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의 문자는 단어로 분할되어 있지 않아요. 구성 단어들에 해당하는 어표를 결합해서 문장을 표기하고 있어요. 회전시키고 수정하면서 어표들을 결합시키는 거예요. 이걸 봐요." 나는 그에게 어표들이 어떻게 회전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한 단어가 어떤 식으로 회전해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게리가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려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헵타포드들을 바라보았다. "몸이 방사상 대칭이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몸에 ‘전방’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글자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어요. 고도로 근사한 방식이로군."

-알라딘 eBook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215

우리 입장에서 가장 큰 혼란의 원인이 된 것은 헵타포드의 ‘글’이었다. 이들의 글은 전혀 글 같지가 않았고, 오히려 정교한 그래픽 디자인의 집합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행行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선형이나 선형적인 방식과도 거리가 멀었다. 플래퍼나 래즈베리는 필요할 때마다 어표들을 갖다붙여 거대한 복합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하곤 했다.

-알라딘 eBook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217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될 생각. 너는 명백하게, 기가 막힐 정도로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 이 생각은 네가 나의 복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또다시 일깨워줄 거야. 너는 매일처럼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존재는 결코 아니야.

-알라딘 eBook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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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니스와 카야의 차이를 만든 건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환경의 유무일지도 모른다. 유니스가 고용주 식구를 몰살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간의 소통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카야는 테이트를 통해, 어린 그를 보살펴준 잡화점 주인 점핑 부부를 통해, 뒤늦게 찾아온 조디 오빠를 통해 다시 세상과 힘겹게 손을 잡는다. 그런 이해와 소통에는 글자를 읽는 능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이 두 소설은 보여준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23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나 미국 정부가 무너지고 기독교 전체주의 집단이 권력을 잡는다. 그 결과 언제나 그래왔듯이 여성이 가장 심한 탄압을 받는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가장 먼저 취해진 조치는 여자들의 모든 은행 계좌를 막는 것이었다. 이 설정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한 인간의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25

이민진은 미국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마음에 항상 걸리는 것,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써보라고 독려한다고 한다. 이렇게 쓰면 멋지겠지, 이런 이야기가 잘 팔리겠지, 싶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속 떠나지 않는 것, 그것만 생각하면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에 대해 써보라고. 그러면 그 글을 끝까지 쓸 수 있고, 무엇보다 그런 글이 남들에게도 중요한 글, 읽고 싶은 글이 될 수 있다고.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29

작가가 아닌 사람에게도 살아가면서 질문을 품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평소에 질문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질문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소설을 읽어야 한다. 《시녀 이야기》를 읽으며 왜 여자는 이렇게 항상 아이를 낳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고, 《파친코》를 읽으며 국가적인 차별에 개인은 어떻게 맞서야 하나, 라는 질문을 떠올리고, 《제인 에어》를 읽으며 부잣집 남자와의 결혼이 성공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소설 읽기는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을 미리 안전하게 걸어볼 수 있게 해주는 지적인 시뮬레이션 게임과 같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30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혼돈과 미지의 상황 앞에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외계인, 이방인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등, 낯선 그들이 내민 손을 잡을 용기를 내는 사람만이 예상을 뛰어넘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디히야가 웅덩이에서 뻗어나온 부드러운 덩굴손을 마주 잡았듯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가 정세랑의 단편 〈아라의 소설 1〉에 "어떤 모퉁이를 돌지 않으면 영원히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으니까"《아라의 소설》, 34쪽, 정세랑 지음, 안온북스라는 문장이 있다. 살다 보면 한 번씩 돌아야 할 모퉁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모퉁이를 돌 수 있는 용기는 남의 이야기, 즉 소설을 읽으면서 감동과 영감을 받을 때 더 쉽게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난 그렇게 해서 여러 개의 모퉁이를 돌아왔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38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정체성이 아닌, 독립적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카밀라는 행성이라는 정체성을 찾아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카밀라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오랜 세월 동안 가족을 뒷바라지하다가 그들의 등 뒤에서 희미해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낸 것이다. 자신은 행성이라고.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42

그 거주민들은 바로 우리에게서 샘솟는 새 아이디어, 새 생각, 새 발상, 새 철학이다. 그것은 생소해서 언뜻 보기엔 징그럽고 무서울 수 있고, 익숙해지기까지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받아들이면 묵은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것들이 그 묵은 고통을 만들어내 카밀라의 마음과 육체를 병들게 한 것이었다. 카밀라는 왜 그렇게 틈만 나면 옷을 훌훌 벗어 던지려 했을까. 옷 역시 카밀라를 옭아맨 기존의 사고방식, 사회적 통념, 남들의 시선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44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고 새로운 발상을 받아들이고 정체성을 찾는 것은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쉽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47

그런 맥락에서 소설 번역가는 대본을 받아 연기하는 연기자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할에 빙의했다’는 표현은 연기자뿐만 아니라 번역가에게도 해당할 수 있지 않을까.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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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려고 하고 있지.

-알라딘 eBook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85

네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려고 하고 있지.

-알라딘 eBook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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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이토록 시적인 술’*이라는 에세이 청탁 메일을 받았다. 소연 편집자님은 내가 인스타그램에 쓴 글의 마지막 줄을 읽고 메일을 보냈다는데, 내 글의 마지막은 이랬다. "일단 술부터 줄이렴."

아쉽게도 만취 상태로 메일을 확인했다. 그래서인지 제목을 ‘이토록 사적인 술’로 잘못 읽었다. 대낮부터 맥주 캔을 쥐고 책상에 앉아 "맞아, 술만큼 사적인 게 어딨어. 엄청나게 사적인 이야기를 쓸 테다. 자신 있어!"를 외치며 다시 읽으니 사가 아니라 시였다.

‘아, 시였구나. 잠깐, 시라고?’ - <영롱보다 몽롱>, 허은실, 백세희, 한은형, 문정희, 이다혜, 황인숙, 나희덕, 신미나, 박소란, 이원하, 우다영, 강혜빈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4090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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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알라딘 eBook <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중에서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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