의 차에 실려 떠나던 그날 밤도 남쪽에서 그렇게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터덜터덜 산길을 넘던 생선장수의 삼륜차를 스쳐 금복의 아버지가 홀로 달빛과 마주하고 서 있던 저수지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0

그것은 자신이 살던 집보다 족히 서너 배는 됨직한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렸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1

거대한 장골壯骨의 사내가 참나무처럼 우뚝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복도 눈을 살짝 치켜뜨고 올려다보았다. 팔 척이 넘는 장골의 사내는 두 사람을 모두 덮을 만큼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린 팔뚝은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보다도 굵어 보였고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적삼 아래 어린애가 뛰어놀아도 좋을 만큼 넓은 뱃구레가 숨을 쉴 때마다 크게 오르내렸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6

그러나 물화物貨의 덧없음이여! 생선장수가 그 모든 것이 한낱 허상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게 마련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63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집채만한 물고기가 솟아오른 것이었다. 부두에 처음 도착한 날 목격했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丈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69

금복과 걱정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변강쇠와 옹녀처럼, 아사달과 아사녀처럼 운명적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부족함도 더함도 없이 연리지連理枝처럼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었고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빈틈없이 꼭 들어맞았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74

그녀가 진정 사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단순한 세계였다. 그녀는 그의 육체를 신뢰했으며 그 거대한 존재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행복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77

그것은 무지의 법칙이었다. 금복은 비로소 충만한 기쁨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육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단순함의 비극적 측면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93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자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올랐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97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은, 영화를 볼 때마다 옆에 앉아 금복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06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부둣가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은 매우 과묵한 사내였지만 금복에게만큼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11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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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6

덧붙여, ‘죽음이란 건 별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춘희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날 폐허가 된 살림집을 향해 걸어가며 불현듯 청산가리의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이 떠올랐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7

사흘째 되는 날, 굄목에 채어 엄지발톱이 떨어져나갔다. 검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뜨겁게 달궈진 철로에 발을 갖다댔다.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아릿한 고통이 차라리 상쾌하게 느껴졌다. 한낮의 소나기를 만나면 그나마 햇볕에 달아오른 몸을 식힐 수 있었지만 젖은 수의가 처덕처덕 몸에 감겨 걷기가 더욱 힘들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2

그것은 마치 커다란 고래가 깊은 바닷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막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고래 모양을 본떠 지은 그 극장은 춘희의 엄마인 금복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2

살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자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天刑의 유니폼처럼 그녀를 안에 가둬놓고 평생 이끌고 다니며 멀고 먼 길을 돌아 마침내 다시 이곳 벽돌공장까지 데리고 온 그 살들을 춘희는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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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제를 곰곰이 생각한다고 그게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한편으로, 문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게 해결되지는 않지만. 하지만 그러면 그래도 긍정적인 기분은 들 수 있고, 그게 알다시피 힘을 준다, 또는 주어야 한다. 그리고 힘은 좋은 거다. 이시점에서 힘은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는 내가 알다시피 돌이 될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기억할 필요가 있는 건 내가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 P53

그는 그녀를 후려갈기고, 모욕을 주고, 정신 차리게 할 만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계속 자기 방으로 움직이며, 나지막이 그녀에게 끔찍한 욕을 해댈 뿐이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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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조사에 따르면 뭄바이 빈민가 거주 여성의 12.5%는 밤에 실외에서 대변을 본다. 그쪽을 "58m를 걸어가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 선호한다. 58m는 그들의 집과 공용 화장실 간의 평균 거리다."19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03

공중화장실 건설을 취소한 지방정부는 예산을 절감했다고 믿을지 모르나 2015년 예일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허위 절감false economy*이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성폭행당할 위험과 위생 시설의 수, 여자가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 사이의 상관관계를 산출하는 수학모형을 개발한 뒤 성폭행에 의해 발생하는 유형 비용(상실 소득, 의료비, 소송비, 수감비)과 무형 비용(정신적 고통, 살해 위험)을 계산해서 화장실 설치비 및 유지비와 비교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04

부가적인 건강상 이득은 당연히 존재한다. 특히 여자들에게 많다. 여자는 소변을 너무 참으면 방광염 및 요로감염에 걸린다. 반대로 물을 너무 적게 마시면 탈수증과 만성변비로 고생한다.28 실외에서 대변보는 여자들은 골반염, 기생충병, 간염, 설사, 콜레라, 소아마비, 수인성전염병 등 다양한 감염 및 질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이 질병들 중 일부는 매년 인도에서만 수백만 명 — 특히 여자들과 아이들 — 을 사망케 하는 원인이다.29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06

여자가 성폭행당할 위험을 해결하지 못하는 도시계획은 공공장소를 이용할, 여성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명백한 침해다. 그리고 부적절한 위생 시설은 도시계획자들이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설계로 여자를 배제하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07

문제는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승객은 "대중교통의 포로", 즉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대중교통 외에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40 이러한 선택지 결여는 특히 저소득층 여성과 제 3세계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09

여자들이 공공장소에서 직면하는 위협적 행위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남자들이 남자 일행이 있는 여자에게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11

젠더 데이터 공백은 우리가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 때문에 악화된다. 2017년에 쓰인 한 논문은 "성희롱이 얼마나 만연한가에 관한 대용량 데이터가 없다"라고 말한다. 저조한 신고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범죄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47 여기에 덧붙여서 성희롱은 "제대로 분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가 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12

뉴욕시의 신고율은 더욱 낮아서 지하철에서 발생한 성희롱의 96%, 성추행의 86%가 신고되지 않는다. 런던에서는 여성 5명 중 1명이 대중교통에서 성추행을 당했지만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원치 않는 성행동을 경험한 사람의 90%가량이 신고하지 않았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13

2016년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여성의 90%는 대중교통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55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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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대중교통의 여성 대상 성범죄 — 쳐다보기, 만지기, 주물럭거리기, 사정, 성기노출, 강간 — 는 신고율이 대단히 낮은 범죄라는 사실이다."61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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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정확히 "무엇이 성희롱에 해당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당국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62 두 번째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범죄임을 깨달은 사람들 중에는 누구에게 신고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63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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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 스포츠에 투자를 하면 골다공증으로 인한 골절 비용이 감소할 수도 있다’는 주장에는 놀랄 것이다. 운동을 하면 젊은이들의 골밀도가 높아져서 노년기에 골다공증에 걸릴 위험이 낮아진다. 연구에 따르면 특히 사춘기 전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30

여자들이 직면하는 성폭력에 관심을 갖고 (충분한 단일 성별 공중화장실 공급 같은) 예방책을 도입함으로써 여성 대상 범죄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줄이면 장기적으로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공공장소와 공공 활동 설계에 여성의 사회화를 반영하면 여성의 정신 건강 및 신체 건강이 보장되어 또 한번 장기적 비용이 절약된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31

한마디로, 공공장소를 설계할 때 세계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빼놓는 것은 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현재는 고의든 아니든 여자를 우선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불의이자 경제적 무지다. 여자들은 공공자원을 이용할 동등한 권리가 있다. 우리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여자를 제외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32

또한 아이슬란드는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일하는 여자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다.6 물론 축하할 일이지만 《이코노미스트》의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아이슬란드의 파업은 "일하는 여자"라는 말이 잉여적 표현임을 가르쳐줬다. 일하지 않는 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을 하고도 급여를 받지 못하는 여자가 존재할 뿐이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36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무급 노동의 75%를 담당한다.7 여자의 일일 무급 노동 시간이 3~6시간인 데 반해 남자는 평균 30분~2시간이다.8 이 불균형은 일찍 시작되어 — 5살 여자아이조차도 남자 형제보다 집안일을 훨씬 더 많이 한다 — 나이가 들수록 심해진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36

그 결과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오랜 시간 일한다. 성별 구분 데이터가 모든 나라에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하루에 34분 더 일한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39

중간 정도의 초과근무(주당 41~50시간)는 남성이 "심장병, 만성 폐질환, 우울증에 걸릴 확률의 감소와 관련"이 있었다. 반대로 여성이 비슷한 시간 동안 일했을 때는 심장병과 암을 포함한 치명적 질병에 걸릴 확률이 지속적으로 "우려스러울 만큼 증가"했다. 여자가 이런 병에 걸릴 확률은 주당 40시간 넘게 일하면 증가하기 시작했다. 30년 넘게 주당 평균 60시간을 일하면 이런 병에 걸릴 확률은 3배로 뛰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43

연금 수령자가 받는 돈은 그가 과거에 납부한 금액과, 연금을 수령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간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이 말은, 여자는 무급 돌봄노동 때문에 유급 노동을 하지 못한 것, (몇몇 국가 및 직종에서 법으로 강제되는) 조기퇴직, 남자보다 긴 예상 수명, 이렇게 3가지로 인한 불이익을 받는다는 뜻이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48

브라질, 볼리비아, 보츠와나의 연금제는 이와 대조적이다. "불입 없이도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경우가 다양해서" 거의 전 국민이 연금에 가입되어 있고 연금액의 남녀 격차도 더 작다.59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49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여성의 무급 노동은 우리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저평가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저평가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49

미국 여성의 85%가량은 어떤 형태의 유급 휴가도 갖지 못한다.81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55

한국에서는 2007년에 "아빠 육아휴직"이 생기자 남자들의 육아휴직 사용률이 3배 이상 늘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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