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말을 타고 홀로 숲에서 나온다. 열일곱살, 흩뿌리는 3월의 찬비, 마리는 프랑스 사람이다.
1158년, 세상에는 사순절 후반의 고단함이 깃들어 있다. 곧 부활절이 올 테고, 올해 부활절은 이르다. 들판에서는 씨앗들이 더 자유로운 공기 속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며 거무스름하고 차가운 흙 속에서 몸을 푼다. 그녀는 이 수녀원을 처음 보는데, 습한 계곡의 언덕마루에 희끄무레하고 냉담한 자태로 서 있고, 바다에서 끌려온 구름은 언덕을 휘감은 채 끊임없이 비를 뿌리고 있다. 이곳은연중 대부분 습한 땅에서 싹을 틔우는 식물들로 뒤덮여 에메랄드와 사파이어 빛깔이고 양과 되새와 도롱뇽이 천지에 깔렸으며 연약한 버섯이 비옥한 토양을 뚫고 나오지만, 지금은 늦겨울이라 모든 것이 회색이고 온통 음지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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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루이 포랭Jean-Louis Forain의 줄타기 곡예사는 19세기 파리 야외서커스의 한 장면을 묘사한다. 그림의 주인공인 곡예사는 장대를 쥐고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모습이다. 이 공연을 위해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오래도록 홀로 줄 타는 연습에 매진했을 터이다. 멋지게 성공하기보다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다쳐서 울컥하는 때가 더 많았으리라. - P4

그러나 그림 속 여인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온 신경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듯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타인의 인정과 환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것, 그동안 연마한 기술을 성공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줄 위의 삶에서 더 만족스러운 ‘내‘가 되는 것, 이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같다. 시끌벅적한 공연장에서 아주 고요히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더 높은 하늘에 닿는다면, 그 희열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그 짜릿함을 위해 그녀는 분명 내일도 적막 넘치는 연습실로 돌아가겠지. 세상의 소음에서 소외되어 홀로 반듯하게 솟구친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없는 숭고함이 느껴진다. - P6

줄 위의 숭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썼다. 줄타기 곡예사의 그녀는 특별하지 않은 이가 고귀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기 선택에 충실한 삶, 자기만 아는 희열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그만 내려올 마음이 아니라면 계속되는 불안과 불만에제 발을 묶어두기보다 줄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에 빠져드는 편이 더 숭고한 결정이었다. - P7

나의 줄타기는 현재 진행중이다. 그러나 용케 내면의 중심을 잡고서 있다. 책을 펴내는 지금, 책을 쓰기 전만큼 타인의 말과 세상의 정답에 요동치지 않는다. 여전히 한 걸음 한 걸음 조마조마한 길이지만 여기에 나의 기쁨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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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넌에 대한 레너드의 견해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세상을 당한 자의 시선으로 매일 새롭게 바라보도록 인이 박인 드라마?이 얼마나 짜릿한 건지를 내게 다시금 일깨웠고, 우리가 왜 친구인지를 새삼 떠올리게 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7

손상의 정치를 공유하는 사이다, 레너드와 나는. 운명처럼 지워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내던져지듯 태어났다는 강렬한 감각이 우리 두 사람의 내면에서 활활 타오른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8

우리의 화두는 살아보지 않은 삶이다. 각자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불평불만의 땔감으로 쓰기 딱 좋은 조건?얜 게이, 나는 짝 없는 여자*?이 우리 삶에 마련돼 있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런 불평등을 직접 만들어내기라도 했을까? 우리 우정은 이 질문에 천착한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8

문제는 우리 둘 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린 영원히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느끼는 인간들인 것이다. 상실, 실패, 패배를 그가 드러내든 내가 드러내든 꼭 한 명은 그러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우리도 좀 달라지고 싶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느끼는 삶이란 게 그러니까. 그리고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9

내 말본새는 남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본다. 판단하느라 노상 날이 서 있는 데다 결점과 결핍과 불완전함을 쉴 새 없이 헤아려대는 목소리. 그런 내 언사에 레너드는 툭하면 눈을 흘끗거리며 입을 다물어버린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10

행동이 되지 못한 충동은 차곡차곡 쌓여 신경을 망가트리고, 망가진 신경은 굳어져 권태가 된다. 복잡한 감정과 망가진 신경, 그리고 마비된 의지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그제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초조하게 올라오고 전화기를 향해 뻗는 손은 마침내 동작을 완료한다. 레너드와 내가 서로를 절친이라 생각하는 건 이런 주기가 일주일이면 돌아오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11

나의 도시는 전혀 아니다. 나의 도시는 우울한 영국인들—디킨스, 기싱, 존슨, 이 중에서도 특히 존슨—의 도시로, 우린 누구 하나 어디로도 가지 못 한 채 이미 거기에 있다. 거기서 우리는 낯선 이의 눈에 되비치는 자아를 찾아 이 사납고 기묘한 거리를 떠도는 영원한 밑바닥 인생이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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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와 미드타운의 어느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운을 뗀다. "넌 요즘 사는 게 어떤데?"
"닭뼈가 목구멍에 딱 걸린 거 같지 뭐," 레너드의 답이다. "삼키지도 못하고 토해내지도 못하고 말야. 당장은 걸려 죽지나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야."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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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연구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 대신 남자 대상 연구의 데이터에 (마치 그것이 여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처럼) 계속 의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이 25~30세, 몸무게 70kg의 백인 남자다. 이름하여 "표준 남성Reference Man"인데 그의 초능력은 인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대표하지 못하지만.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15

능력주의 신화의 끈질김에서 볼 수 있듯 젠더 데이터 공백 메우기는 1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두 번째 단계는 정부와 단체들이 실제로 그 데이터를 이용해서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이 단계는 현재 일어나고 있지 않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22

전통적으로 여성 지배적인 업종의 위험성을 연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직업들이 대개 여자가 집에서 하는 일의 연장이기 때문이다(물론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훨씬 더 힘들지만). 그러나 일터의 여성에 대한 데이터 공백은 여성 지배적 업종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남성 지배적 업종에서 일하는 여자는 "혼란 변수"로 간주되어 데이터에서 누락된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23

여성 골반뼈의 높은 피로골절률은 내가 ‘헨리 히긴스Henry Higgins 효과’라고 명명한 것과 관계가 있다.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음성학자 헨리 히긴스는 제자 겸 피해자인 일라이자 둘리틀Eliza Doolittle이 그의 호통과 멸시를 수개월 동안 참다가 마침내 맞받아치자 당황한다. "왜 여자는 남자처럼 못하는 거야?"라고 그는 투덜댄다. 그것은 흔한 불평이며 이에 대한 흔한 해결책은 여자를 뜯어고치는 것이다. 남성은 보편적이고 여성은 ‘이례적’으로 보는 세상에서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27

비스페놀A 공포가 심각해진 것은 2008년의 일이었다. 이 합성 화학물질은 1950년대부터 깨끗하고 오래가는 플라스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젖병에서부터 통조림통, 수도관에 이르는 수백만 가지 소비재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1 2008년 전까지는 전 세계에서 매년 270만 톤이 생산됐고 너무나 많은 곳에 사용되어 6세 초과 미국인 93%의 소변에서 검출되었다.2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35

우선 파견직은 "단체협상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이는 모든 노동자에게 문제지만 특히 여자들에게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개별 임금협상의 반대인) 단체협상이 여자들에게 특히 중요하다는 증거가 있다. ‘여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성규범 때문이다. 따라서 파견직처럼 단체협상이 불가능한 일자리의 증가는 남녀 임금격차를 메우려는 시도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46

* 제로아워계약: 정해진 노동시간 없이 일한 만큼만 시급을 받는 노동계약. 최소 근무시간과 최소 임금을 보장하는 파트타임보다도 못한 노동조건 때문에 노예 계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 긱경제: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임시직, 일용직 따위를 필요에 따라 고용하는 경제 형태.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43

(주로) 여성이 (주로) 무급으로 하는 일은, 급여를 받고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하고 안 하고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대한 고려 없이 설계된 적시 조달 스케줄 소프트웨어와는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2개뿐이다. 국가가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서 무료로 제공하거나 적시 조달 스케줄 프로그램을 없애야 한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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