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전에 있는 그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사랑이었다.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존재하면 오해할 수 없고 부재할 때도 오해할 수 없는 확실한 감정이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2

커너 부부가 있다. 서로 미워하는 듯하지만 닫힌 문 안에서 성적 쾌락에 몸을 떠는 부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있다. 서로 지극히 사랑하지만 침대를 문도 없는 방에 놓고 순결하게 사는 부부. 아래층에는 아수라장 같은 집에서 거실로 도피하는 남편과 반쯤 미친 몽상가 아내가 있다. 위층에는 병영 막사처럼 말끔한 집에 가정의 중심인 남편과 야무지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내가 있다. 이런 차이들이 내게 특별히 각인되지는 않았다. 여자들 간의 차이는 그다지 놀랍거나 결정적인 무언가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게 입력된 사실은 커너 아줌마나 우리 엄마나 낭만적인 감정을 유난히 소중히 여겼고 두 사람 모두 결혼한 여자였다는 것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9

4월의 흐린 오후였다. 회색 하늘이지만 기온은 적당히 따뜻하고 공기에는 새봄의 달콤한 향내가 가득하다. 정확히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지만 왠지 들뜨고 설레는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종류의 날씨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일〔1943년 4월 19일 폴란드 유대인 강제거주지역의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에 대항해 일으킨 대규모 무장투쟁〕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1

엄마가 바라는 것들은 단순하지만 절대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엄만 그것들을 물이나 공기처럼 필수 불가결한 무언가로 여긴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지금 당장 마셔야만 한다. 엄마가 ‘해야겠다’고 한 욕구는 반드시 채워져야 하고 지금 당장 입술로 가져갈 수 있는 김 나는 음료가 손에 쥐여지기 전까지는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할 리 없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2

우울하게도 내게는 참으로 익숙한 과정이다. 엄마를 곁눈질로 흘깃 본다. 나만의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엄마도 낙관에서 비관으로 갑작스럽게 우회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나와 똑같이 겪고 있는 것 같다. 뺨에 잠깐 동안 생기가 돌았다가 눈은 놀란 듯 커지고 입꼬리는 밑으로 처진다. 나는 궁금하다. 엄마가 나를 볼 때도 같은 걸 볼까. 그날의 분위기는 위험할 정도로 꺼림칙해지기 시작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7

이런 순간엔 우리가 모녀라는 게 마치 외계인이 전달한 메모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엄마와 딸이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과연 그런 진실이 존재하나 싶어진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불운한 운명(엄마는 과부 나는 이혼녀다)을 타고난 무능력한 두 여자, 스스로 행복한 가정이라는 실체를 꾸릴 수 없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쇼윈도 앞에 서면 ‘행복한 가정’이란 건 내 안에서도, 엄마 안에서도 실현되지 못한 한 조각 환상처럼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8

레이스 뜨기는 그저 미적지근하게 곁에 두는 사람, 불안하거나 편안하거나 희망에 차거나 긴장하거나 기분이 들뜰 때나 가라앉을 때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있는 한결같은 친구라 할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5

엄마의 비애는 너무도 원초적이어서 생활을 전부 지배해버렸다. 슬픔은 공기 속에서 산소만 빨아들였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머리와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그저 원치 않는 곳으로 질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셋, 그러니까 오빠 나 엄마 중 누구도 서로에게서 평온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유배지에 갇혀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다. 난생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 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 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 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8

내 공상은 대체로 ‘이렇게 가정해보자’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에는 이 구차한 현실에서 나를 구원해줄 이야기가 이어지기보다는 ‘대의’를 품은 상상들이 뒤따랐다. 이런 식이었다. 모든 일은 언제나 나쁘게 끝나지만 그 비극 안에도 위엄이란 게 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의 요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비극이라는 것. ‘비극 안에’ 머물면 인생이라는 지루하고 빈곤한 고통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전부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무의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내가 알기론 가장 중요했다. 의미를 찾는 게 곧 구원이었다. 그것이 미숙한 십대 작가가 떠올릴 수 있는 첫 문장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9

만약 샤피로 아줌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어두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 입에서 이 말들이 나왔을 땐인정 넘치게 지독하고,후덕하게 짜증스럽다.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4

엄마는 이내 조용해진다. 엄마는 작년인가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태도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허공을 바라본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아득한 표정 속에 홀로 머문다. 그러나 이번의 혼자는 내게 무척 익숙한 그 혼자, 얼굴을 냉소적이고 불행한 가면으로 만들어 그 뒤에 숨거나 당신의 아픔과 실망을 하염없이 헤아리고 있을 때의 혼자와는 다르다. 이 혼자에는 슬픔이 아닌 온화함이 깃들어 있다. 호기심과 흥미는 있어도 자기연민은 없다. 엄마의 눈이 가늘어진다는 건 엄마가 이미 아는 것을 조금 더 명확히 보고 싶어한다는 것, 이제껏 살아온 삶에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의미다. 엄마는 진실을 알려준 꿈에서 깬 것처럼 몸을 흔들면서 말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 엄마는 나직하게 말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6

엄마는 원시적인 상실감에 완전히 소진되어 모든 슬픔을 안으로 흡수했다. 모두의 슬픔이 당신의 슬픔이 되었다. 아내의 슬픔, 엄마의 슬픔, 딸의 슬픔을 완전히 독차지했다. 비탄은 엄마를 가득 채웠고 또 엄마를 비우기도 했다. 엄마는 핏줄이고 도관이고 발현이었다. 그 놀라운 유동성, 감각적이고 까다로운 가변성은 이제 엄마의 것이었다. 엄마는 헝겊 인형이 되어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초점 잃은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고 반쯤 열린 입에선 혀가 나와 있고 팔은 축 늘어져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바짝 긴장하며 경계 태세를 갖춘다. 눈은 날카로워지고 이마는 땀으로 젖고 목에선 불거져 나온 동맥이 펄떡거린다. 2분 후에는 다시 헝겊 인형처럼 쓰러져 소파 위에서 몸부림치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다. 피부는 분필처럼 퍼석해진 채 눈은 질끈 감고 입은 꾹 다문다. 그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이어진다. 며칠이 간다. 몇 주가 지난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8

"하지만 이 책에 배울 것 하나 없다고 말하지는 마. 알맹이라곤 없는 책이라고 말하지도 말고. 엄마한테도, 나한테도, 책에도 그렇게까지 나쁘게 말할 건 없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우리 모두를 업신여기는 것밖에 안 돼." 내 말을 들어보라. 이렇게 현명하고 지혜롭다니. 이 모든 지혜를 10분 전에 얻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0

남편을 여읜 처지는 엄마를 더 고귀한 인간 존재로 승격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에서 회복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부엌일하던 시절에는 가져본 적 없던 당신의 타고난 진지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후 30년을 한결같이 바로 그 진지함에 헌신했다. 지치지도 않았고 지루해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진지함이 가져다준 낙을 유지할 새로운 방법들을 끊임없이 찾아냈고 영락없이 그걸 당신 것으로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3

내가 숨 쉬는 공기는 엄마의 절망 안에 푹 담겨 있다 나오면서 진해지고 의기양양해지며 자못 흥미롭고도 위험한 것이 되었다. 엄마의 고통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 내가 거주하는 국가, 내가 바짝 엎드려 따라야 하는 법과 규칙이 되었다. 나를 지휘하고 통솔하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하게 했다. 나는 끊임없이 엄마에게서 벗어나기를 갈구했지만 엄마가 방에 있을 때면 한 시도 그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엄마의 퇴근을 두려워하면서도 엄마가 귀가하면 잠시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의 존재가 내뿜는 불안은 내 허파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물리적으로 심장이 조여들었고 가끔은 쇠갈고리가 골을 파고드는 느낌까지 들었다). 욕실 문을 잠그고 혼자 숨어서 엄마를 대신해 하염없는 눈물을 쏟았다. 금요일이면 꼬박 이틀간 이어질 게 뻔한 눈물과 한숨, 불씨가 꺼져도 식식거리며 새어 나오는 연기 같은 엄마의 우울증이 공기 중에 내뿜는 묘한 책망의 기운에 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죄책감 속에서 일어나 죄책감 속에서 잠들었고 주말이면 죄책감이 점점 더 쌓여가다 얕은 열병에 걸린 상태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4

묘지를 찾으면 엄마는 그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져 드디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연출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낡아빠진 헝겊 인형 꼴이 되어 있다. 나는 어땠을까? 혼이 나가 입도 뻥긋 못하고 그저 몇 시간 전의 공포에서 살아남았음에 감사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5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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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옆집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버사아아, 버사아아, 지금 집에 있어, 버사?" 이 안뜰을 공유하는 건물 전체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은 하루 종일 갖가지 일로 서로를 불러댔다.("하비 언제 병원 데리고 갈 거야?" "집에 설탕 있어? 내가 매릴린 보낼게." "10분 후에 집 앞에서 만나.") 어찌나 인정과 활기가 넘쳤던지! 신선한 공기와 그림자 한 점 없는 쨍한 햇살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는 햇볕에서 바짝 마르는 빨래 냄새와 섞이며 이 열린 공간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만들어냈다. 나는 부엌 창문에 기대 서서 지금까지도 입에서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안뜰을 바라보곤 했다. 그건 연하고 밝은 초록의 맛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1

그 부엌, 그 창문, 그 안뜰. 그것은 엄마가 뿌리를 내린 대기였고 엄마가 서 있던 배경이었다. 이곳에서 엄마는 똑똑하고, 웃기고, 활기 넘쳤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는 당신을 둘러싼 환경을 경멸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2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3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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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정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생각의 형태, 즉 이야기를 통해 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성이 없거나 또는 양성을 가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고 실험을 쓴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 <어둠의 왼손 -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01>, 어슐러 K. 르 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754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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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저씨는 11층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 냈다. 불길에 휩싸인 언니가 젖은 이불에 둘둘 말아 아래로 내던진 것. 아저씨는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었다. 오른쪽 다리뼈는 산산조각이 났고 오른팔은 골절상. 몸 전체에 타박상과 찰과상. 화물 트럭 운전사였던 아저씨는 직장을 잃고 일 년 넘게 재활 치료를 받았다. 재활 기간 동안 많은 매체에서 아저씨를 인터뷰했다. 적지 않은 성금이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를 도왔다. 아저씨의 다리는 끝내 원래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38

"이상인, 이상인!"
내가 올 한 해 본 애들 중에서 가장 한결같은 학생인 이상인이 자다가 몸을 일으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인정머리 없는 애가 되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85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옥상에서 아래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을 단순하게 불안함과 공포라고 여겼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건 잠재의식 속에 사고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절이라도 할까 봐 지레 겁먹고 놀이 기구는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이곳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오히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설렘과 기대감, 혹은 전율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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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움직이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니 그 속도는 하루에 한 바퀴, 360도를 24시간으로 나누면 한 시간에 15도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순한 계산. 천문학을 책으로 배운 내게는 그저 단위 환산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여러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날, 돌고래가 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기 전까지는.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99

지구 밖으로 나간 우주비행사처럼 우리 역시 지구라는 최고로 멋진 우주선에 올라탄 여행자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의 생이 그토록 찬란한 것일까. 여행길에서 만나면 무엇이든 다 아름다워 보이니까. 손에 무엇 하나 쥔 게 없어도 콧노래가 흘러나오니까.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04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타고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면서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곳의 환경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낯선 땅의 흙과 돌을 채집한 두 사람은 다시 달 궤도로 올라와 사령선과 재회하는 데 성공했고, 세 사람 모두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05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09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열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계절이 멀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시간 중 대부분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뭐라도’ 되었을 무렵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었다. 그렇게 무척 쓸모없었고 대단히 중요했던 열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 끝에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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