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은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공포, 분노, 치욕—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함께 있을 때 자신의 가장 깊숙한 부끄러움까지 터놓고 직시하는 일만큼 우리를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콜리지와 워즈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상대에게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4
순간 우리 셋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곧 한꺼번에 깔깔 웃어젖힌다. 웃음이 멈추자 다 같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수행은 다 같이 했고 수용은 각자가 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9
나는 친구들 못지않게 잠자리도 많이 해봤고 서른다섯이 되기 전에 결혼도 두 번, 이혼도 두 번 해봤다. 결혼은 2년 반씩 지속됐는데, 두 번 다 나도 모르는 어떤 여자(나)가 매한가지로 모르는 어떤 남자(웨딩케이크 위의 신랑 장식)에게 일임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결혼이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9
내가 막상 성적으로 무르익은 건 이 결혼들이 다 끝장난 뒤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욕망의 대상이 되기보다 욕망의 주체가 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란 걸 자각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리고 바로이런 전개에서 배운 점이 있었다. 나는 성욕이 강한 사람이지만 성욕이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아니며, 오르가슴으로 천국을 맛보기는 했어도 지구가 흔들리지는 않았고, 반년 남짓 진이 빠지도록 성적 쾌락에 탐닉할 수는 있어도 늘 그 말초적 자극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마디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숭고했지만 거긴 내 거처가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더 많은 걸 깨달았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0
처음으로—그러나 마지막은 아니었다—남자들은 나와는 다른 종이라는 자각을 했다. 철저히 분리된 이질적인 종. 나와 내 연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게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욕망이 침투할 만큼 성기되, 인간적 유대는 어룽거리게 보일 만큼 불투명한 막. 내겐 그 막 너머에 있는 사람이 현실 같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그런 것 같았다. 그 순간 남자랑 잘 일이 평생 다신 없대도 상관없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2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건 내가 줄곧 상상해온 것 이상으로 대수로운 일이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로맨틱한 사랑이 갈망과 환상과 정서로 짜인 직물 전체를 꿰뚫어 엮여 있는 내 감정의 신경계에 마치 물감처럼 스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 심령을 집어삼켰고, 뼛속을 파고드는 아픔이었으며, 영혼의 짜임에 워낙 깊숙하게 꼬여 있어서 그것이 일으키는 파상을 똑바로 보려고 하면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남은 인생 고통과 갈등의 이유가 될 터였다. 나는 굳어버린 내 심장을 애지중지하지만, 지금껏 애지중지해왔지만, 로맨틱한 사랑의 상실은 여전히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3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다. 전자는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지만, 후자는 일정 중에 빈 자릴 찾는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6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 탈주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 도시가 그 여파로 어지럽게 동요하는 듯이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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